성당에서의 첫 영성체를 회상하며...
"그리스도의 몸"
"아멘"
성당에 가보신 분들이라면,
'첫 영성체'라는 단어를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내 삶에서 처음으로 하는 영성체'라는 뜻인데,
'영성체'란, 예수님의 몸이 된 얇은 빵 조각(성체)을 미사 중에 다른 신자분들과 함께 나누어 모시는 행위를 말한다(일반적으로 '먹는다'는 표현보다 '모신다'라는 표현을 쓴다).
영성체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미사 중에 얇은 빵 조각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한다는 믿음.
이 빵 조각 안에 진정으로 예수님이 존재한다는 믿음.
이 빵 조각을 통해 예수님과 내가 일치를 이룬다는 믿음 등,
기본적인 가톨릭의 믿음이 수반되어야 영성체를 할 수 있다.
이 믿음을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느끼기 위해
성당에서는 첫 영성체 대상자를 중심으로 몇 달간 교육을 한다.
나는 10살에 첫 영성체 교육을 성당에서 6개월간 받고, 이듬해에 첫 영성체를 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라는 교육 내용은 어린 나에게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당시 나에게 확실한 믿음은 단순한 것들이었다.
부모님과 누나와 우리 집 강아지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
하기 싫지만 공부라는 것을 해야 내 미래가 행복하다는 것,
성당에 다니며 착하게 사는 게 잘 사는 것 등이 당시 내 믿음의 전부였다.
나는 천주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열심한 성당 활동을 보며 자랐고, 성당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 '좋은 것'으로 이해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성당 신자분들의 열심한 활동 모습을 보면서 '참 부지런하시다'라고 생각했다. 정성스럽게 미사를 준비하는 모습, 미사 전에 흐르는 조용하고 진지한 분위기, 열심히 따라 부르는 성가 노랫소리, 미사 후에 나누는 간식들이 참 좋아 보였다. 특별한 형용사가 필요 없었다. 그냥 '좋아'보였다. 성당에 다니며 지내는 모습이 잘 사는 모습으로 보였고, 그렇게 믿었다. 내가 신부님을 꿈으로 가지게 된 것도 이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빵 조각이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하니, 머리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믿어야 한다고 하니, '믿어야 하는구나'하고 그냥 믿었다. 나의 믿음에는 근거가 없었다. 믿어야 한다고 하니까 그 말을 믿고, 빵 조각이 예수님의 몸이 된다는 것을 믿었다. 누군가가 '왜 믿어야 해?'라고 묻는 다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10살 때 받은 첫 영성체 교육으로는 믿음이 무엇인지 깊이 있게 알 수 없었다. 단순히 기도문 열 가지 정도를 외워서 시험을 치렀고, 하느님이 좋은 분이시고, 성당에 꾸준히 나오며 하느님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배운 정도였다.
훗날, 신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좀 더 구체적으로 배우고 이해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셨고, 이 사람들이 죄에서 구원받게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이 예수님이 본인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성모님이 중요한 분이신 이유는, 인간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낸, 본받을 만한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신부님이 되는 길을 걸었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주제와 늘 함께 있었다. 나에게 믿음은 삶의 기본이 되는 덕목이었다. 나 자신을 믿고 공부하고, 가족을 믿고, 친구를 믿고 하느님도 믿으며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가끔씩, 믿음에 걸맞은 행동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들이 있었다. 믿음이 전부가 아니었다. 믿는다면, 그 믿음에 맞게 행동으로 살아내야 하고, 행동과 함께 가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었다.
어린 시절, 몇몇 어른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볼 때가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면, 그런 분들도 성당이나 교회, 절에 다니시는 열심한 신자분들이셨다. 어린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성당을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는 늘 사랑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열심히 두 손 모아 기도하면서 정작 가정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기적이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믿음'이라는 덕목은 기본으로서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행동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것을 느꼈다.
가족의 분위기로 인해 하느님을 믿는 것은 나에게 큰 의무였다.
2000년, 성당에서 첫 영성체를 할 때, 환하게 웃으시던 부모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처음으로 입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대답했던 '아멘'도 귓속에 생생한 소리로 남아있다.
미사를 마치고 보좌신부님과 함께 촬영한 사진도 잘 간직하고 있고, 하느님께 처음으로 신부님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소중한 순간이다. 모두가 나를 향해 자랑스럽게 웃어 보였고, 나도 기뻤다. 성당은 내 주변의 모든 분들이 좋게 생각하는 곳이었고, 좋게 생각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지금 고백하자면,
나에게 믿음은 내 주변의 환경 속에서 나에게 심어진 의무적인 덕목이었다. 믿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성적으로 나는 종교적인 믿음을 거부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을 믿는 것은 이성적인 사고를 넘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내가 가지고 있던 하느님과 성당에 대한 믿음에 의심을 품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에 스스로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종교가 없어도 양심을 잘 지키며 위인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범죄나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에 대한 믿음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혜로 작용될 수 있지만, 신자라는 타이틀을 남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믿음'은 삶의 기본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은 존재다.
이 나침반이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 두 발로 직접 걸어가는 것이 '행동'이다"라고.
내가 믿는 믿음과 행동이 함께 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살길 바라본다.
어린 시절의 나는 단순히 환경에 의해 믿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 있는 시각도 가졌다. 마음 깊이 믿고, 실천을 하기 위해서 언행일치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해 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로만 사랑한다 하지 않기...
질투가 나거나 화가 나는 사람이 있으면, 조용히 원인을 깨달을 수 있도록 생각하는 시간 가지기...
순간적인 불편함을 피하고자 그냥 괜찮다고 말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정리해서 이야기해 보기...
최대한 거짓말을 하지 않기...
등등 여러 가지 노력을 통해 나의 믿음을 완성해 갈 것이다.
나의 프랑스인 아내 마틸다도 천주교 신자이다. 비록 유아세례 이후 성당에 다니지 않았었지만, 25세가 넘어서 다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찾은 성당에서 기도하다가 하느님을 만난 듯 행복한 기분이 드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그 체험 이후, 성당에 다시 다녔다고 한다. 개인적인 체험은 언제 어디서 맞이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거나, 좋은 기분을 느낀다거나, 어떠한 형체를 보는 신기한 체험을 한 적은 없다. 나에게 있어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천주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것, 학교나 군대나 성당 등 내가 있었던 곳에서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났던 것, 그리고 나의 바람대로 사제로 서품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기도 주제는 항상 '감사'이다. 오늘 이 순간까지 살아오고, 삶이라는 경험의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다. 신학교에 다닐 때는, 다른 여러 신학생들이 특별한 하느님 체험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왜 특별하게 느끼는 것이 없는 거지?' 하며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걱정은 단지 욕심이었을 뿐이다. 나를 그대로 바라보고 나의 작은 능력을 알아보는 것이 참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올해로 첫 영성체를 한 지 24년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올해 초에 사제직을 그만두고, 마틸다와 함께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법에 따라 성품 장애가 생겨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하느님도 이 내 마음을 알아보시리라 바라본다.
나름대로 인생의 경험이 쌓여갈수록
믿음, 사랑, 희망, 자비, 겸손 등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중요성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천주교에 '야훼이레'라는 말이 있다.
"하느님께서 필요한 것을 살펴보시고 미리 준비하신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면 나의 삶은 기쁨과 역경,
이 두 주제의 사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사건들이 모두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의미 있는 일들이라고 믿으며, 오늘도 하루하루 걸어간다.
이렇게 믿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믿음 안에서 내 삶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