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드리서점

책과의 인연

by 다소니Rino

-정주연-

면접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던 그 길은 낯설 만큼 달리 보였다.


매일을 오가던 등나무벤치 아래 자갈길은 발끝에 부딪히는 자갈소리가 마치 노랫가락처럼 들렸고


코끝이 아릴 만큼 매서운 바람은 꽉 막힌 가슴이 뚫리게끔 시원하게 불어와 주었다.


“ 하….. 시원하다”


10여 년을 성형외과 상담실장으로서 아주 많고 많을 일들을 겪으며 지내왔다.

돈을 많이 벌었던 만큼 그 대가는 너무나 참혹했고 가혹했다.

말도 탈도 많은 진상고객, 매출압박하는 총괄실장과 병원장. 매출을 끌어야 같이 공생하는 코디네이터들, 돈을 많이 버는 만큼 사기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고, 시기질투가 무성한 10명의 상담실장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녀도 그만큼 독해져야 했으며 환자들을 돈으로만 취급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이 매일매일 더해져 꼬박, 그렇게 10년을 보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시기에 사랑하는 엄마는 위암 말기로 돌아가셨다. 엄마를 위해 버티고 버텨왔던 시간들이었는데 이제 그녀가 버틸힘도 기댈 곳도 사라졌고 더 이상 두 다리로 서있기 조차 버거워졌다. 그렇게 주연은 번아웃이 왔다.


'내가 살기 위해서 그만둬야 해. 이러다가.. 내가 죽을 것 같아'


한참을 걷던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

무언가를 도전한다는 긴장감.

낯선 환경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

그 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처럼 그녀를 에워 감싸는데도 주연은 꽤 신나 보였다.


'해보는 거야. 무슨 일이든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32살의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전혀 늦지 않았어. ‘


집으로 돌아와 주연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리고는 세월이 묻은 검의 튀튀하고 노르스름한 원목 책상 앞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책상 위에도 오른편 3단 책장에도 많은 책들이 꽂혀있고 놓여있었다. 소설책, 인문학책, 과학책, 역사책, 철학책, 자기 계발서등 다양한 책들이 가지런히 자기 구역에 맞춰 줄을 서있다.


주연이 책을 사랑하고 아끼게 된 이유는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병원을 그만둔 뒤, 홀로 이곳 혜민 시로 이사 오면서부터다. 낯선 지역,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예민하고 감성적인 주연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자, 도구가 바로 책이었으니.


때는 어느 늦은 밤이었다. 주연은 지독한 고독에 휩싸였고 마치 세상에 홀로 서있는 듯한 외로움과 사랑하는 엄마를 잃은 상실감과 괴로운 몸부림을 치던 중, 책장 구석에 처박혀 있던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살리는 철학-


주연은 그 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스탠드 조명아래서 펼쳐 읽어나갔다. 지혜와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 아닌 그저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상념에서 벗어나고파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그렇게 꼬박 4시간을 그 책을 부여잡고 읽고 또 읽으며 결국엔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얼마만일까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어본 게. 엄마의 마지막을 배웅하던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리고는 아주 오랜만에 달디단 잠과 함께 긴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난 주연은 한참을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눈을 뜬 채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 일어나 창가로 가 가벼운 기지개를 켜고서 낮게 읊조렸다.


“서점부터 가자.”


혜민시 읍내에는 아주 작고 오래된 서점이 하나 있다.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 주연 같은 뚜벅이들이 손쉽게 찾을 수 있다. 2층으로 지어진 서점은 아담하면서도 격자무늬의 목조 창문이 유난히 눈에 띈다. 세월을 머금은 하얀 회벽은 햇살을 받을 때마다 살구색으로 따스히 물들어간다.


비바람에 색이 바랜 나무판자 간판에는 ‘아름드리서점'이라는 투박한 글씨체로 서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곁에는 크고 작은 꽃 화분들이 곳곳에 놓여 있어 마치 꽃집인지 서점인지 헷갈릴 정도였고 매서운 겨울은커녕 마치 봄이 찾아온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겨울에 꽃이라니.. 예뻐라.. 광합성하러 나왔구나 너희들 ^^”


가로수며 산이며 한 겨울 깊은 잠에 빠진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만 보다 오랜만에 초록한 잎사귀에 알록달록한 옷을 갖춰 입은 꽃을 마주하니 주연의 기분은 한결 더 나아졌다.


“딸랑~”


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가니 문 끝에 달린 작은 황동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주연을 맞이한다.


