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
한강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소년이 온다>에 대해 "소설을 쓰는 동안 거의 매일 울었다"라고 밝혔습니다.
한 작가는 어떻게 고통과 슬픔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요?
김길자 여사는 '재학이가 폭도'라는 말을 듣고 다시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광주를 찾은 시민들은 부채감을 이유로 들었고요. 한 작가가 투영된 소설 속 저자는 주인공 동호 형의 이야기를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평론>
《아픔의 역사, "소년이 온다"와 슬픈 주인공을 추모하며》
<눈물로 쓴 기록의 문학>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
집필 당시 “거의 매일 울었다”라고 한 고백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의 발로가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역사적 진실을 감당하며 스스로를 기록의 매개체로 내어준 행위였다. 문학은 때때로 냉철한 지성의 산물이 아니라, 뜨거운 눈물의 산물이다.
특히 국가 폭력이 한 세대를 꿰뚫고 지나간 한국 현대사의 현실 앞에서, 글쓰기는 곧 애도의 행위이자 기록의 사명으로 변한다. 한강의 눈물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눈물과 포개어져 문학이라는 매체를 통해 집단적 울음으로 확장된다.
<슬픔을 견디는 방식>
작가는 단순히 슬픔을 묘사하지 않았다.
그는 ‘견디는 방식’으로서 글쓰기를 택했다. 작가가 쏟아낸 눈물은 회피가 아닌 직면의 결과였다.
이는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 앞에서의 책임’을 연상시킨다. 동호와 같은 이름 없는 희생자의 얼굴을 직시하는 일, 그 앞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기록하는 일이 곧 인간적 책임이었다. 슬픔은 감정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실천으로 변환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한강의 글쓰기는 바로 그 실천의 증거다.
<소년 동호의 죽음>
소년 동호는 단순히 소설 속 인물이 아니다. 그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무명인으로 사라진 어린 희생자의 화신이다.
열다섯의 나이, 아직 꿈을 펼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한 그는 역사의 거대한 비극을 상징한다.
소설은 그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잊히지 않게 만든다. 만약 문학이 없다면 동호는 영영 기록되지 못한 이름 없는 망령으로 남았을 것이다.
한강은 소년을 불러내어, 역사 속 무수한 ‘동호들’을 함께 기린다.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집단적 억울함을 집약한 사건이 된다.
<김길자 여사의 증언>
김길자 여사가 “재학이가 폭도”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는 증언은, 진실이 짓밟히는 순간에 인간이 겪는 이중의 고통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 위에, 왜곡된 언어가 더해진다면 그것은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일과 같다. 여기서 문학의 임무는 단순히 슬픔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모독을 바로잡는 데 있다. 잘못된 언어는 기억을 왜곡하지만, 문학적 언어는 그것을 복원한다.
한강은 김길자의 목소리를 소설 속에 실음으로써 진실의 편에 선다.
<광주 시민들의 부채감>
광주를 찾은 수많은 이들이 “우리는 빚을 졌다”는 부채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 부채감은 단순한 감정적 죄책감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적 윤리의 자각이다.
우리는 모두 그 희생 위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강의 소설은 그 부채를 되새기게 한다. 독자는 책을 덮으며 자신이 어떤 빚을 지고 있는지 묻게 된다. 이 부채는 갚을 수 없는 것이지만, 기억과 연대로 갚아 나가야 하는 의무다.
<동호 형의 부탁>
소설 속에서 동호의 형은 간절히 말한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모독하지 않도록.” 이 대사는 단순한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잘못 기록된 역사, 왜곡된 언어, 침묵 속의 망각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따라서 제대로 쓰는 일은 곧 정의의 실천이다.
이 부탁은 문학 전체에 던져진 과제이며, 작가의 손끝을 통해 시대의 책무로 확장된다.
<한강의 응답>
한강은 이 부탁에 진심으로 응답했다. 『소년이 온다』는 단순한 허구적 창작물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만든 기록의 책이다. 작가는 개인의 상상력을 넘어, 공동체적 애도의 장을 마련했다.
이 책은 문학이 어떻게 윤리적 실천의 무대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작가의 응답은 한 편의 소설이자, 집단적 추모의식이다.
<소설 속 영혼들의 울음>
작품 곳곳에 죽은 자들의 울음이 깔려 있다. 고문당한 이들, 총탄에 스러진 이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가 중첩된다.
이 울음은 단순한 비극적 배경이 아니라, 독자를 감싸는 체험적 언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단순히 이야기 속 인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울음에 휩싸여 함께 운다. 문학은 그렇게 집단적 슬픔을 체험하게 만드는 공간이 된다.
<역사적 트라우마의 문학>
광주의 비극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도 이어지는 상처이며,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다. "소년이 온다"는 이 트라우마를 회피하지 않고 직시한다. 문학이란 결국 트라우마를 언어화하는 작업이다.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처럼, 폭력은 일상 속에서 반복된다. 따라서 문학은 잊힐 뻔한 트라우마를 새겨 넣어, 우리가 다시는 같은 폭력을 허용하지 않도록 경고한다.
<죽은 자를 위한 문학의 제의>
동호의 죽음은 소설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의 짧은 생애는 독자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문학은 그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불러내는 제의다. 독자가 책장을 넘기는 행위는 곧 제의적 헌화와 같다. 우리는 페이지마다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을 망각 속에서 구출한다. 『소년이 온다』는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 장례식이며, 매 독자가 참여하는 제의의 공간이다.
<한강의 글쓰기가 던지는 질문>
소설은 끊임없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 죽음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역사는 왜곡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의 침묵은 또 다른 폭력을 낳지 않는가?” 이 질문들은 단순히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향한 도전이다. 문학은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질문을 남김으로써, 우리 스스로의 응답을 요구한다.
<소년을 위한 추모의 언어>
이 평론은 소설 속 동호를 비롯한 모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작은 촛불이다.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소년들에게 우리는 언어로 헌화한다.
문학은 이들에게 무덤 대신 언어의 집을 마련해 줘야 한다.
그 집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들을 부르고, 잊히지 않게 할 것이다.
추모의 언어는 과거의 희생자에게 바쳐지지만, 동시에 오늘의 우리 자신에게 다짐이 된다.
<오늘의 독자에게>
"소년이 온다"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애도이며, 현재 우리에게 던져진 윤리적 과제다.
오늘의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해 소년의 죽음을 추모하고, 동시에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약속해야 한다.
문학은 여기서 살아남은 자들의 책임을 일깨우는 거울이 된다.
소년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거운 유산이자, 동시에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윤리적 부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