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 중에는 자신의 건강이 오랫동안 유지될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의 건강수명과 평균 수명 사이에는 약 10년 이상의 차이가 있다. 즉, 건강이 나빠지더라도 평균 10여 년 이상을 더 산다는 것이다. 이럴 때 자신의 옆에 누가 남아 자신을 간호하는지를 예상하고, 그 사람과 최상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직장인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자신의 역할을 망각할 때다. 직장인이 근무 시간에 일에 집중하지 않고 투자나 쇼핑에 에너지를 뺏기는 부서원이 많아질수록 그 부서 혹은 그 회사는 경쟁사와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이처럼 자기 역할을 잊는 사람이 많은 조직일수록 경쟁력을 잃을 가능성이 커지면서 망하는 시기도 빨라지는 것이다.
가장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도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던 초기 가족들과 갈등이 있었다. 퇴직 후에는 대기업에 다닐 때처럼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는 대신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게 되면서 업무보다는 집안일이나 아이들 돌보는 데 회사에 다닐 때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하지만 퇴직 초기에는 이런 역할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 가족들과 역할 분담으로 인한 충돌도 많이 했었다.
가장이 집안일이나 아이들에게 소홀하면 어쩔 수 없이 누군가는 가장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가장이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배우자와 가족은 가장이 없는 생활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누군가는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므로 가장이 아버지라면 배우자 혹은 장남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필자도 그랬지만, 많은 직장인은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면 일단 부담감이 줄어들기 때문에 일단은 좋아한다. 저녁에 동료들과 술 약속도 언제든지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집안일에서도 자유롭기 때문에 주말에는 취미생활 등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남편인 가장은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
일시적인 편안함은 영원한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가장은 집에 오더라도 가사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에 부인이 집안일을 하는 동안 휴식을 취한다. 남편의 이런 모습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지만, 아이들이 대학 수능시험을 보는 날까지 참다 수능이 끝나는 날 헤어지자고 요구한다. 이혼하는 부부 중 다섯 쌍 가운데 한 쌍 정도가 20년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한 부부라는 통계청 자료처럼 부부 중 한 사람이라도 힘들고 지치면 결혼생활 유지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불행한 상황을 막기 위해 배우자와의 관계 혹은 자녀와의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을 치우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퇴직자 중에는 ‘퇴직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이 나를 반겨줄 것이다’라고 근거 없는 믿음을 갖는 사람이 있다.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야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있다’라는 명분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가정에 소홀히 하더라도 가족으로부터 어느 정도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특별 대우(?)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사라지게 된다.
가족은 퇴직자가 직장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던 사람인지에 관한 관심보다는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만약 퇴직자가 퇴직 후에도 직장에서처럼 행동하면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가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내면 가족들은 가장이 없어도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채 지내게 된다. 문제가 일어나는 시기는 가장이 퇴직한 이후다. 오랫동안 가정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가장이 가정으로 돌아오면 가족들은 긴장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팀장 없이 오랫동안 자유롭게 근무하던 조직원에게 갑자기 팀장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퇴직자가 퇴직 후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족이 가장을 불편하게 느끼는 순간 가장과 그 나머지 가족으로 편이 갈라진다. 편이 갈라진다는 의미는 가장과 나머지 가족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가장이 가족을 대할 때 불편함이나 긴장감을 느끼면 ‘가족들이 나를 불편하게 느끼는구나’라고 인식하면서 가족과 화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과 가족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갈등도 깊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퇴직자가 가족들과 새롭게 역할을 정하면서 갈등의 싹을 자르기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과의 불편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
새로 온 팀장이 팀원들을 돌봐주고 팀원들의 애로사항을 잘 들어주는 등 팀원 친화적인 사람이라면 그마다 다행이지만, 권위적이고 잔소리 대마왕이라면 팀원들은 팀장이 없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가장이 퇴직하더라도 배우자와 자녀에게 친근하고 배려한다면 가족들로 가장을 환영하겠지만, 평소처럼 가정과 가족에게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가족 또한 가장을 멀리하게 된다. 결국, 가장의 퇴직 전 언행이 퇴직 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남편은 배우자인 아내와 이혼하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건강할 때는 혼자서도 견딜 수 있다. 외로우면 친구도 만날 수 있고, 동호회나 커뮤니티 등에서 사람을 만나면 어느 정도 외로움을 견딜 수 있다. 문제는 건강수명을 지났을 때이다. 아프면 친구를 만날 수도 없고, 동호회에서 취미활동을 할 수도 없다. 자녀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자녀들 또한 자신들의 일로 바쁘고, 아빠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자녀들도 아빠를 외면하면서 더욱 괴로운 미래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다. 직장인이 직장에서 노력한 만큼 승진이나 연봉에서 보상을 받는 것처럼 가정 또한 돌보는 만큼 가족 사이의 화목이라는 보상을 받게 된다. 즉, 가장이 가족을 사랑하고 보살필 때마다 가족으로부터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쿠폰’을 받게 된다. 이런 쿠폰이 많을수록 퇴직 후의 삶이 즐겁고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가족을 돌보는 것이다. 가장이 가정에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 가족의 행복과 안정에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이 퇴직 준비의 시작이자 끝이다.
첨부 자료는 가족의 기능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