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살, 새로운 직업을 찾다.
-정주연-
"안녕하세요 오늘 면접보기로 한 정주연입니다. 지금 건물 1층에 도착해 있는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낮은 음성의 딱딱한 중저음의 목소리
"오른쪽 화물 엘리베이터가 보이실 겁니다. 그걸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오세요"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비닐, 자재들, 쾌쾌한 먼지냄새등 이 코를 찔렀다.
지하 1층에 도착해 보니 버퍼존이라는 곳이었고 그곳에는 마트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이 분주히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오른쪽 편 시선 끝에 뿔테안경을 쓰고 키가 크며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주연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면접 보러 오신 분이 가요?"
수화기 너머 속,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 네 정주연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뿔테안경남은 힐끗 주연을 다시 한번 쳐다보더니 따라오란 말을 하고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주연을 데리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로 가는 곳에는 회의실이라는 곳도 보였고 POP사무실이라는 곳도 보였고
남자 휴게실, 여자 휴게실도 보였다.
회의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은 후 그는 안경을 치켜세우며 주연의 이력서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입을 떼었다.
"전 가공파트 음료주류 담당 이도진입니다.
유통업 경험은 없으신데, 오랫동안 병원에서만 근무하셨나 봐요?"
"아.. 네. 경험은 없지만 열심히 배우면서 일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
"유통업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람상대하는 직업이라 말도 탈도 많아 웬만한 멘털이 아니라면 힘드실 수 있어요."
"이력서를 보셨다시피 전 사람상대라면 자신 있습니다. 상담실장이라는 자리가 어찌 보면 병원의 기술을 판매하는 직업이니까요."
도진은 다시금 주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와인판매 경험도 없으신데. 와인을 좋아하시나요? "
'큰일 났다..'
주연은 알코올알레르기가 있는 이른바 알. 쓰(알코올쓰레기)였다.
32살 넘도록 술을 마셔보려 시도했지만 술을 마시게 되면 기도가 붓고 들숨날숨이 어려워지며 온몸은 빨갛게 타오르는 불고구마처럼 변해
병원에서도 죽고 싶으면 술을 마시라고 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주사 맞기 전 닦아내는 알코올솜 닿았던 자리가 벌겋게 올라올까.
"네! 하지만 배우면서 일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고 지켜봐 주세요! "
주연은 본의 아니게 금세 들통날 거짓말을 해버렸다. 와인을 좋아한다니.
"... 일단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다른 일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들키고 싶지 않은 약점이 들킨 것 같아 주연은 '헉'하고 숨을 들이마신 체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고 가만히 도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지난날의 한 페이지를 들추어낸다.
“10여 년을 병원에서만 근무하다 갑자기 다른 일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예요.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더 이상은 제가 아닌 저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서로 속고 속이며 아닌 줄 알면서도 그런 삶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 속에서 같이 공존하는 그 시간들이 저를 갉아먹고 있더라고요.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온전한 저로 살아보고 싶어 도전하는 거예요. 제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는지는 그 누구도 모르잖아요?
남은 인생만큼은 비록 작고 하찮을지라도 진실된 저와 조우하며 살아보고 싶어요. 큰 뜻 없이 큰 꿈 없이 그저 소박하게요. 혹 어떤 이들은 비웃을지라도요. 이 정도면 질문의 답이 되었을까요?”
도진은 묵묵히 그리고 덤덤히 자신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읊어나가는 주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갑고 도시적인 첫인상과는 달리 소박하고 평범한 삶을 원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도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네. 충분합니다. 다음 달 8일, 매장 가오픈입니다. 그때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혹시”
도진은 정리하던 이력서파일에서 눈을 떼고 똑바로 주연을 응시하며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비웃는 사람들을 만날지라도 그저 무시하시면 됩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 인생을 사는 종자들이니까요. 당신과 다른 삶을 사는. 그저 다르다고 생각한 체 상처받지 말고 무시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으실까요?"
어느덧 면접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아... 없습니다. ^^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가오픈 때 뵙겠습니다. “
-이도진-
그는 유통업에 종사한 지 벌써 10년째. 직급은 주임이였고 가공파트만 벌써 8년 넘게 일해왔다.
늦은 나이 대기업 입사였던지라 동기들보다 나이가 좀 있는 편이었다.
