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섬 Jul 07. 2022

청춘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머리가 곱슬곱슬해 '깜씨'라고 불렸던 5학년 때 짝꿍이 어느 날 흥얼거렸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영가가 구슬퍼

<청춘 - 산울림>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어린 내 마음에 훅 들어왔다. 나는 바로 짝꿍에게 쪽지를 내밀며 -그 노래 여기다 적어-라 했고, 짝꿍은 곧 제목과 가사를 적어주었다. 학교에 오면 우리는 무슨 뜻인지 알 필요 없이 한동안 '청춘'을 밥 먹듯이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춘'을 들으면, 그 노래 참 구슬프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그런 시절.

사전적 의미가 매우 놀랍다. '청춘'이라는 글자는 어느 특정한 연령대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떠올리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럴 나이가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고 생각하여 그동안은 아무 관심 없이 지냈다.


우리 모두에게 청춘의 시절은 있었다. 어떤 이에게는 사전적 의미처럼 10대 20대가 막힘 없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던 시절일 테고, 또 어떤 이에겐 이미 지나간 40대 50대가 가장 기억에 남는 꽃피는 청춘이었을지 모른다. 또 다른 누군가에겐 바로 오늘이 과거 속에 묻히며 회상 속 청춘으로 떠오르겠지.


어느 날부터인가 나이를 비교하며 계산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를 기준으로 열 살 터울의 위와 아래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그 나이대의 사람들을 떠올린다. 숫자를 생각하면 막연한데 사람을 생각하면 희한하게 그 속에 내가 보였다.


10년 전에 나는 무엇을 했고 어떤 시간을 보내며 어떻게 살았는지. 현재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앞으로 10년 후 저 사람의 나이가 됐을 때 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40대에 접어들면서 생각의 전환점이 생겼다. 건강, 명예, 돈, 사람. 물론 다 중요하지만 한 해 한해 정처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가장 아쉽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면 살수록 나이대가 주는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닌 듯하다. 5년만 젊었으면, 3년 전으로만 되돌아갔으면, 아니 한 살만 덜 먹었으면. 결국 세월 앞에 무너지게 된다. 이제는 나보다 어린 사람이 부럽다. 그저 나이가 어려서, 단순히 그것 한 가지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 두려움에서 우러나온 후회의 산물이거나 무언가를 이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일지 모른다. 나보다 10년을 먼저 산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지나 보낸 10년이라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음에 안도의 한숨도 쉰다. 그리고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의 이 10년을 헛되이 보내면 안 되겠다는 새로운 다짐도 한다. 이제는 세월이 너무 빨라서 한 번쯤 붙잡고 싶은 나 자신의 작은 위안일 뿐이지만.




얼마 전에 친정엄마가 오셨었다. 목적 없이 3주간 다니러 오신 건 결혼 20년 만에 처음이다. 엄마는 소위 쓸고 닦기의 달인이다. 딸네 집에 오면 우선 고무장갑과 그 안에 낄 하얀 목장갑부터 찾는다. 행주는 몇 장 구멍이 나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엄마는 팔순을 앞둔 연세에도 청소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묵은 때 벗기기 전문이라 불린다. 우린 우스갯소리로 차라리 청소회사를 차리라고, 그러면 떼돈 벌겠다고 말다. 그 말은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말고 편하게 계시라는 회유의 표현이었지만, 엄마는 못 알아듣고 친정집으로 돌아가는 날 현관을 나서기 전까지 손에서 걸레를 놓지 않았다. 집이 쾌적해서 내 수고는 덜었지만, 마음만은 편치 않았다.


하루는 남편이 엄마에게 청소가 좋으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청소할 시간에 다른 것을 하시라는 말과 함께 취미를 가져 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엄마는 이것은 어쩌고, 저것은 또 어떻고 하면서 핑계 같은 이유를 대며 회피했다. 남편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할 때 좋으시냐, 무엇을 하면 즐거우시냐, 물어도 봤지만 정작 본인인 엄마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 때 즐겁고 좋은지 잘 몰랐다. 평생 해보지 않아서 낯설고 두려움만 앞선 눈치였다. 그러자 남편이 엄마의 젊은 시절에 관해 들려달라고 했다. 엄마는 그게 왜 궁금하냐며 웃더니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신나게 이야기를 펼쳤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난 남편과 내가 내린 결론은 엄마에게는 청소가 전부라는 것이다. 엄마는 살기 팍팍하여 취미를 가질 시간도, 여유도, 생각도 전혀 못 했다. 지금부터라도 엄마에게 맞는 취미를 찾아주려는 남편의 노력이 가상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엄두를 못 내는 엄마가 안쓰럽고 씁쓸할 뿐이다.


엄마를 보며 나의 노년을 그려 본다. 내가 엄마 나이가 되었을 때 나의 청춘은 어느 때쯤이고, 그때 난 무엇을 하여 그 시절을 청춘이라 규정지을 수 있을까.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돈을 떠나서 소일거리가 필요하다는 중요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일이든 취미든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엄마가 청소에 온 신경을 쓰는 것도 이미 엄마에게는 청소가 취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엄마 자신만 그것을 모르는 것 같다. 어쩌면 어려운 환경에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탓도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 아빠를 일찍 여의고 홀로 딸 둘을 키울 수밖에 없었던 엄마가 버티는 목숨 줄이 슬프게도 청소가 아니었을까.

   



아침이 되면 가장 먼저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어제의 얼굴과 비교한다.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는지. 4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얼굴을 보며 묘한 감정에 빠진다. 나부터도 이러한데 우리 부모 세대들은 오죽하실까?

한때는 어리석게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몇십 년 후로 훌쩍 넘어가면 좋겠다고 바란 적이 있었다. 또 초고속 기차를 타고 잠깐 잠든 사이 기차의 속도만큼 세월이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오늘이 올 줄 알았다면 철없는 생각 대신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건설적인 구상을 할 걸 그랬다.


나이가 더해질수록 세월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 어제는 그제보다 빨랐고, 오늘은 어제보다 더 빨랐다. 지금이라도 시간의 빠름을 알아차린 게 대견하고 다행스럽다. 적어도 이 순간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집 밖에 나가면 어떤 향기가 나는지, 내 주변에 누가 있는지 그리고 난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하루하루 알아차리고 기억하려고 애쓴다. 먼 훗날 꺼내 볼 오늘 이 청춘을 잊지 않기 위해.


청춘이란, 내 인생의 전성기, 일생에서 가장 기억나는 한 지점 그리고 화양연화가 아닐까.




'깜씨'는 어떤 어른이 되어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