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정순영 시인---가을 나들이》

박성진 시인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



가을 나들이


정순영 시인


어이, 참 좋다.

초록이 저도 모르게 나이 들어

붉거나 노랗게

흠뿍, 구수한 내음을 내뿜는 계절


젊은것들이 겉늙어서

흥에 취해

술에 취해

정에 취해

어디 한번 사람 같은 날들


그러나 산사 오르는 외길

단풍 지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면

애틋한 사랑의 심전에서

울컥 솟아나는 울음


울음까지 화려하게 물드는

가을 정취에 젖어

어이, 참 좋다.

어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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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감탄사의 본질과 시적 울림>


“어이, 참 좋다.”는 짧지만 깊은 울림을 가진다. 이 표현은 단순한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맞닿는 자리에서 솟아나는 원초적 언어다.

언어가 이성적 판단과 논리를 초월해 감각적 충만과 경외심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정순영 시인은 계절의 풍요를 보고 머리로 설명하지 않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감탄사로 정리한다.

반복된 감탄은 삶 전체를 긍정하는 선언으로 확장되며, 시 전편을 관통하는 리듬이 된다. 이는 한국 서정시가 지닌 고유의 ‘직설적 감정’과 ‘간결한 울림’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초록의 변모와 시간의 철학>


“초록이 저도 모르게 나이 들어”는 계절의 변화이자 인간 존재의 상징이다. 초록은 청춘, 시작, 생명력의 색이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라는 표현은 시간이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흘러간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젊음을 자각할 겨를도 없이 늙어가며, 어느 순간 이미 다른 빛깔을 띠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시인은 자연의 변화를 빌려 인간 존재의 시간적 유한성을 드러내며, 삶이 곧 시간의 지배를 받는 과정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붉음과 노랑의 이중적 의미>


붉음과 노랑은 단순한 가을의 색이 아니라, 인간 삶의 양극을 상징한다.

붉음은 아직 남아 있는 열정과 마지막 불꽃, 노랑은 서서히 시드는 빛과 퇴색이다. 두 색이 공존하는 가을은 곧 인간 생애의 황혼을 닮았다.

시인은 색채의 언어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동시에, 인간 존재의 노화와 죽음을 직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색들은 화려하다. 죽음 앞에서도 빛나는 존엄, 그것이 정순영이 발견한 가을의 진리다.


<구수한 내음, 삶의 체취>


“흠뿍, 구수한 내음을 내뿜는 계절”에서 시인은 후각을 불러낸다.

가을은 시각적 계절이지만, 시인은 냄새를 통해 더 깊은 정서를 자극한다. 구수함은 단순한 향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곡식 익는 냄새, 흙과 낙엽 타는 냄새, 오래된 기억과 고향의 체취를 불러낸다.

시인은 가을의 향기를 통해 인간 삶의 본질, 성숙한 삶의 맛을 전한다.


<젊음의 허세와 사회 풍자>


“젊은것들이 겉늙어서”라는 구절은 시대를 초월한 풍자다. 청춘은 본래 희망과 가능성의 상징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 속의 젊음은 외적으로는 활기차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늙어 있다.

이는 허세와 공허에 빠진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정순영은 청춘이 진정한 성숙을 외면하고 피상적 쾌락에 몰두하는 모습을 드러내며, 인간 사회의 병리를 짚는다.


<도취의 세 겹 구조>


“흥에 취해, 술에 취해, 정에 취해”라는 반복은 청춘의 도취 상태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흥은 순간적 들뜸, 술은 의식의 마비, 정은 인간관계의 집착이다.

모두 삶을 본질적으로 채우지 못하는 피상적 만족이다. 시인은 이러한 세 겹의 도취를 통해 인간이 삶의 근원적 진실을 망각하는 과정을 비판한다.

반복의 운율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치 취기가 점점 깊어지는 듯한 착각을 주며, 청춘의 공허함을 실감 나게 한다.


<사람 같은 날들의 부재>


“어디 한번 사람 같은 날들”이라는 표현은 역설과 비판을 동시에 담고 있다.

사람다움이 당연히 존재해야 하지만, 오히려 찾기 어려운 현실을 드러낸다. 이는 현대 사회의 인간 상실을 드러내는 탄식이다. 정순영은 진정한 사람다움이 무엇인지를 묻고, 인간의 본질적 가치 회복을 요구한다.


<산사와 외길의 상징성>


“산사 오르는 외길”은 한국적 상징이다.

