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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알송알 May 24. 2022

뭐라도 해야지

심보선 시인의 <첫 줄>

첫 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미래의 열광을 상상 임신한

둥근 침묵으로부터

첫 줄은 태어나리라

 연서의 첫 줄과

선언문의 첫 줄

어떤 불로도 녹 일 수 없는

얼음의 첫 줄

 그것이 써진다면

첫 아이처럼 기쁠 것이다.

그것이 써진다면

죽음의 반만 고심하리라

나머지 반으로는

어떤 얼음으로도 식힐 수 없는

불의 화환을 얻으리라.


심보선 시인의 <첫 줄>


사람들은 대개 새해가 되면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다짐을 하는데 나는 봄이 되어서야 그런 마음이 쪼금 생긴다. 연말연시에는 추워서 겨울잠을 자듯이 웅크리고 지낸다.  내 생각에는 사람들의 새해 목표가 작심삼일이 되기 쉬운 것은 추워서 그렇다. 지금보다    먹었을 때는 나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 목표를 세우곤 했다. 꿈은 클수록 좋은 것이야 그러면서  주먹 불끈 쥐곤 했다. 주먹이 풀리는  걸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더니 어느 새부터 쥐지도 않는다. 때문에 작심삼일이 가슴을 할퀴는 일도 없어졌다. 작심삼일도 작심을 해야   있다. 이번에도 작심삼일로 끝났다며 반성문  준비하는 사람들이여, 작심만으로도 이미 대단하니 너무 낙심하지 말지어다.


암튼 지간 새해 일출이나 제야의 타종에 시큰둥하다가 봄바람이 살랑거리기 시작하면  마음도 일렁인다.  꿈을 꾸고 목표를 잡고 계획을 세우고 뭔가를 시작해야   같아 조바심이 든다. 선명해진 햇빛을  통해 보이는  모습은 구멍이 숭숭   같다. 겨우내 겨울 공기가 가려주었던  뱃살과 허리살이 무심하게 비어져 나온다. 연둣빛 새순과 예쁜 꽃망울과 나는 어울리지 않는  같아 을 움츠러든다. 나는 봄이 어렵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뭔가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무릇 봄은 새로운 출발의  계절이니까 말이다. 누구처럼 3년 안에 1억을 모으겠다는 욕심은 더 이상 부리지 않는다. 한 때는 원어민과 쏼라쏼라 자연스럽게 대화할 정도로 영어회화에 능통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몸짱이 되어 바디 프로필을 찍을 마음도 없다. 출간 작가도 자격증 취득도 내게는 언감생심이다. 그렇다면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특별히 새로운 뭔가를 하지 않아도 지금처럼 책 읽고 글 쓰고 걷고 맛있는 거 먹으며 잘 살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마음을 다독여본다. 그런데도 마음이 헛헛하고 뭔가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봄이니까.


나는 한때 작심삼일의 달인이었다. 하기로 해놓고 제대로 하지 않은 일들이 무궁무진했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심보선 시인의 <첫 줄>을 읽었다. 심보선 시인은 시작은 못했지만 쓰고 싶은 글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시작하지 못한 고통이 클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답답함이 클까.


<어쩌다 여정>이라는 예능을 보는데 눈물이 났다. <어쩌다 여정>은 아카데미 시상식과 드라마 <파친코> 홍보 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윤여정 배우의 일정을 따라가는 프로그램이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윤여정 배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지만. 그와 오래도록 인연을 맺고 있는 친구와 지인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난 2화 방송에서 디즈니에서 애니메이션 타이밍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김정자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을 울렸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인생에 목표가 없어지잖아요. 근데 언니가 보여줬죠. 무언가를 이루기에 우리가 결코 늦지 않았다는 걸요. 70 넘어도, 모르는 일이지만 , 무슨 일이 나한테도 일어날  있구나.”


나는 나이를 핑계 삼아 목표를 세우지 않고 있구나. 지금 이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해봤자 소용도 없다며 애써 외면하고 지레 포기하고 있구나. 70이 넘어도 무슨 일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을까? 가능할까? 어떻게? 그렇게 되려면 뭐라도 하고 있어야겠지. 내가 할 수 있을까 싶다. 나는 너무 거창한 것을 원하는 건가. 아닌데? 보통의 일상에 충실하기만 해도 신나는 일이 일어날까. 아닌가. 특별한 것을 해야 하나. 특별한 일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 아닌가? 생각이 널뛴다.

그래도  하나는 알겠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시작하지 못한 고통보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답답함이 더 크다. 첫 줄을 기다리는 시인처럼 나도 첫 줄을 써보고 싶다. 그 무언가의 첫 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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