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과 벨라스케스>
프랑스 작곡가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녀 마가레타의 초상>이라는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작곡한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근친혼의 관습에 따라 외삼촌과 결혼해 6년 동안 살다가 22살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라벨은 슬픔을 봤다. 그래서 그렇게 일찍 죽은, 아름답지만 비운의 왕녀 마르게리타를 음악으로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슬픔이 슬픔에게 말을 건넸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 명의 작곡가가 있다. 지난번 소개한 끌로드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이다.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도 드뷔시와 라벨의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작곡가다. 19세기 인상주의라는 시간적 공통점을 같이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음악은 같은 듯 다르다. 실제로 드뷔시와 라벨은 그리 친하지 않았단다. 초창기에는 라벨이 드뷔시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열렬한 추종자들이 서로 심하게 싸웠던 것만 봐도 둘을 하나의 사조로 보기엔 어렵다. 또한 드뷔시가 쉽게 로마대상(Prix de Rome, 프랑스에서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건축, 미술, 조각)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파리 음악원 작곡과 학생 중에서 선발됨)을 차지했던 영광에 비하면, 라벨은 로마 대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드뷔시는 21살인 1883년에 칸타타 <전투사>로, 22살인 1884년에는 칸타타 <돌아온 탕자>로 거머쥐었다. 라벨은 14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해서 20살까지 학교 교육을 받았지만, 자퇴하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음악 세계를 펼쳐간다. 그러다가 2년 후에 재입학을 해서 로마 대상에 도전했다. 처음에는 2등, 이후 연달아 본선에서 탈락,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건 라벨의 음악적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반항적이고 독특했던 라벨의 성격을 싫어하는 편파적 판정임이 드러났고, 프랑스 정부는 라벨에게 급히 사과하며 로마 대상 대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 했지만, 라벨은 거부한다. 자존심 강한 라벨은 당연히 프랑스 정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드뷔시가 동양의 이국적 정서에 빠져 물 흐르듯 유영하는 음악을 추구했다면, 라벨은 훨씬 직조의 견고함이 느껴지는 촘촘한 음악을 탄생시켰다. 라벨의 음악이 더 형식적이고 고전적이어서 누군가는 라벨이 드뷔시 보다 이전의 작곡가로 착각하기도 한다. (실제로는 라벨이 드뷔시보다 13살 어리다) 라벨은 오케스트라 악기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작곡가였다. 그래서 그를 두고 오케스트레이션(오케스트라 악기로 연주할 수 있게 편곡하는 작업)의 대가라고 부른다.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에 관심을 두는 작곡가인지라 자신이 발표한 독주곡을 오케스트레이션 해서 발표하는 일도 많았다. 대표적인 곡인 바로 이번에 소개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프랑스 신사 라벨
모리스 라벨은 생상스, 포레,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 음악의 계보를 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 지역인 바스크 지방의 시부르(Ciboure)에서 태어났는데, 시부르는 피레네산맥 근처의 작은 마을이다.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파리로 이사를 하긴 했지만, 사랑하는 어머니의 고향 시부르는 라벨에게 또 하나의 고향이었다. 그의 음악이 전통적인 프랑스풍이기보다 다분히 이국적인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스페인의 왕녀 그림도 그렇고 제목에 붙인 ‘파반느’라는 춤 장르도 그렇고 이 곡에서도 역시 라벨의 이국적인 스페인의 정서가 보인다. 24살의 청년이 작곡한 곡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서정적인 멜로디와 우수(憂愁)가 돋보인다. 멜로디는 샤브리에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제목을 결정하는 데는 스승 포레의 역할이 컸다. 파리음악원의 스승이었던 포레 역시 ‘파반느’나 ‘엘레지(비가, 悲歌)’ 라는 제목으로 곡을 발표했다. ‘파반느’는 궁정에서 추던 아주 느린 풍의 춤곡인데, 슬픈 왕녀의 춤으로는 신나는 왈츠나 포근한 느낌의 미튜에트보다 파반느가 적격이다. 곡의 처음부터 아주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는 62세의 일생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라벨은 키가 작았지만 굉장한 멋쟁이였다. 항상 향수를 뿌리고 다니며 헤어스타일과 의상에 신경을 많이 썼고, 본인의 외모만큼이나 여성의 외모에도 꽤 민감해 못생긴 여인은 선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여성은 많았지만, 이성을 선택하는 눈높이가 높았기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라벨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평생 어머니를 사랑했고 그리워하며 인생을 살았다. 그가 자동차나 장난감 또는 기계 등에 세심한 관심을 보인 건 스위스 출신 엔지니어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겠지만, 음악을 사랑하고 스페인적 취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유산이었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가난하지도 않았던 라벨의 어머니는 아들의 음악적 교육을 위해서라면 성심성의껏 지원했고, 그런 아들을 위해 당시 예술가들의 고향이었던 파리 몽마르트르 지역으로 이사를 한다. 그렇게 14살(1889년) 소년 라벨은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가믈란(실로폰처럼 연주하는 타악기)과 러시아 지휘자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새로운 음악을 접하며 러시아와 동양의 새로운 음악에 눈을 뜨게 된다.
작곡가 중엔 개나 고양이 등 애완동물을 사랑한 사람들이 꽤 있는데, 라벨도 그중 한 명이다. 고양이 집사였던 라벨은 특히 샴고양이를 좋아해서 자식처럼 대하며 키웠다고 한다.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린아이도 좋아하는데, 라벨은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담은 모음곡 <어미 거위>, 오페라 <어린이와 마법>을 작곡했다.