산사는 불교적 고요와 성찰의 장소이고, 외길은 인생의 길이다.

누구도 대신 걸을 수 없는 길, 오직 자신만이 걸어야 하는 길이다. 시인은 산사의 외길에서 인생의 숙명과 수행적 의미를 발견한다. 가을의 고요 속에서 내면을 돌아보는 장면은 한국 서정시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철학적 깊이를 더한다.


<낙엽의 철학>


“단풍 지쳐 떨어진 낙엽”은 죽음과 피로, 동시에 숭고와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낙엽은 생명을 다해 떨어지지만, 가장 아름다울 때 땅으로 내려앉는다. 시인은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의 마지막도 결코 허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삶의 완성을 담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낙엽은 죽음의 이미지이자, 마지막 아름다움의 증거다.


<심전과 울음의 본질>


“애틋한 사랑의 심전에서 / 울컥 솟아나는 울음”은 시의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대목이다.

심전은 심장의 떨림, 마음의 전류를 의미한다.

사랑의 심전은 인간이 지닌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감정이다.

가을은 그 심전을 건드려 울음을 터뜨리게 한다.

이 울음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사랑과 그리움, 회한과 희망이 뒤섞인 복합적 감정이다.


<울음의 미학적 전환>


“울음까지 화려하게 물드는”이라는 표현은 탁월한 역설이다.

울음은 보통 어둡고 무거운 감정의 표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울음을 화려한 빛으로 물들이며, 슬픔을 미학으로 바꾼다. 가을은 인간의 눈물마저도 아름답게 수용하는 계절로 형상화된다.

이는 고통조차 긍정하려는 시인의 태도와 맞닿는다.


<반복과 순환의 구조>


마지막 연의 반복 “어이, 참 좋다. / 어이, 참 좋다”는 시의 구조적 완결성을 만든다. 시작과 끝이 동일한 구절로 닫히면서, 시는 순환 구조를 이룬다.

이는 계절의 반복, 삶의 윤회, 감정의 귀결을 모두 함축한다. 감탄사의 반복은 삶을 긍정하는 철학적 순환의 리듬이다.


<오감의 시학>


정순영 시는 오감을 고르게 활용한다.

붉음과 노랑(시각), 구수한 내음(후각), 낙엽 밟는 소리(청각), 발밑의 촉감(촉각)이 교차한다.

이 감각적 총체성은 독자를 시 속으로 끌어들여, 가을을 직접 체험하게 한다.

이는 단순한 묘사를 넘어, 가을 자체를 살아 있는 체험의 장으로 변환하는 시학이다.


< 전통과 현대의 결합>


산사, 낙엽, 울음은 전통 한국 서정의 핵심 이미지다. 정순영은 이를 현대적 감각과 사회적 비판, 철학적 성찰과 결합시켰다.

그 결과 그의 시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교차점에 서 있다.


<사회 비판과 서정의 긴장>


겉늙은 청춘과 도취된 세태에 대한 비판은, 순수 서정의 흐름 속에 놓이면서 긴장을 만들어낸다. 서정시가 사회 비판을 품기 어렵다는 통념을 깨뜨린다. 정순영은 서정의 언어로 사회적 문제를 노래하며,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 존재론적 귀결>


시 전체는 늙음, 허무, 울음, 소멸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론은 “어이, 참 좋다.”다.

이는 삶의 비극을 수용하면서도 긍정하는 태도다. 결국 인간은 시간에 종속되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삶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문학사적 의의>


「가을 나들이」는 단순한 계절시가 아니다. 전통과 현대, 서정과 사회 비판, 감각과 철학을 아우르는 작품이다. 정순영은 한국 서정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으며, 그의 시는 한국 현대 서정시의 성숙한 단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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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영 시인 프로필>


정순영 시인은 1974년 시전문지 《풀과 별》을 통해 문단에 추천되며 등단하였다.

이후 시집 《사랑》을 비롯해 15권 이상의 시집을 펴내며 꾸준히 창작 활동을 이어왔다. 국제펜한국본부 부이사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문학의 국제 교류에 기여했고, 세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한국시학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 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졌다.


정순영 시인의 시는 한국적 서정의 뿌리를 지키면서도, 사회적 비판과 철학적 성찰을 결합한다. 「가을 나들이」는 정순영 시인의 대표적 성과로, 가을의 풍경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정순영의 문학은 슬픔과 늙음, 허무조차 긍정으로 전환하며, 삶을 끝내 사랑하는 시적 태도로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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