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대한 단상
어느 해 겨울이었다. 잠시 일한 맨해튼 한국학교에 겨울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학교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경매 상품에 ‘아이들 데리고 센트럴파크 아이스 링크에서 스케이트 타기’ 상품이 250불에 나왔다. 나와 음악 선생님이 그 상품에 당첨되었다. 스케이트를 타는 날, 아이들을 데리고 링크장으로 갔다. 그날따라 날씨는 차갑고 바람까지 불어 더없이 을씨년스러웠다.
“날씨도 추운데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탈 테니, 선생님은 여기서 커피 한 잔 하시면서 보고 계세요.”
젊은 음악 선생이 나를 배려해 주었다. 커피 대신 달콤한 핫 초코를 사들고 빈 벤치를 찾아 앉았다.
신나는 음악도, 흥겹게 스케이트를 지치는 모습도 딴 세상의 일처럼 느껴지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두 손으로 토닥거렸다.
“선생님! 추우신데 고생하십니다!” 한 아이의 아빠였다.
너무 추워서였을까? 아니면 내 외로움이 너무도 무거워서였을까? 어깨를 감싸준 그 학부형의 손길에 난 그만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그 따스함이 오래오래 잊히질 않았다. 손은 그렇게 살짝 얹거나 토닥거리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언젠가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손에 대한 포스터 전시회를 본 적도 있다.
1차 세계대전 포스터부터 1980년대 일본 자생당의 손톱 에나멜 광고까지, 손의 기능과 손이 표상하는 의미를 광범위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전후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해 서로 협동하여 일하는 손,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보를 치고 있는 손, 시각장애인들에겐 눈이나 다름없는 점자를 읽고 있는 소중한 손 포스터들이 눈길을 끌었다. 거칠지만 생동감 넘치는 손의 모습에서 새삼 손의 고마움이 느껴졌다.
반면, 사람의 목을 죄고 있는 범죄자의 손과 갈등을 의미하는 두 주먹의 대결, 상대방을 업신여기는 듯 아래로 향한 엄지손가락의 모습에서는 손이 파괴적인 도구로도 쓰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중 「속삭이는 벽(Szepczace Sciany, Whispering walls)」이라는, 낡고 늙은 손을 나타낸 모신스키(Marek Mosinski)의 흑백 포스터가 강하게 시선을 잡아당겼다. 아주 오래된 영화, 외롭고 가난한 과부 할머니의 망상에 관한 영화인 「속삭이는 것들(The Whisperers)」의 내용을 시사하듯, 크고 거친 두 손이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포스터 속의 두 손은 우리에게 무엇을 속삭이고 있는 것일까, 잠시 궁금해졌다. 부와 명예를 움켜잡기 위해 애를 쓰지만,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늙고 텅 빈 두 손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네일살롱을 하다 보니 손에 관심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손톱의 모양이나 색깔뿐만이 아니고 '사람의 손'에 대한 생각도 자주 하게 되었다. 슈퍼에서 어쩌다 잔돈을 건네주는 캐셔들의 손이나, 악수를 건네오는 사람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삶의 팍팍함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때도 있었다. 세월이 담긴 손, 어쩌면 얼굴의 주름살만큼이나 삶을 대변하는 훈장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손은 수천수만 가지로 쓰일 수 있다. 쥐고, 붙잡고, 만지고, 빼앗고, 때리고….
'너는 네 손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갑자기 내 손이 내게 물어오는 것 같았다.
손에 든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두 손을 꼭 움켜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진 것을 더 얻기 위해 두 손을 욕심 사납게 벌리고 있지는 않는가?
사람들의 마음을 생채기내는 긴 손톱을 달고 있지는 않는가?
손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무엇일까?
지치고 외로웠던 그 어느 해 겨울, 누군가의 손길처럼 마음을 녹여주는 따뜻한 손이고 싶다.
*사진출처 Marek Mosinski의 Szepczace Sciany(속삭이는 벽) 포스터사진(2013, Mo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