“어서 와요 아가씨~^^ 반가워요~”


오래된 서점은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희끗한 머리에 주름진 얼굴과 온화한 미소, 미소위에 반달눈을 가진 여주인은 밖에 놓인 푸릇하고 싱그러운 꽃들처럼 주연을 따뜻하고 환하게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남편분으로 보이는 책방지기 사장님은 계산대 옆 작은 쪽문에서 한 손에는 빗자루와 나머지 한 손에는 쓰레받기를 들고서 얼굴을 빼꼼히 내미시며 주연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찾는 책이 있나요?^^”


주연의 가슴팍까지 오는 작은 키에 플라워 프린트의 앞치마를 메고 주연 앞으로 다가온 여주인은 무슨 책이든 찾아줄 것처럼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주연을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 저… 찾는 책은 없고.. 좀 둘러보고 싶은데요. 그래도 될까요?”


“어이구! 그럼요 얼마든지~^^ 편하게 둘러봐도 좋아요~”


“네 감사합니다.. 아 저.. 밖에 화분들이 참 예뻐요.. 겨울에도 꽃이 피는 식물이 있나 봐요..”


여주인은 또다시 반달눈을 하고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 단풍잎처럼 크고 빨간 잎을 가진 아이는 포인세티아, 그 옆에 장미꽃처럼 하얀 봉우리에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건 하얀 동백꽃이에요. 야생화라 키우기가 조금 버겁지만 힘든 시기가 지나고 다문 입을 열어 활짝 웃어주면 그 자태가 얼마나 예쁘고 귀한지요 ^^ 오늘은 제법 날씨가 푹해서 바람도 쐬고 햇살도 받으라고 내놓았는데, 이렇게 이쁜 아가씨를 불러올 줄이야~ “


“아.. ㅎ 감사합니다.”


“1층에는 어린이 도서, 청소년 문제집 등이 있고 내가 볼 때.. 아가씨가 찾는 책은 2층에 있을 것 같은데. 올라가서 많이 둘러보고 많이 펼쳐봐요. 그리고! 귀를 잘 기울여 들어봐요 아가씨를 부르는 작은 속삭임을^^“


“네? 속.. 삭임이요?”


“호호호 그런 게 있답니다 ^^ 어서 올라가 봐요~”


여주인은 주연이 찾는 책을 알고 있다는 듯 확신의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그런 주연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여주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2층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후…. 특이한 분이시네..’


올라가자마자 주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합판 위에 가지런히 뉘어진 다양한 책들과 책장에 가득 꽂혀 있는 어마어마한 양들의 책들이었다. 책장 모서리 끝에는 네임밸류가 붙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달의 책- 안아주고픈 당신에게’라는 손글씨로 쓰인 메모와 함께 3권의 책이 나란히 줄 맞춰 세워져 있었다.


주연은 그 앞에서 가만히 제목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한 권의 책을 꺼내어보았다.


‘나태주 –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주연은 책의 겉표지를 읽어 내려갔다.


‘너와 나는 기적의 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별들이겠는가.’


주연은 그 문장을 한번.. 두 번. 세 번.. ‘기적의 별, 그러니 사랑스러운 별’.. 이란 글자를 매만지며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는 그 책을 옆구리 한편에 끼워놓고 같이 집에 가기로 했다.


‘오늘부터 나와 함께하자. 기적의 별, 사랑스러운 그 별이 나도 될 수 있도록. 네가 도와줘.’


주연은 ‘철학' 코너로 갔다. 어젯밤 읽은 책이 철학책이어서일까. 마음을 다스리고 어지러운 생각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주는 책이 필요했다. 다양한 철학책 사이로 주연은 한잠을 멍하니 서있었다.


‘ 하… 종류가 많구나.. 어떤 책을 골라야 하지?..’


그때, 여주인이 책을 한 아름 안고서 힘들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주연과 눈이 마주쳤다.


“오호~ 철학이라~철학을 좋아해요?^^”


“아.. 아니요. 어제 처음 읽어본 게 전부예요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서요..”


“그 책이 아가씨에게 위로가 되었군요 ^^”


“엇.. 어떻게 아셨어요?..”


서점의 여주인은 주연을 꽤고 있는 듯해서 해서은 적잖게 놀랐다.


“위로가 된 책은 또 다른 책을 부르고 그 책은 또 다른 책을 불러오죠^^ 책은 재미만 주는 게 아니에요. 위로도 되고 의지도 되고, 그러므로 용기도 주고 힘을 얻어 다시 살아갈 기운을 얻게 되죠. 그게 책이 주는 위대한 힘이에요”


여주인은 주연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책장 앞으로 다가가 한 권의 책을 꺼내 주연에게 건네었다.


