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입에 거품을 문다고 한다. 치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일방적으로 통화의 상대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1년 동안 줄곧 인연을 맺어온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신이 해준 것에 비해 그 사람은 고마움도 모르고, 더 바라고, 심지어 뻔뻔하기까지 하다는 내용이었다. 간간히 들었던지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또 시작이구나', '오죽하면 저러겠나' 싶어 그 속이 다 풀릴 때까지 잠자코 들어주고 있었다. 때로는 ‘내가 감정 쓰레기통인가?, 내가 남들보다 만만한가?, 다른 사람한테는 좋은 얘기만 하고 나한테만 이러는 거 아냐?’ 지치다 보니 의심까지 들었다. 하지만 ‘친하니까 참는다, 이것도 오래가지는 않겠지’ 스스로 나 자신을 위로하면서 오늘도 휴대폰을 잡고 버틴다.
어쩌면 인생의 모든 고뇌는 관계에서부터 흘러나오지 않을까. 관계가 없다면 상상 이상의 기쁨도 없겠지만 힘듦과 후회도 없을 거다. 전화기 상대는 매번 ‘그런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다. 나는 그 누구보다 나를 편안하게 해 주고 많은 것을 배려하는 사람에게라든가, 아니면 다시 태어난대도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인물을 표현할 때 ‘그런 사람’이라고 말한다.
매일 밤 나를 상념으로 이끄는 사람에게 붙여 준 이름표인 ‘그런 사람.’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형성된 수많은 관계 속에서 어울리고 부대끼며 살아왔다.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지금은 가장 가까이 있고 나를 제일 잘 아는 편안한 사람이 다음 생에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한 명으로 단정 짓기는 힘들더라.
어느 날 재미 삼아 온라인 타로를 보았다. 집에서만 갇혀 지내는 은둔형 외톨이란다. 그런데 발끈할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라는 사람을 규정짓는 족집게 같은 한 줄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몸이 갇혀 있다기보다 내 마음이 늘 갇혀 지냈던 것은 아닐는지.
결혼 후 남편이 제일 편했다. 밖에 나가 친구를 만나도, 회식을 해도, 가족과 함께 하는 외출만큼 좋지도 편하지도 않았다. 사방이 어둑해지면 불안한 듯 시계만 쳐다보고 눈치껏 일어서기 바빴다.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때서야 긴 여정을 끝낸 듯 마음이 안정을 되찾았다. 만남의 즐거움을 전혀 만끽하지 못한 채 늘 불편한 자리로만 크게 다가왔다.
난 사람 만나는 게 어색해. 숫기도 없어. 말하는 것보다 글이 더 편해. 그래서 사람 만나기가 거북해.
미리 말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재미없다는 뜻이야.
스스로 사교성이 없다 판단을 내려 나 좋다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라고 선을 그으며 그들과의 거리를 넓히는 작업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난 원래 인복이 없으니 고독할 수밖에 없지'라고 합리화하며 점점 '혼자가 좋아'를 외치고 있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또다시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생각하면 핸드폰에 저장된 모든 인연들을 곱씹으며 머릿속에서 하나 둘 정리를 해나갔다. 그렇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추려졌다.
사람을 잘 사귀고 인간관계를 무난하게 하는 사람들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한 해 한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그 사람들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동안 내가 평범하지 못했다는 것에 눈을 떴다. 때로는 표정 관리도 해야 하고, 알아도 모르는 척 슬쩍 넘어가기도 하고, 좋아도 너무 티 내지 말고, 내 일 아닌 것에 깊이 관여하지도 말고, 무엇보다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고 나를 학대하는 근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관계는 상대적이지 않을까. 내가 잘하면 상대도 나한테 진심이고, 내가 싫어하면 상대도 나를 싫어하더라. 내가 호감을 비치면 상대도 나를 마음에 품고, 내가 불편해하면 상대도 나를 어려워하더라.
벌써 누군가에게는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잊지 못할 추억일지. 끝까지 함께 하고픈 현재 진행형 일지. 아니면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후회의 흔적일지. 궁금하다.
한 가지 일을 힘겹게 끝냈을 땐 시원섭섭하지만 허무하기도 하다. 인생의 끝자락, 삶의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허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도 나름 힘들게 열심히 살았는데 허무하면 인생이 너무 덧없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