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재직할 때 경영감사팀에서 몇 년 동안 감사업무를 담당했다. 업무 점검 감사를 나가면 감사 대상 지점의 담당자는 몇 년 치 회계전표를 담당 감사인에게 제출한다. 감사인은 이 전표를 살피면서 부정은 없는지, 경비는 적절하게 사용하는지를 확인한다. 같은 팀에 있던 감사팀 선배가 “처음 영수증을 보면 문제투성이처럼 보이지만, 지점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확인하면 대부분 정상 지출이다. 회사 규정에는 없더라도 회사 업무 목적의 경비라면 어느 정도 허용할 필요가 있다.”라는 조언에 따라 정말 문제가 있어 보이는 영수증만 확인을 위해 표시를 했다. 이후 담당 지점장을 불러 영수증 확인을 하기 전 “경비는 어떻게 사용하느냐?”라고 먼저 물은 다음 조사해 둔 영수증을 보면서 지점장이 했던 운영 방식과 일치하는지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영수증은 업무 규정에 벗어나는 영수증도 있었지만, 영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했다는 것이 확인되면 구두 경고로 끝내곤 했다.
반면, 후배의 경우는 필자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업무를 했다. 이 감사인은 담당한 지점의 거의 모든 영수증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체크했다. 이후 지점장을 불러 ‘네 죄는 네가 알렸다’라는 식으로 지점장을 혼내는 통에 수시로 감사인과 지점장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는 등 갈등이 너무 심해 1년 후 다른 부서로 쫓겨났고, 그 부서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채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 사람과 기존 감사인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의 영수증은 정상적으로 처리되었고, 극히 일부 처리가 잘 못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반면, 쫓겨난 감사인은 ‘거의 모든 영수증 처리는 문제가 있다’라고 접근했기 때문에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여러 선배가 이 후배에게 업무 접근방식을 바꾸라고 조언을 했지만, 다른 사람의 조언을 무시하고 본인 방식대로 했다가 회사 생활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처럼 직장인이 직장 생활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사물을 보는 방식이 정해지게 된다.
신입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열심히 생산적인 활동을 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상품에 관심이 있는 신입사원은 신제품 기획서를 작성한 다음 ‘이 정도면 부장님도 만족하실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상사한테 보고를 시작한다. 보고를 받는 상사는 그때부터 빨간 플러스 펜으로 보고서에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은 상사의 예상하지 못한 지적에 대해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상사의 질문에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면서 보고서는 만신창이가 된 채 보고는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부하의 보고를 받는 태도에 따라 상사를 두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다. 리더십이 있는 상사는 부하의 보고를 끝까지 들으면서 “보고서 작정하느라 수고했어”라고 격려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사는 “이런 쓸데없는 보고로 내 시간을 뺏지 마”라고 경고를 하면서 부하의 의욕을 완전히 꺾어버리기도 한다. 두 사람의 태도의 차이는 퇴직 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둔다. 예를 들어, ‘매출 향상 방안’이라는 제목으로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먼저 자기 나름의 아이디어를 정하고, 그 아이디어를 실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를 강조하게 된다. 반면, 상사는 부하가 작성한 보고서를 볼 때 집중하는 내용은 보고서의 허점이다. 상사의 주요 역할이 ‘리스크 관리’이기 때문에 부하의 보고서대로 실행했을 때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보완하지 않으면 회사의 경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의 회사 수명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승진할수록 긍정적인 결과를 강조하는 부하의 관점과는 달리 부정적인 영향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리스크 관리를 위한 부족함 혹은 문제점 확인 중심의 업무 처리 방식은 퇴직 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퇴직자가 직장생활을 할 때에는 배우자나 아이들의 사는 모습에 관심을 두지 못했지만, 퇴직 후에는 남는 게 시간이다 보니 배우자의 살림하는 방식이나 자녀의 태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직장에서 하던 ‘지적질 습관’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본능적으로 배우자와 자녀의 행동에서 문제를 찾아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직장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겠지만, 직급이 올라갈수록 정제되지 않은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퇴직자는 집안에서의 서열이 제일 높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말을 조심해야 한다’라는 개념이 없을 수 있다. 배우자나 자녀는 퇴직자로부터 예상하지 못한 지적을 받으면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불편한 감정을 먼저 느끼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된다. 이럴 때 지적을 받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퇴직자를 보면서 ‘반격 거리’를 찾게 된다.
퇴직자가 집에서 완벽한 사람이라면 가족들은 퇴직자의 지적을 그대로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런 사람보다는 가족보다 더 지적 거리가 많을 수 있는 것이다. 이건 마치 전교 꼴찌가 전교 수석한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적하는 사람은 피하고 칭찬하는 사람과는 가깝게 지내려는 본능이 있다. 퇴직자가 가족의 행동을 보면서 지적 거리를 찾을수록 가족과는 심리적으로 멀어지게 된다. 물론 가장으로서 가족의 행동에 문제가 보이면 지적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것이 삶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면 스스로 솔선해 지적 거리를 해결하거나 해소할 수 있다면 퇴직자의 지적은 가족의 불만을 높이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거실에 휴지가 있다면 잔소리하기보다 휴지를 주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가족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휴지를 버린 사람을 미안하게 만드는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만약 배우자가 설거지를 미룬다면 대신하고, 세탁기를 돌리지 않았다면 돌려준다면 가족은 훨씬 감동할 것이다.
퇴직자는 퇴직하는 순간 새로운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태도가 새로운 삶에 적합한지 살피고, 새로운 삶에 적합하도록 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여전히 가족에게 잔소리를 하게 되고, 이것이 가족과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