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의 진짜 이름“
1. 교실 붕괴: 친구가 경쟁자가 되어버린 아이들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 교실은 이미 전쟁터다"
새벽 6시 30분,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18세 민준이(가명)는 눈을 뜬다. 어젯밤 학원 숙제를 하느라 새벽 2시에 잠들었으니 고작 4시간 남짓 잤다. 밥알이 모래알처럼 씹히지만 꾸역꾸역 삼킨다. 학교에 가서 잘 버텨야 하니까. 하지만 학교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민준이는 또 다른 가면을 쓴다. 어제 학원에서 받은 '킬러 문항' 족보를 가방 깊숙이 숨긴다. 짝꿍이 볼까 봐서다. "이거 어디서 났어?"라고 물어볼 때 "그냥 인터넷에서 찾았어"라고 둘러댈 멘트까지 준비했다. 민준이에게 짝꿍은 함께 도시락을 나눠 먹을 친구가 아니라, 내가 밟고 올라가야 할 '등급 컷'의 경쟁자일 뿐이다.
친구의 필기 노트를 훔치는 아이들
이것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2024년 대한민국 교실의 적나라한 민낯이다. 과거 우리네 교실을 떠올려보자. 시험 기간이 되면 필기 잘하는 친구의 노트를 복사하려 줄을 섰고, 서로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주며 "다 같이 잘 보자"라고 외쳤다. 하지만 지금의 교실에서 이런 풍경은 멸종했다.
실제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시험 직전, 전교 1등 학생의 사물함에서 노트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CCTV를 확인해 보니 범인은 가장 친했던 친구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얘가 1등급을 받으면 내가 2등급으로 밀려나니까." 상대평가라는 잔인한 시스템은 아이들의 도덕성마저 마비시켰다. 내가 1등급(4%) 안에 들기 위해서는 내 친구가 반드시 5% 밖으로 밀려나야 한다. 즉, 타인의 실패가 나의 성공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된 것이다.
2025년 학원가의 풍경: 대화가 금지된 감옥과 계급사회
학교가 전쟁터라면, 방과 후 학원가는 감옥이자 또 다른 계급 사회다. 최근 대치동과 목동의 학원가에는 기이한 풍경이 일상화되었다.
첫째, 이른바 '텐투텐(Ten to Ten) 감옥'이다. 방학이나 주말이면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학생들을 가둬두고 공부시키는 관리형 독서실이나 학원이 성업 중이다. 이곳의 핵심 규칙은 '친목 금지'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거나 점심을 같이 먹으면 벌점을 받고 퇴원 조치된다. "친구 사귈 시간에 단어 하나 더 외우라"는 것이 학원의 홍보 문구다. 아이들은 바로 옆자리에 친구가 있어도 눈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칸막이 속에 갇혀 경쟁자들과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른다. 친구는 공부에 방해되는 '불순물' 취급을 받는다.
둘째, '레벨 테스트'가 만든 신(新) 카스트 제도다. 유명 대형 학원들은 입학시험 성적에 따라 아이들을 S반, A반, B반 등으로 철저히 나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어느 학원의 무슨 반에 다니느냐가 곧 자신의 신분이 된다. A반 아이는 B반 아이와 말을 섞지 않는다. "너는 B반이잖아"라는 말 한마디가 아이들의 자존감을 난도질한다. 심지어 같은 학교 친구라도 다니는 학원 레벨이 다르면 하교 후에 어울릴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다. 어른들이 만든 서열화가 아이들의 우정마저 등급으로 나누어 버렸다.
통계가 비명 지르는 교실: 잠들거나, 죽거나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삶을 수치로 들여다보면, 이것은 교육이 아니라 '아동 학대'에 가깝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13~18세)의 평일 평균 수면 시간은 5.6시간에 불과하다. 미국 수면재단이 권장하는 8~10시간에 턱없이 모자란다. 성장기 아이들을 잠 안 재우고 돌리는 나라는 전쟁 중인 국가를 제외하면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이들이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이 학교가 아닌 '학원'이라는 점이다. 2023년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약 27조 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은 대치동으로, 목동으로, 중계동으로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거리는 가방 멘 아이들로 북적이고, 편의점은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학생들로 만원이다.