라벨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면서 뛰어난 감각을 지닌 패셔니스트, 그것도 모자라 비행기 조종사 자격까지 갖춰 군에 자원입대했다. 국제정세에도 관심이 많아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이 한창이던 1915년 40세의 나이에 운전병으로 참전했다. 원래는 군용기 조종사로 지원했지만, 심장에 문제가 있어 운전병으로 전향했다. 1917년에는 전쟁에서 희생된 모든 사람을 위해 6개 악장으로 구성된 피아노 모음곡 <쿠프랭의 무덤>을 작곡했다. 쿠프랭은 17~18세기에 활동했던 프랑스 바로크 음악의 대가인데, 라벨은 그의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전주곡, 푸가, 포를라느, 미뉴에트, 리고동, 토카타 등 6곡으로 되어 있다. 각 악장의 제목은 대부분 춤곡을 뜻하는데, 포를라느는 이탈리아 민속 무용이고, 리고동은 남프랑스 지방의 춤곡이다. 그는 1932년에 택시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건강은 악화하였고, 이듬해에 수술을 계속 받았지만 끝내 심각한 뇌 질환을 겪다가 1937년 62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다른 이를 향한 마음이 가득 담긴 곡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라벨은 스페인의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를 작곡한다. 1899년에 피아노를 위한 독주곡으로 작곡된 곡은 1910년에 관현악으로 편곡된다. 이 작품은 M.19 (작품번호 19)인데, 라벨의 작품은 그의 작품 목록을 정리한 프랑스 음악학자 마르셀 마낫(Marcel marnot)의 이니셜을 따서 ‘M’으로 표기한다.
전체 연주 시간은 보통 7분 정도 걸리고 듣기 편한 곡이다. 본인이 뛰어난 피아니스트라서 고난도의 테크닉 곡을 많이 작곡했는데, 다른 피아노 작품들에 비하면 연주 기법적인 문제가 심각하진 않다. 다만 곡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기 위해 미묘한 뉘앙스 표현과 7화음, 9화음 등의 대담한 화성 진행에 유의해 연주해야 한다. 처음엔 사장조로 시작하며 주제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며 새로운 주제가 들어가는 A-B-A-C-A의 론도형식을 따르고 있다. 빵과 빵 사이에 다양한 식재료가 들어가는 샌드위치처럼 주제가 사이사이 반복된다. 초연은 1902년 4월 5일에 그의 친한 친구인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녜스가 맡았다. 영화배우나 감독들이 개봉 후 첫 평가에 민감하듯이 작곡자와 연주자 모두 초연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는데, 다행히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얻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형식이 빈약하고 스승인 샤브리에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며 싫어했다고 한다. 10년 뒤에 발표된 관현악 버전에는 플루트 2대, 오보에, 클라리넷 2대, 바순 2대, 호른 2대, 하프, 제1·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등이 쓰였다. 주요 멜로디를 연주하는 목관 악기의 음색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벨라스케스, 손재주 덕에 국왕의 초상화까지 그리게 된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태어났지만, 마드리드로 건너와 탁월한 그림 실력과 왕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펠리페 4세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평생 궁정의 초상화 화가로 활동한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사실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프랑스의 마네 역시 그를 좋아했다.
1650년대에 벨라스케스의 능력은 절정에 달해 <펠리페 4세 일가(시녀들)(1656경)> 라는 걸작을 그려냈다. 구조와 원근법적 체계에도 해박했던 벨라스케스는 특유의 세심한 터치로 왕녀 마가레타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그림 속에는 화가의 작업실에서 시녀들을 거느린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가 보이며, 아버지 펠리페 4세와 어머니 마리아나 여왕의 모습이 거울 속에 보인다. 어머니 마리아나 여왕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계로,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두 번째 왕비다, 마르가리타 공주는 둘 사이에서 낳은 첫 자녀다. 당시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력은 대단했으며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나눠서 통치했는데,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지키며 정통성을 고수하기 위해 다른 혈육이 아닌 같은 가문 사람들끼리 근친혼을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펠리페 4세의 딸인 왕녀 마가레타는 당시의 풍속에 따라 외삼촌 격인 사촌 레오폴드 1세 로마 황제와 근친혼을 하게 되고, 스페인을 떠나 오스트리아에서 살게 된다. 결혼 전 멀리 있는 레오폴드 1세에게 마가레타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왕녀의 그림은 아주 필요했다.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7년의 짧은 결혼 생활을 끝으로 그녀는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스페인에서 시집와 오스트리아 황실 궁인 호프부르크 궁에서 자녀들을 키웠으며 세상을 떠난 후에는 빈(Wien) 황실 묘지에 묻혔다. 스페인의 공주지만 오스트리아 빈에서 그녀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는 이유다.
벨라스케스는 공주의 아버지인 펠리페 4세와 아주 친밀한 관계였고, 마치 자기 딸을 바라보는 듯한 마음으로 그녀의 슬픈 감정까지 잘 포착해 그림을 그렸다. 왕녀라지만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에서 너무 일찍 찾아온 죽음(22세에 죽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궁정화가인 벨라스케스는 공주가 아주 어렸던 두 살 때부터, 네 살, 다섯 살, 여덟 살 때 모습을 연이어 그렸고, 다른 화가들이 그린 그녀의 모습이 초상화로 빈 미술사 박물관을 비롯해 유럽의 여러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특히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서 소장한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시녀들(Las Meninas)>이 가장 유명하다. <시녀들>에 나온 드레스와 <흰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에 그려진 드레스가 비슷한 걸 보면, 두 그림 모두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의 유년기 초상화는 빈 미술사 박물관의 회화갤러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https://youtu.be/XBgJ3bAdXEg?si=VdSqtKriV1L9BC5R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피아노 독주 버전)
https://youtu.be/DVtNt-6OTM8?si=ra94TmNN-OjiyXET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오케스트라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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