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의 영웅 스메타나
자연만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 또 있을까? 무더운 여름을 피해 시원한 바다에 가고 싶다면, 바다에서 흥을 돋워줄 음악과 함께 해보자. 예술가들에겐 바다의 출렁이는 파도가 마음을 이끌었다. 바다가 아니라면 강도 좋다. 고즈넉한 호수도, 잔잔한 물결이 치는 강도, 파도라 넘실대는 바다도,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시원함이 함께 한다. 체코의 야경이 떠오르며 블타바 강을 묘사하는 체코 작곡가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블타바>와 강렬한 남미 리듬이 살아있는 마르퀴즈의 <단존> 그리고 호아킨 소로야의 바다를 즐겨보자.
유난히 물을 좋아하는 나는 여름이면 무조건 바다로 향한다. 그리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해변가를 신나게 달린 후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로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어른도 여름이면 바다가 그리운데 아이들에게 여름이란 무조건 신나게 놀고 싶은 계절일 것이다. 애나 어른이나 모두에게 여름은 그렇게 푸릇푸릇하게 생동감이 넘치는 시간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감사하며 그 순간의 감각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천혜의 자연을 가장 잘 누리는 방법이 아닐까? 체코 작곡가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을 듣다 보면 뭔가 가슴 속에 답답한 심정들이 뻥 뚫리는 시원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낯선 이름의 작곡가 베드리히 스메타나(Bedrich Smetana, 1824-1884)에 대해 알아보자. 보통 클래식 작곡가라고 하면 바흐, 베토벤, 슈만, 브람스 등이 탄생한 독일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등이 탄생한 오스트리아가 생각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지형상으로 유럽 대륙 한가운데에 위아래로 나란히 위치해있는데, 체코는 독일의 오른쪽에 위치하면서 사방으로 다른 나라와 인접해 있다. 남쪽은 오스트리아, 남동쪽은 슬로바키아, 북동쪽은 폴란드와 닿아 있으니, 국가의 고유성을 지니는데 적잖이 어려움이 많았던 나라다. 예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불렸지만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면서 체코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체코는 보헤미아(체히), 모라바, 실레시아(슬레스코) 세 지방으로 나뉘는데, 체코라는 이름은 보헤미아의 체코어 표기인 '체히'(Čechy)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체코의 역사를 살펴보면 1918년 독립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고, 2차 세계대전 전 나치(Nazi) 독일이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1918년부터 1993년까지는 체코슬로바키아로 존재했다. 필자는 1995년에 처음 체코를 방문했는데, 그때만 해도 분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가 조금 어수선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야경이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동양인 관광객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아서 낯설었다.
체코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다 보면 왜 이 나라가 그토록 독립을 염원하며 민족주의 정신에 불타올랐을지 이해가 된다. 19세기 열강의 지배 아래 있던 다른 나라들이 독립을 열망하자 체코도 이에 합세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 바로 오늘의 주인공 스메타나가 있다. 스메타나는 1848년 2월 혁명에 의용군으로 가담했고, 1866년에는 작가들과 함께 민족 오페라 <팔려간 신부>를 체코어로 작곡하는 등 민족문화운동의 선두에 나선다. 당시 체코는 클래식의 변방이었지만 체코 작곡가하면 떠오르는 드보르자크(1841-1904)가 탄생하기까지 스메타나가 체코 음악에 남긴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작곡가 스메타나가 없었다면 교향곡 <신세계로부터>의 작곡가인 드보르자크도 없었을 것이다.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는 무려 17살 차이가 나는데, 독일의 슈만(1810-1856)과 브람스(1833-1897)처럼 나이 차이는 꽤 많이 나지만 서로 음악적 영향을 주고받은 관계다. 체코 사람들은 국민 작곡가하면 드보르자크보다 스메타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스메타나의 아버지는 맥주 양조 기사이자 아마추어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일찍부터 아들의 음악적인 능력을 알아봤다. 음악을 사랑하는 아버지 덕에 그는 수도원 학교에서 다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고 19살이 되던 해에는 프라하 음악원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요제프 프로크슈(1794-1864)에게 음악을 배웠다. 스메타나의 아버지도 모차르트의 아버지 못지않게 아들에 대한 음악적 헌신이 컸던 사람이었다. 스메타나는 음악에 대한 야심이 컸던 청년이었고 “하느님의 힘을 빌려 언젠가 나는 연주 기술면에서는 리스트, 작곡면에서는 모차르트가 될 것이다.” 라며 결심했다. 그는 22세가 될 때인 1846년에 베를리오즈, 슈만과 클라라(슈만의 부인이자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리스트가 프라하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만나는 행운을 거머쥐게 된다. 어린 나이에 자신이 멘토로 여기는 음악가들을 만나고자 용기를 냈던 그의 대범한 면모를 볼 수 있는 사건이다. 리스트는 그를 위해 피아노 소품집을 출판해 줄 출판사를 소개해 주었고, 심지어 스메타나가 자신의 사립 학교를 세울 때도 큰 도움을 준다. 역시 좋은 인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하다. 천하의 리스트가 도와줄 정도이니 스메타나의 음악적 역량이 어땠을지 충분히 상상된다.
