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계절, 겨울
언제부터였을까.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봤다.
내가 왜 겨울을 좋아하고 기다려 왔는지.
그리고 왜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자리했는지를.
어린 시절, 그러니까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던 청춘의 시절에는
어떤 계절을 좋아한다는 특별한 감정을 갖진 않았다.
봄이 되면 만물이 소생하고, 여름은 엄청 덥고, 가을엔 단풍 들고, 겨울엔 추웠지.
그런데 왜 유독 겨울을 기다려 왔는지 생각해 보면,
겨울이 되면 옷을 껴입거나 두꺼운 옷을 입을 수 있으니까.
나이가 들어 나잇살이 붙고 전체적으로 몸이 불어나면서 상관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내가 너무 날씬했다. 아니 삐쩍 말랐다고나 할까?
때문에 여름에 반팔 옷이나 얇은 옷, 목에서 가슴까지 파인 옷 등을 싫어했지,
나를 왜소하고 초라하게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나도 모르게 겨울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여름의 가벼운 차림보다 두꺼운 옷, 긴 코트에 목 폴라도 입고, 목도리와
여러 겹의 옷을 갖출 수 있으니 나의 빈약한 몸을 가려줄 수 있었고
그 옷이 주는 포근함은 내 마음까지 따듯하게 만들어 줬다.
겨울을 좋아한 다는 것은 결국 긴 밤과 함께 하니, 밤도 항상 내 맘속에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세상 경험과 현실을 살아가면서 나의 생각, 정서, 감정이
완전히 나의 것으로 갖춰져 가고 있었다.
나의 내면이 겉으론 화려하고 요란해도 속의 감정은 매우 감성적이고 정서적이라 할 수 있다.
가을의 쓸쓸하고 가슴에 구멍 뚫린 것처럼 외로움이 밀려오면서부터
더욱더 겨울의 황량함과 넓은 하늘이 그립고 사랑하게 되었나 보다.
진정 겨울을 좋아한다는 것은 옷 때문이 아니었다.
겨울은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정서가 하나둘씩 드러나며 표출되고 시작했다.
찬 공기 속에 움츠린 어깨와 깃을 올리고 외로이 걸어가는 중년 남성의 모습은
나에게 투영되는 거울이 되어 있었다.
도시의 가로수에 무성했던 잎들이 떨어지고
넓어진 하늘을 보면 그 위로 겨울의 잿빛 구름이 흘러간다.
눈에 보이는 겨울의 모습은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가 어디선가 들리면
젊은 시절 덕수궁 돌담길부터 광화문으로 한 없이 걷던 추억도 떠오른다.
영화 '쉘브루의 우산'속, 눈이 퍼붓는 주유소 앞에 사랑했던 남녀의 애틋한 만남,
'러브스토리'의 눈밭 로맨스가 떠올라..
내가 사랑했던 "유리 지바고",
영화 닥터지바고의 남자 주인공이다.
겨울만 되면 이 영화와 ost를 보고 듣고 그 속에 빠져 스스로 '유리 지바고'가 되어 버린다.
그 주인공의 감성이 곧 나의 감성처럼 다가왔다.
이런 감상적이고 서정적인 것들이 내 마음속엔 가득한 가 보다.
겨울의 밤은 길다.
세상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밤이 주는 묘한 기운은 나의 감정을 더욱 짙게 물들이고 쉬게 해 준다.
그래서 동짓날이 싫다.
다음날부터 밤이 조금씩 짧아지니 왜 그런지 슬프다는 감정이 엄습해 온다.
겨울은 추위 속에 나를 숨게 해 주고
긴 밤에 나를 들여다보게 해 준다.
계절은 나름대로의 맛과 멋과 사랑이 있다.
하지만 나에겐 보통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겨울에 대한 로망이 있다.
뭔가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던 새로운 기운이 스며들길 바라나 보다.
오늘도 나는 겨울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