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는 사람은 직장에서 거의 30년을 보냈다. 직장인은 이 기간 상사나 끊임없이 동료가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뭔가를 해야 했다. 이럴 때 ‘자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 능력을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습관은 퇴직 후에도 그대로 몸에 남게 된다. 가족이 식사하면서 대화할 때 퇴직자인 부모는 ‘부모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교육을 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좋은 말(?)을 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보모가 좋을 말을 하는 순간 자녀들은 ‘역시 부모는 꼰대’라는 낙인을 찍으면서 귀를 닫을 수 있다. 필자도 아이들에게 수시로 지적을 받곤 한다.
사람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아무리 부모라도 수시로 잔소리하거나 자신이 관심이 없는 내용에 대해 말하면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듣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듣지 않고 딴짓을 하게 된다. 부모가 아이의 이런 태도를 보면서 또다시 지적하면 그날 저녁 식사 시간은 냉기가 흐르게 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가정 밖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어떤 모임에서 모인 사람들이 대화를 시작하면 그 대화에 끼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만약 그 주제에 관한 지식이 충분한 상태로 대화를 하면 다른 사람들도 환영하지만, 대화에 끼고 싶거나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 억지로 아는 척을 하는 순간 분위기는 갑자기 싸늘해진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그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은 아는 척하는 사람을 꺼리거나 경멸하게 된다. 왕따가 되는 것이다. 억지로 대화에 끼어드는 행동을 보면서 가족이야 어느 정도 이해를 하지만, 가족이 아닌 사람은 가족만큼 포용력이 없기 때문에 모임 참석을 금지하기도 한다. 물론 대화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 대화에 끼어들 때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의견이나 지식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서 그 모임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나 지식을 공유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그대로 따라 하거나 억지에 가까운 논리로 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의도를 왜곡하게 된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심 때문에 억지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주목받고 싶다거나 스스로 다른 사람을 경쟁 대상으로 삼으면 경쟁심 때문에 억지로 대화에 끼어들면서 대화 분위기를 해치기도 한다. 이 사람은 이렇게 할수록 자신이 원래 얻고자 했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진다.
직장인이 직장생활 동안 하지 않는 대화 습관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이나 지식을 내세우지 않고 다른 상사나 동료의 말을 듣기만 하면 경쟁에서 지는 것처럼 인식하기 때문에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선택한다. 이런 습관이 퇴직 후에도 그대로 남아 대화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퇴직 후의 삶이 직장생활과 다른 이유는 ‘경쟁’이 없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동호회와 같은 모임에서 대화할 때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더라도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이 더 많다.
식사하면서 부모가 자녀의 말을 잘 들어주면 식사 분위기는 화목하게 유지된다. 만약 자녀가 말을 할 때 부모가 자녀의 말을 잘 들어주면 자녀는 더는 ‘이 말을 하면 부모가 화를 내지 않을까?’라는 자기 검열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편안한 분위기에서 다양한 주제로 말을 꺼낸다. 이럴 때 부모는 그저 들어주면서 모르는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한다면 자녀는 ‘내가 부모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을 알려준다’라고 생각하면서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 항상 부모로부터 가르침을 받던 사람이 부모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퇴직자의 존재 가치는 ‘사람 그 자체’이다. 말을 많이 한다고 인격이 높아질 가능성보다는 말을 많이 할 때 실수할 가능성이나 잘못된 정보를 말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존재 가치 자체를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퇴직자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무슨 내용이든 말해야 한다’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지식을 경청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가꿀 필요가 있다. 이런 태도를 계속 취하게 되면 함께 하는 사람들은 말하지 않더라고 그 모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상당히 오랜 기간 듣는 연습을 했다. 틈날 때마다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후배들과 1시간 정도 대화하면서 필자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들어주기만 했다. 후배들은 이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던지 필자가 요청하지 않아도 후배가 먼저 면담 요청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온전히 들어주는 것은 상대를 위해 내 시간과 에너지를 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상대에게는 아주 큰 선물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모임에 참석하는 거의 모든 사람은 들어주기보다는 말하는 선택을 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경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가족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연습을 한다면 엄청나게 큰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