1849년 8월 29일에는 오랜 연인인 피아니스트 카타르지나와 결혼하여 네 딸을 낳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딸 4명 중 3명이 어릴 때 죽고, 얼마 후 부인도 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이 슬픔을 달래기 위해 바이마르와 라이프치히를 여행했는데, 1848년 반(反) 오스트리아 혁명에 가담할 때부터 바그너의 음악에 빠져있다가 바이마르 여행 이후 대규모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며 민족주의 내용을 담은 교향시를 작곡해 낸다. 그가 작곡한 교향시는 모두 전쟁과 관련된 곡이었지만 특별히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첫 번째 부인이 죽은 뒤에 재혼을 했지만 두 번째 부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고국을 잃고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연달아 잃은 그에게 삶의 의지는 거의 없었다. 스메타나는 혁명에 가담한 죄와 함께 음악가로서의 입지도 다지지 못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결국 1856년 정치적 이유로 고국을 떠나 스웨덴에서 생활하다가 1861년 다시 프라하로 돌아와 민족운동에 앞장선다. 그때부터 체코 필하모닉의 지휘자와 음악협회의 음악부회장을 맡으며 체코 임시 극장의 초대 지휘자로도 활동했고, 1866년에는 문인들과 함께 민족 오페라 <팔려간 신부>를 체코어로 작곡하는 등 민족문화운동의 선두에 서게 된다.
“내 귀는 이제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 나라를 위해 이 작품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스메타나가 역작 <나의 조국>을 작곡하면서 했던 말이다. 50세가 된 스메타나는 6년여에 걸쳐 교향시 <나의 조국(1874-1880)>을 작곡하게 된다. 이 곡을 작곡했던 1874년에는 그가 이미 매독과 귓병으로 청력을 잃었다. 스메타나는 베토벤만큼이나 인생의 좌절과 고통이 많았던 작곡가다.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은 그의 작품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인정받는다. 교향시(symphonic poem)란 교향곡처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데, 차이가 있다면 단악장 형식이라는 것이다. 교향시는 음악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라서 음악 외적인 이야기나 묘사가 가득하고, 시, 소설이나 회화 등이 소재가 된다. 교향시 〈나의 조국〉은 ‘뷔세흐라트’, ‘블타바’, ‘샤르카’, ‘보헤미아의 숲과 초원에서’, ‘타보르’, ‘블라니크’ 등 모두 6곡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의 곡은 <나의 조국>이라는 제목으로 묶여있지만 독립된 6곡의 교향시 개념이다. 그중 두 번째 곡이 가장 유명하다. 곡의 제목은 몰라도 멜로디는 여러 매체에 등장했거나 광고 음악으로 자주 쓰여 귀에 익숙하다. ‘블타바’라는 제목은 일반적으로 ‘몰다우(Die Moldau)’라고도 불리는데, 이 단어는 독일어로 체코 사람들은 이렇게 불리는 것을 꺼려한다. ‘블타바’를 들어보면 작은 물줄기를 표현하듯 목관악기 플루트와 클라리넷의 연주가 조용하게 시작되었다가 점점 커다란 물줄기가 된 듯이 관현악 연주로 주제 선율이 연주된다.
“이 곡은 작은 두 샘에서 시작되었고, 차가운 강과 따뜻한 강의 두 줄기가 하나로 모여 숲과 나무들을 지나 농부의 결혼식, 밤에 달빛을 받으며 춤을 추는 인어들과 함께, 주변에 바위가 있고 가운데 솟은 성과 궁전과 폐허를 지나가는 블타바 강의 흐름을 나타내었다. 블타바는 성 요한의 급류에서 소용돌이치다가 프라하를 향해 잔잔히 흘러가며 뷔세흐라트 성을 지나 저 멀리 라베 강과 합류하며 장엄하게 사라진다.”
작곡가 본인이 이 곡에 대해 묘사한 글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펼치려 노력했던 스메타나는 성병과 그로 인한 난청 그리고 정신병까지 겹쳐 불우한 만년을 보냈지만 체코 음악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훌륭한 작곡가다. 체코에서는 스메타나의 음악적 영광을 기리기 위해 스메타나 콩쿠르를 열고 있다. 1879년에는 그의 생애를 담은 작품인 현악 4중주 1번 〈나의 생애로부터〉를 작곡했고, 그 후 현악 4중주 2번도 작곡했다. 1884년, 그는 정신병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그는 “예술적인 사상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사람만이 완전한 인간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체코가 민주화에 성공한 1990년에 최초로 프라하의 봄 축제의 개막식 전야제 행사로 ‘프라하의 봄’ 콘서트가 열렸을 때, 체코의 명지휘자 라파엘 쿠벨릭(1914-1996)이 42년의 망명 끝에 76세의 나이로 고국으로 돌아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블타바>를 연주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체코인들은 한 마음이 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프라하의 봄’ 축제는 스메타나가 세상과 이별했던 5월 12일에 막을 올리고 6월 초까지 계속되는데, 언제나 개막식에는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6곡 전곡이 모두 연주된다. 매해 같은 음악이 연주되지만, 체코인들에는 언제 들어도 코끝을 찡하게 만들며 심장을 움직이는 음악이다. 체코에서 울리는 <나의 조국>은 흡사 우리나라의 <아리랑>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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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etana: Má Vlast, No. 2. Vltava (River Moldau) - Daniel Barenboim, Wiener Philharmoniker
스메타나-나의 조국 중 <블타바(몰다우 강)>, 지휘-다니엘 바렌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