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하순인데도 꽃밭에 비덴스 꽃이 예쁘다. 한참 때에 비하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예쁘다. 노오란 꽃잎이 참 곱다. 황금을 보는 것 같달까. 요즘 금값이 난리도 아니라던데, 금가락지 하나 없는 헛헛한 마음을 비덴스 보며 달랜다.
예뻐서 사진을 찍었다. 아뿔싸. 찍지 말았어야 하는데. 꽃사진을 찍으면 왠지 나이 들어 보이는 것 같다. 자격지심이겠지만 말이다. 꽃을 보아도 아무리 예뻐도 사진을 찍지 않으려고 허벅지를 꼬집어 보지만 소용없다.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들고 찰칵거리고 있기 십상이다. 예쁜 걸 어쩌라고. 심지어 내가 물 주고 가꾸고 키운 꽃이잖아. 예쁜 데다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자랑을 해야 하는데… 대놓고 하기는 민망해서 방법을 고민했다. 그래서 브런치 글의 삽화로 슬쩍 들이밀었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은 감상문이었다. <자기 앞의 생>의 주제도 사랑이고 비덴스의 꽃말도 ‘지속적인 사랑’이다. 딱 맞춤이다.
“한 가지에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있는 비덴스네요.”
우와~ 나의 얄팍한 마음에 비해 넘나 철학적이고 인문학적 지성과 감성이 철철 흘러넘치는 친구의 댓글이다. ( 제 친구예요!! ) 현재의 아름다움에 혹한 나에게 시든 꽃송이와 꽃봉오리는 보이지 않았다. 안중에도 없었다. 친구의 댓글 덕분에 시든 꽃송이는 시든 대로 , 활짝 핀 꽃은 만개한 대로, 곧 피어날 봉오리는 여린 대로 어울려 있는 모습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참으로 알흠답다.
꽃밭은 늘 그래 왔다. 꽃봉오리, 자신의 아름다움을 최대치로 뽐내고 있는 꽃과 시들시들 말라가는 꽃송이들이 항상 섞여 있다. 이제 막 피어나려고 애쓰는 처음과 모든 게 시들어버린 마지막을 제외하면 늘 봉오리, 꽃과 시든 송이가 어울려 있었다. 절정의 꽃이 지면, 그 그늘에 가려져 있던 봉오리가 차례가 되어 햇빛을 한껏 받아들여 꽃을 피운다. 그 옆에는 또 다른 봉오리가 자신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현재는 과거 덕분에 가능했고, 현재는 미래를 준비한다. 내가 예쁘다고 환호하며 사진을 찍은 것은 이 모든 것들의 어울림 덕분이리라.
우리 삶도 꽃밭과 다르지 않다. 내 인생에도 피고 지고 시들고, 별별 꽃들이 다 있었다, 한때는 봉오리 투성이, 뭐 하나 제대로 핀 것도 없이 매일 허둥대던 시절도 있었고, 어떤 날은 한 송이가 기가 막히게 예쁘게 피어나서, 온갖 칭찬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피고 지고 시든 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육십을 바라보는 지금, 내 삶의 꽃밭은 예전보다 봉오리도, 활짝 핀 꽃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시든 꽃이 남아 있고, 또 여전히 어딘가에 작고 조용한 꽃 하나가 피어나고 있다. 예전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눈에 잘 띄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 꽃은 항상 어울려 피고, 삶은 늘 그렇게 흘러간다.
요즘 유행한다는 ‘영포티’라는 말이 당혹스럽다. 처음에는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중년이라는 긍정적 의미에서 출발했는데 ‘젊지도 않으면서 젊은 척한다는’ 조롱의 말로 바뀌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씁쓸하다. 왜 젊어 보이려고 할까? 제 나이로 보이면 안 되는 건가? 이건 마치 꽃이 피어 있는 동안만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비덴스 꽃과 친구의 댓글 덕분에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절정의 순간만이 아니라, 피어나고 시들고 또다시 피어나는 그 모든 과정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걸.
삶도 그렇지 않을까.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내 안의 봉오리도, 활짝 핀 꽃도, 시들어가는 잎도 모두 소중하다. 우리 집 비덴스를 봐라. 한 여름보다 못하지만 지금도 나름 충분히 예쁘다. 영포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내일모레 식스티이지만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