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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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안광석 시인
진군 나팔소리에
뜨겁던 백사장도 식는다
국화 첨병 세우고
코스모스가 지휘한다
귀뚜루루 악기 소리에
나뭇잎도 춤을 춘다
가을은
이미 산천에 비단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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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질서를 지휘하는 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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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느끼는’ 시에서 ‘읽는’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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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는 가을을 감상적으로 노래하지 않는다. 이 시에서 가을은 정서가 아니라 질서이며, 감정이 아니라 구조다.
시인은 계절을 바라보는 대신, 계절이 움직이는 원리를 조용히 드러낸다. 그 절제된 태도에서 시의 격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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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 나팔’과 식어가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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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의 “진군 나팔소리”는 가을 시로서는 이례적인 출발이다. 그러나 이 나팔은 전투를 알리는 소리가 아니라, 열기를 거두는 신호다. “뜨겁던 백사장도 식는다”는 구절에서 계절은 파괴하지 않고, 질서를 회복한다. 가을은 소란을 끝내는 힘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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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첨병’의 시적 정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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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첨병 세우고”라는 구절은 이 시의 중심축이다. ‘첨병’은 계절의 선두에 서는 존재로서, 가을의 도래를 가장 먼저 알리는 상징이다. 국화는 장식이 아니라 선도자로 배치되며, 이는 시인이 자연을 관조하는 수준을 넘어 자연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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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와 귀뚜라미의 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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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가 앞을 열면, 코스모스는 ‘지휘’한다. 그리고 귀뚜라미는 ‘소리’로 응답한다. 이 삼중 구조 속에서 자연은 명령하지 않고 조율한다. 귀뚜라미의 “귀뚜루루”는 미세한 음이지만, 나뭇잎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생명의 중심은 언제나 낮은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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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나뭇잎과 절제된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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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도 춤을 춘다”는 표현은 의인화이지만 과하지 않다. 감정의 과잉 없이, 자연의 반응을 최소한의 언어로 포착한다. 이 시의 서정은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며, 감탄을 강요하지 않고 납득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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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깔린 비단, 가을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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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부의 “이미 산천에 비단 깔았다”는 문장은 가을을 진행형이 아닌 완성형으로 제시한다. 계절은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달해 있다. 이 담담한 종결은 시 전체의 품위를 결정짓는다. 말이 적을수록 깊어지는 한국 서정시의 미덕이 이 한 줄에 응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