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박성진 안광석 시인-귀뚜라미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귀뚜라미〉


안광석 시인


진군 나팔소리에

뜨겁던 백사장도 식는다


국화 첨병 세우고

코스모스가 지휘한다


귀뚜루루 악기 소리에

나뭇잎도 춤을 춘다


가을은

이미 산천에 비단 깔았다.



가을의 질서를 지휘하는 시에 대하여


계절을 ‘느끼는’ 시에서 ‘읽는’ 시로


〈귀뚜라미〉는 가을을 감상적으로 노래하지 않는다. 이 시에서 가을은 정서가 아니라 질서이며, 감정이 아니라 구조다.

시인은 계절을 바라보는 대신, 계절이 움직이는 원리를 조용히 드러낸다. 그 절제된 태도에서 시의 격조가 시작된다.


‘진군 나팔’과 식어가는 세계


첫 연의 “진군 나팔소리”는 가을 시로서는 이례적인 출발이다. 그러나 이 나팔은 전투를 알리는 소리가 아니라, 열기를 거두는 신호다. “뜨겁던 백사장도 식는다”는 구절에서 계절은 파괴하지 않고, 질서를 회복한다. 가을은 소란을 끝내는 힘으로 등장한다.


‘국화 첨병’의 시적 정확성


“국화 첨병 세우고”라는 구절은 이 시의 중심축이다. ‘첨병’은 계절의 선두에 서는 존재로서, 가을의 도래를 가장 먼저 알리는 상징이다. 국화는 장식이 아니라 선도자로 배치되며, 이는 시인이 자연을 관조하는 수준을 넘어 자연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코스모스와 귀뚜라미의 조율


국화가 앞을 열면, 코스모스는 ‘지휘’한다. 그리고 귀뚜라미는 ‘소리’로 응답한다. 이 삼중 구조 속에서 자연은 명령하지 않고 조율한다. 귀뚜라미의 “귀뚜루루”는 미세한 음이지만, 나뭇잎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생명의 중심은 언제나 낮은 곳에 있다.


춤추는 나뭇잎과 절제된 서정


“나뭇잎도 춤을 춘다”는 표현은 의인화이지만 과하지 않다. 감정의 과잉 없이, 자연의 반응을 최소한의 언어로 포착한다. 이 시의 서정은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며, 감탄을 강요하지 않고 납득하게 하였다.



‘이미’ 깔린 비단, 가을의 완성


종결부의 “이미 산천에 비단 깔았다”는 문장은 가을을 진행형이 아닌 완성형으로 제시한다. 계절은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달해 있다. 이 담담한 종결은 시 전체의 품위를 결정짓는다. 말이 적을수록 깊어지는 한국 서정시의 미덕이 이 한 줄에 응축되어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박성진 《정순영 시인-터진 웅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