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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사 Jul 17. 2024

[어린 시절 (1)] 우리 할머니

할머니의 칼국수

 나른한 토요일 아침,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창문 밖으로 바라본 파란 하늘은 드넓었고, 햇살도 적당히 있었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지만, 그날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평화로운 적막 속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할머니께서 어젯밤에 돌아가셨단다".


 안타까워하는 가족의 목소리를 듣고도,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할머니께서 지난 9년 간 요양병원에 들어가 계셨고, 최근 2년 동안은 치매를 앓고 계셨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순간은, 내가 프랑스로 떠나기 일주일 전, 2018년 봄이었다. 할머니의 치매가 시작되던 시기였기에 몇 가지 장면들이 생각난다. 할머니는 가끔씩 누나의 이름을 헷갈려하셨고, 며느리인 엄마를 이전과 달리 딸을 대하듯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계속 "신부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래서 나는 매번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할머니, 저 아직 신부님 아니에요. 저 아직 3년은 더 공부해야 돼요!"


이에 할머니는 매번 웃음으로 답하셨다. 나에게 할머니의 웃음은 낯선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 어린 시절의 할머니는 쉽게 웃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잘 웃지 않으시고, 가끔 까칠하고 엄하게 대하시면서도 여러 가지 잘 챙겨주시던 분이다.     


할머니의 선종 소식을 듣고 나서 부모님과 누나와 짧은 통화를 하고, 나는 산책을 하러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의 소식을 듣고 놀라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보냈던 시간을 다시 되돌아보면서, 천천히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려오는 것 같았다. 할머니와의 큰 사건들 보다는 일상의 작은 일들이 더 많았지만, 이 작은 일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할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할머니의 선종 소식을 받은 날은 2020년 10월,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가 난리였고, 나는 프랑스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가 다니고 있던 프랑스 신학교 내에 감염자가 있어서 학교 기숙사에 봉쇄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어린 시절의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힘이 아주 세셨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때까지 나를 번쩍번쩍 들며 목욕을 시켜주셨다. 아침에 텔레비전에 한눈팔고 있는 내게 빨리 양말 신고 학교 가라고 보채기도 하시고, 더운 여름날 시원한 밀면을 사 주기도 하셨다. 방과 후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리 집에는 늘 할머니만 계셨다. 부모님 두 분 다 회사에 가셔서 늘 밤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누나도 여러 개의 학원을 다니느라, 나는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내가 인사드리면, 

할머니는 늘 "오냐~ 왔냐~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할머니의 대답은 

늘 같았다. 

할머니의 대답을 듣고 나서 코에 아른거리는 집안의 냄새도 

늘 똑같았다.

그 냄새는 바로 칼국수 냄새다.


할머니는 칼국수를 엄청 좋아하셨다. 

양파와 애호박을 듬뿍 넣고 푹 끓여 마지막에 김가루를 얹어 완성한 할머니의 칼국수는 정말 진국이었다. 지금도 길거리의 칼국수집을 보면, 할머니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할머니의 칼국수 사랑으로 인해, 초등학교 때 나의 평일 저녁식사는 거의 늘 칼국수였다. 자주 먹는데도 질리지 않았던 게 참 신기할 노릇이다.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는 일은 나와 우리 누나에게 소소한 행복이었다. 부모님께서 건강 때문에 사주지 않으시던 간식들을 할머니께서는 다 사주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난다. 시장에서 할머니가 사주시던 '단술(식혜)', '쵸키쵸키(초콜릿 아이스크림)', '호떡', '옥수수빵' 등등... 물론 부모님께는 밖에서 무언가를 사 먹었다는 것 자체가 늘 비밀이었다. 그래서 더 맛있었나 보다... 


또 할머니께서는 천주교 신자로서 집에서 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한 손에 묵주를 쥐고 기도를 빠르게 외우시고, 다른 한 손에는 성수를 들고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시며 축복하셨다. 나는 할머니를 통해 '열심히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처음 배웠던 것 같다. 밤 10시경, 할머니께 "안녕히 주무세요" 하면, 할머니는 늘 "만과 하고 자!"라고 대답하셨다. '만과(晚課)'는 천주교 저녁기도의 옛 단어이고, 할머니가 즐겨 사용하시던 단어였다. 나는 이어서 "네!"라고 대답하고 가족과 저녁기도를 하고 잠이 들었다. 


할머니는 사내대장부처럼 목소리가 크셨다. 

그래서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가 무섭기도 하고 때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하루는 비 오는 날, 할머니가 나에게 우산을 주러 내 교실에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 그때 할머니는 교실 문을 열고 담임선생님께 큰 소리로 인사한 다음, 내 이름 석 자를 크게 외치셨다. 나에게 우산을 건네주려고 하신 일인데... 그 당시에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할머니가 부끄러웠다. 할머니께 고맙다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든다. 


나에게 "할머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맛있는 할머니표 칼국수, 매일 기도하시던 모습, 쩌렁쩌렁하시던 목소리.

세 가지 모습들이다. 지금은 눈으로 귀로 다시 보고 들을 수 없지만, 나의 기억 속에 그리고 우리 가족의 기억 속에 계속 간직될 것이라 믿는다.  


신학교 정원에서 산책을 마치고, 신학교 성당에 들어와 앉았다. 곧이어 눈을 감고, 할머니의 모습처럼 나도 기도를 했다. 하느님께 '할머니를 부탁드린다'라고... '당신의 품 안에 따뜻하게 받아들여 달라'라고... 기도했다. 

찾아뵐 수 없었던 할머니의 장례식은 부모님을 통해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장례식 사진들은 내 휴대폰에 고이 저장되어 있다. 소중한 할머니에 대한 내 머릿속의 기억처럼.


그리고 바로 어제, 

2024년 7월 15일, 마틸다가 한국 음식이 먹고 싶다고 여러 한국 음식들을 소개해달라고 보챘다. 

그래서 구글 이미지에 들어가 한국 음식을 검색했더니, 스크롤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칼국수'가 보였다. 

곧바로 할머니 생각이 났다.

값 비싼 해물이 들어간 것도 아닌, 화려한 그릇에 담긴 것도 아닌, 

그냥 맛있었던 할머니의 따뜻한 칼국수가 먹고 싶은 하루였다...


또 할머니가 그리운 하루였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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