-아잔 브라흐마.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


“아.. 감사해요… 아.. 저.. 사실, 어제 책 한 권을 읽고 정말 오랜만에 목놓아 울었어요 그렇게 울고 나니 어찌나 속이 편안한지.. 오래간만에 오랜 잠을 자기도 했어요. 책이 저에게 편안함을 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서점으로 오게 된 거예요. 다른 책들도 혹시나 저에게 편안함과 위로가 되어 줄까 해서요..”


주연은 푸근한 인상과 온화한 미소를 띤 여주인 얼굴을 보며 자신의 얘기를 서슴없이 하게 되었다. 여주인은 그런 주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서는 조용히 주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위로라는 것, 응원이 된다는 것, 굳이 사람에게만 찾으려 하지 않아도 돼요. 책 속에 글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한 줄의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은 문단이 되어 가슴에 콕! 하고 박히는 그날엔 응원도 받고, 용기도 얻고, 없던 힘도 솟아나고, 또 위로도 된다는 걸, 우리 아가씨는 알게 된 것 같네요.^^ 그렇지만 그거 알아요? 사람은 내게 상처 주고 또 날 괴롭게도 하지만 책도 결국엔 사람이 쓴다는 걸. ^^ 결국 상처도 위로도 사람에게서 받고 주는 거예요.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산다는 게 결코 괴롭지만은 않답니다. “


주연은 여주인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자신이 잘못생각해 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주어진 환경 탓, 곁에 머무는 사람 탓만 하면서 정작 자신의 그릇된 행동과 생각의 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람과 환경으로 자신이 받았던 상처가 있는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었다는 걸 주연은 그때 처음 깨달았다.


‘왜.. 몰랐을까. 왜 진작에 알지 못했을까.’


“아가씨^^ 이 책은 아가씨에게 큰 울림을 줄지도 모르겠어요. 책 속의 글들이 아가씨 가슴에 습자지처럼 스르르 하고 스며들면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봐요. 그리고 그 소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해 봐요. 딱딱하고 고되던 삶이 한결 부드러워질 거예요. 이 늙은이가 장담해요 ^^ “


그리고는 안고 올라왔던 책들을 정리하신 뒤 다시 조용히 1층으로 내려가셨다. 주연은 건네주셨던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는 책장 모서리 끝에 놓여있던 원목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렇게 1시간, 2시간, 3시간…


어느덧 책의 마지막 챕터만 남겨두고 주연은 번뜩 정신을 차려 시계를 보았다.


‘뭐야 벌써 3시간이나 지난 거야? 미쳤나 봐 정주연! ‘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면 책을 끝까지 읽을 기세였다. 주연은 여주인 골라주었던 그 책을 들고 1층으로 서둘러 내려가 계산을 하기 위해 계산대에 섰다.


“아.. 죄송해요 저 너무 오래 있었죠? 이 책들 결제해 주세요 사장님 “


계산대에는 주인부부가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계셨다. 그리고는 주연을 올려다보시며 빙그레 웃어 보이셨다.


“이런 시골서점에 젊은 사람들이 오래 머물러주는 게 우리로선 얼마나 환영인데요~ 책은 안 사도 되니까 미안해말고 언제든 책 읽고 싶을 때 와요 ^^ “


“아 아니에요 골라주신 책.. 너무 좋아서 정신없이 읽었어요.. 꼭 저의 마음을 알고 계신 듯해서 놀랐어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별말씀을~^^”


여주인은 책을 결제한 뒤 서랍에서 작은 책갈피 꺼내 주연에게 건네주셨다.


“내가 만든 건데 아가씨 마음에 들는지 모르겠네~ 여기 앞 가로수길 은행나무는 은행잎이 유난히 노랗고 예쁘거든요~ 겨울이 오기 전 가을바람에 흐드러지게 날아오르길래 헤어지기 아쉬워 한 잎 두 잎 모아다 책갈피로 만들어 봤어요. 가을의 시간을 잠시 간직해 보려고 ^^ “


주연은 노란 은행잎 책갈피를 내려다보았다.


“와… 너무 예뻐요 사장님. 감사합니다 ^^..”


“호호호 또 봐요 아가씨 ^^”


주연은 딸랑 거리는 황동종의 배웅을 맞으며 집으로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아름드리서점을 다시 돌 돌아보았다. 그리고 여주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시간을 간직한다라…. 멋있다.. 그 말..’


저 작고 아담한 서점이 주는 안락함과 주인부부가 주는 편안함을 알게 된 오늘을 주연은 감사했다. 그리고 두 권의 책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작아 눈에 띄지 않지만 그것들이 한데 모이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동안 평범하고 소홀이 여겼던 작은 일들부터 다시금 챙겨보자. 그리고 모아보자.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시간을 살아내 보고 간직해 보자.’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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