이 살인적인 스케줄의 결과는 무엇인가? 바로 '교실의 수면실화'다. 고등학교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가 보라. 수업 시간에 깨어 있는 학생은 반에서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책상에 엎드려 잔다. 선생님도 굳이 깨우지 않는다. 어차피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학교는 낮에 잠을 보충하는 곳이고, 진짜 공부는 밤에 학원에서 한다. 공교육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교실은 붕괴했다.
놀이터를 잃어버린 초등학생들: 뺑뺑이의 비극
경쟁의 불길은 이제 고등학생을 넘어 초등학생, 아니 유치원생까지 집어삼켰다. 놀이터에서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이 '학원 뺑뺑이'라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지훈이(가명)의 하루를 보자. 오후 1시에 학교가 끝나면 교문 앞에는 노란 학원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다. 지훈이는 엄마를 볼 새도 없이 '태권도 학원' 차에 오른다. 태권도가 끝나면 땀을 닦을 새도 없이 '피아노 학원'으로 이동한다. 감성이 목적이 아니다.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한 '보육용' 스케줄이다. 피아노가 끝나면 곧바로 '수학 학원'과 '영어 학원'이 이어진다. 이동하는 차 안이나 편의점 구석에서 먹는 삼각김밥이 지훈이의 저녁이다. "엄마, 나 언제 놀아?"라고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주말에" 뿐이다. 하지만 주말에는 '창의력 수학'과 '논술'이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사례인 5학년 수아(가명)는 이른바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족)'이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무거운 가방을 메고 영어 학원으로 향한다. 3시간의 수업이 끝나면 저녁 6시. 집에 갈 수 없다. 바로 옆 건물 수학 학원이 7시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1시간의 틈새에 수아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차 뒷좌석에서 허겁지겁 먹거나, 편의점 컵라면으로 배를 채운다.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수다 떨 시간 따위는 없다. "지금 1분을 아껴야 특목고에 간다"는 부모의 성화에, 12살 아이는 벌써부터 '시간 강박'과 '소화 불량'을 달고 산다.
의대 열풍: 광기가 된 경쟁의 정점
최근 불고 있는 '초등 의대 반' 열풍은 이 경쟁이 얼마나 기형적으로 변질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초등학교 4, 5학년 아이들이 미적분을 푼다. 의사가 되어야만 이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부모들의 공포가 투영된 결과다.
서울 대치동의 한 학원 설명회에서 강사는 마이크를 잡고 외친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늦습니다. 옆집 아이는 벌써 고등학교 수학을 끝냈습니다." 부모들의 눈에는 불안이 가득 차오른다. 그 불안을 먹고 사교육 시장은 비대해지고, 아이들의 동심은 말라비틀어진다.
아이가 "엄마, 나 과학자가 되고 싶어"라고 말하면, 엄마는 "과학자 되면 굶어 죽어. 의대 가서 피부과 의사 해"라고 싹을 자른다. 꿈조차 '성적순'으로 재단되고 '연봉'으로 환산된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된 사회에서, 아이들의 다양한 잠재력과 꿈은 '비효율적인 짓'으로 취급받는다.
우리는 괴물을 기르고 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옆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오로지 점수와 등수로만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도록 12년을 훈련받은 아이들. 그들에게 '공감', '협력', '양보'를 기대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명문대생들이 모인 익명 커뮤니티에 청소 노동자들의 시위를 비난하며 "공부 안 해서 저렇게 사는 것"이라는 조롱 글이 올라와 사회적 공분을 샀다. 이것은 일부의 일탈이 아니다. 우리가 만든 경쟁 시스템이 배출한 '괴물'들의 예고편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이 쟁취한 성과만이 정의라고 믿는 엘리트 소시오패스들. 경쟁은 아이들에게서 '인간성'을 거세하고 있다.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지금 교실이 붕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래가 붕괴하고 있다는 경고다. 친구가 경쟁자가 되어버린 아이들에게 "행복해라"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사랑하라"라고 가르치는 것은 위선이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 아이들을 좁은 트랙 위에 몰아넣고, 채찍질하며 "달려라, 멈추면 죽는다"라고 협박한 어른들과 이 병든 시스템이 유죄다. 1등을 하지 않아도, 의사가 되지 않아도, 너 자체로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한, 우리의 교실은 영원히 지옥일 것이다.
이제 인정하자. 우리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투견장의 투견처럼 기르고 있다. 이 잔혹한 경쟁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비극적 사고의 다음 차례는 내 아이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당신의 아이는 교실이라는 전쟁터에서 피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