늦었던 만큼 그는 책임감이 강했고 의욕이 강했으며 더불어 동료직원들과도 허물없이 편하게 지낼 만큼 성격도 좋았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호불호가 매우 강했다. 누군가에겐 한 없이 따뜻했다가도 또 누군가에겐 칼날같이 냉정하고 얼음돌만큼 차가웠기 때문에 그의 평판은 정말 딱 반반이었다.
그는 갑자기 이곳 고성으로 발령을 받았다. 험하고 악명 높기 유명한 오픈점 발령만 벌써 3번째.
오픈점 특성상 정시 출퇴근이란 건 없다. 오픈날을 맞추기 위해선 연장근무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해서, 많은 직원들은 오픈점을 꺼려한다. 해야 할 일들도 맞춰야 할 일들도, 거의 중노동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긴 죄다 논과 밭뿐이군.'
서울 잠실점, 서초점, 양재점 등 서울에서만 근무하다 이 시골마을 고성을 오게 되면서 그는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보이는 풍경이라곤 허허벌판의 논과 밭, 그리고 산, 저수지, 작은 시민공원 등이었고
번화가라고 가보니 조그만 시골 읍내였으며 이런 곳에서 과연 대형마트가 들어와 장사가 될는지 그저 궁금했다.
그때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
오늘은 와인직원이 면접을 보러 오는 날이었다.
오픈을 앞두고 각 브랜드사 면접을 매일같이 보고 있던 터라 사실 다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는 가공파트에서도 음료주류담당을 맡고 있었고,
냉철하고 칼 같은 그의 성격을 보여주듯,
음료브랜드, 주류브랜드 등 시음행사 및 판촉행사 , 진열사원을 뽑는 일까지 대게는 파트너사에서 면접을 보고 채용하게 되지만 그는 직접 면접을 보았다.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자신이기때문에.
그때, 화물 엘리베이터에서 한 여자가 내렸다.
그녀는 키가 매우 큰 편이였고 체구는 왜소한편이였으며 검고 짙은 긴 생머리덕에 얼굴은 창백할 만큼 하얗게 보였고 검은색 롱코트는 가녀린 몸매를 더 두드러지게 했다.
"면접보러 오신 분이신가요?"
이름은 정주연 나이는 32 유통업 경력은 없다.
오랫동안 병원에서 근무한 이력외엔 유통업 관련 이력은 단 한줄도 없었다.
그는 그 점이 매우 의아하면서도 마음에 걸렸다. 유통업은 꽤 험해 왠만한 멘탈로서는 이 일을 오랫동안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면접을 보는 내내 그녀는 긴장을 많이 한 탓인지 입술을 몇번 깨물기도, 굳게 다물기도 했고 자리를 고쳐 앉으며 바른자세를 유지하려고 했다.
형식적인 면접이 끝나고 도진은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32살에 새로운 일을 갖기란, 새로운 도전을 하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그는 문득 궁금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다른일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대답은 꽤 진중했다. 웃음기 하나 없어 보였고 긴장한 모습도 온데간데 없이 덤덤히 자기 이야기를 조근조근 읊어나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듯이. 답답하고 힘들었던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놓기라도 하는 듯이.
길게 뻗은 속눈썹 사이, 곧게 뻗은 콧날아래 핑크빛 입술은 속삭이듯 이야기 했고 그 목소리는 꽤 갸날퍼 도진의 귓가를 어루만지듯 몇번이고 맴돌았다.
‘뭐지. 이 여자.’
도진은 더 궁금해졌다. 30살 넘도록 자신이 쌓아온 커리어를 내던질만큼의 용기는 어디서 났으며 얼마나 고된 시간을 감내해야 그런 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저 가녀린 몸으로 대체 무슨일을 겪은 걸까.
더불어 그녀의 결심과 용기가 부럽기까지 했다. 해서.. 응원하고 싶어졌다.
“혹시 비웃는 사람들을 만날지라도 그저 무시하시면 됩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 인생을 사는 종자들이니까요. 당신과 다른 삶을 사는. 그저 다르다고 생각한체 상처받지 말고 무시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도진은 자신이 이야기하고도 내심 놀랐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이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들로 혹 부담을 느끼면 어떡하나, 오늘 처음 본 남자가 자기의 대해 얼마나 안다고,
몇마디 말들로 다 안다는 듯이 이야길 하나. 동정이라고 느끼면 어떡하나. 도진은 문득 걱정되었다.
그러면서도 처음 본 낯선 그녀 주연이, 도진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스치듯 지난 인연이었을지라도 꼭 한번은 만났을 법한 익숨함, 편안함이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였을까? 그 답지 않은 행동들이 무심코 나왔던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