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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섬 Jul 31. 2022

지나간다

시간의 차이일 뿐 모든 것은 다 지나가더라.

추운 겨울이 지나가듯
장맛비도 항상 끝이 있듯
내 가슴에 부는 추운 비바람도
언젠간 끝날 걸 믿는다
<지나간다 - 김범수>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서가 아닌 일찍 생을 마감하고 싶어서였다. 타임머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제일 먼저 올라타서 나에게 남은 시간의 끝자락으로 훌쩍 뛰어넘어 가기를 바랐다.

내가 지닌 고뇌의 무게가 나이보다 훨씬 무거워서 가장 행복해야 할 어린 시절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았다. 남들에게 그저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는 가장 힘겨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초등학교 시절 제일 부러웠던 친구가 있다. 우리 집 앞 한옥에 살던 K이다. 결코 K가 예뻐서도, 공부를 잘해서도, 친구가 많아서도 아니다.


K 집에 놀러 가면 항상 K의 엄마가 계셨다. 살가운 성격은 아니어서 먹을 것을 챙겨주신다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 곁들여 내 준 적은 없지만, 그 얼굴 뒤에는 왠지 모를 포근함이 있었다. 하교 후 집에 들어가면 나를 맞아 주는 건 빈집과 고요함뿐이어서 그 느낌이 더 크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K 집 마루에는 항상 쌀가마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쌀을 볼 때면 매일 끼니 걱정하는 우리 집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상황에 부러움과 속상함이 공존했다. K와 놀고 있으면 세련된 양복을 차려입은 바지런한 K의 아빠가 일정한 시간에 퇴근하셨는데 그 모습도 좋아 보였다. 가장으로서 성실하지 못했던 아빠를 볼 때면 어린 마음에도 그런 부모를 가진 K가 복이 많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는 세상과 K가 사는 세상이 너무 달라서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에 사는 게 맞나 싶었다.


세상의 모든 비극이 비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부터 나는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겨 특별히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도 창피한 마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집 밖에서는 마음이 위축되어 눈치를 보지만 안에서는 엄마에게 내색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기만 했다. 감정 표출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부모에게 속내를 말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어떻게 운을 떼야할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상황이 절대 달라질 리가 없는데 구구절절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이런 감정들은 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긴 터널에 갇혀 나는 희망을 전혀 품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터널 속에서 구석구석 헤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그토록 바라던 어른이 되어 있었다.






김중혁의 단편 중에 '휴가 중인 시체'라는 소설이 있다. 제목이 주는 메시지가 그럴싸하고 소름이 돋는다.

고통에 싸여 삶을 놓아버린 무기력한 사람들을 일컬어 그렇게 말했던 것일까.

이생에 사람들이 잠시 휴가를 나온 것이고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이기에 돌아다니는 시체라는 의미일까.


"나는 곧 죽을 거니까요. 죽을 거니까 계속 돌아다니는 거예요.
 한 군데 있으면 자꾸 생각하게 되니까 생각하지 않으려고."


가명으로 불리던 남자 '주원'은 45인승 버스에 '나는 곧 죽는다'란 자극적인 플래카드를 달고 정처 없이 다닌다. 스쿨버스 운전 일을 하던 '주원'은 술이 덜 깬 채로 아침 등굣길에 아이를 죽일 뻔한 사고를 저지르고 스스로 자신을 버리지 않으려 버스에 자기를 유폐하고 죽음으로부터 도망 다닌다.

아이러니하게 '주원'은 발작처럼 스스로 뺨을 때리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지만 죽음은 두려워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음 이후의 편안한 상태를 갈망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의식에 괴로워하는 '주원'의 모습이 양심적이다. '주원'은 분명 우리와는 다른 양상으로 비치지만 어떤 일에 있어 양가감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의 모습이 보여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가 남의 상처에 무감각해지지 않는다면 적어도 내가 상처받아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앞으로 적지 않을까.  






문득 '죽고 싶다'라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죽어야겠다'라고 결심한 적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전학해 와서 제일 먼저 사귀었던 친구가 어느 날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는 별로 살고 싶지 않아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봤다며 심각하게 말했다. 다음 날에는 죽음에 관한 너스레를 떨며 어떻게 죽는 게 가장 덜 고통스러울지 고민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죽는 방법에 대해 예를 들어가며 하나씩 열거해 나갔다. 나는 특이한 애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여 친구가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두려워 그 친구의 말을 유심히 들어준 적이 있다. 다행히 그 친구는 몇 주 그러다 말았다. 세상 물정에 탁월하게 밝은 중2병을 앓던 사춘기 소녀의 고뇌에 찬 푸념이었던 셈이다.


죽음은 나약해서가 아니라 살고 싶다는 절규이고 도망가려는 나를 잡아달라는 신호이다. 같은 세상에 존재하며 우리가 비슷한 처지라는 동질감을 느끼고 가슴에 응어리진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돌덩이 같던 한숨도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아픔과 고통이 휘몰아칠 때 그것을 온전히 맞아야 한다면 언젠가 끝이 있을 거라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 믿음을 원동력 삼아 버티다 보면 때로는 웃을 일도 생기고 고통은 조금씩 조금씩 시간 사이로 가려진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영원할 것 같았던 관계며 사랑도 결국엔 끝이 있고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혼자 걸어가야 할 때도 있다. 혼신을 다해 노력하여 성과를 내면 주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가로채기도 한다. 마음이 잘 통한다고 믿어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털어놓으면 하루도 못 가서 화살이 되어 등에 꽂힌다. 때로는 억울한 일도 당한다. 머리로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사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하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무조건 접고 들어가야 할 때도 있다. 의지와 다르게 말이 와전되어 오해를 사고 그 일로 내 안에 갇혀 스스로 고립된다. 또 사기를 당해 금전적인 손해를 보고 구렁텅이로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시간의 문제일 뿐 다 지나가더라.


세상이 그렇게 삭막하지만은 않다.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옆의 누군가는 죽을 것처럼 힘들면 손가락이라도 잡으라고 손을 내밀어 준다.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봉투를 내밀기도 하고 기분전환이라도 하자며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가준다. 눈물을 흘리면 닦아주는 대신 펑펑 울 수 있게 말없이 토닥여주고 귀가 따갑게 푸념하면 해답을 찾아주려 나무라기보다 미소를 머금고 끝까지 들어준다. 마음을 나누었던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할 때는 너를 만나 행복했다고 감사의 인사를 한다. 시무룩해 있으면 너에게 필요할 거라며 책 한 권 슬쩍 내미는 이도 있다. 얼굴은 모르지만, 정성스레 쓴 글을 읽어주며 마음속으로 삶을 응원한다. 기운이 빠져 널브러져 있으면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며 용기를 주고 마음을 써 주면 고마워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기쁜 일이 있으면 진심으로 같이 기뻐해 주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준다. 한 번씩 안부를 물어주고 너에게 필요할 것 같다며 선물을 보내준다.   


희망의 끈을 붙들고 버티다 보면 감기가 지나가듯 사랑의 열병이 식어가듯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숨통을 쥐고 있던 고통도 끝이 난다.


지나간다. 지나갔다. 그렇게 모든 것이.


 




사람은 얼굴이 답안지예요.
문제지는 가슴에 있고 답안지는 얼굴에 있어서 우리는 문제만 알고 답은 못 봐요.
그래서 답은 다른 사람만 볼 수 있어요.
사람과 사람은 만나서 서로의 답을 확인해줘야 한대요.
[김중혁 - 휴가 중인 시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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