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스키코르사코프 그리고 루벤스와 고갱
무소륵스키와 함께 러시아 5인조 활동을 했던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도 본업이 따로 있었던 작곡가였다. 그 역시 처음부터 음악가가 되려 했던 것은 아니고, 해군 장교의 꿈을 품고 해군 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도 무소륵스키처럼 귀족 집안의 자식이었다. 그는 바다 근무를 하면서 떠오르는 악상을 가지고 작곡을 하기 시작했고, 음악가로서의 꿈을 펼쳤다. 이렇듯 작곡가들은 평범한 일상에서도 자신만의 음악적 상상력을 발동시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창의적인 인간이다. 작곡가 발라키레프(1837~1910)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바다에 나가지 않고 육지에 있는 시간에는 항상 음악을 가르쳐줬는데, 발라키레프의 응원과 격려 속에서 음악 실력을 키웠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27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음악원 교수로 임명된다. 그는 스스로 음악 경험이 부족한 것을 느꼈기에 교수로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화성학과 대위법을 공부했다. 현재의 위치에 안위하지 않고 자신을 채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진정한 N잡러다. 그는 늦은 출발의 음악가였지만 러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교향곡을 썼고 교향시와 오페라 작곡에도 열심이었다. 무소륵스키가 보다 5살 아래인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81년 그의 작품을 출판하고 정리했는데, 특히 직접 편곡한 무소륵스키의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은 원곡보다 더 널리 연주된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 중에는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등 러시아 음악사에 큰 업적을 남긴 굵직한 인물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다. 1905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정치적 관점이 학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직당했지만, 동료 교수들이 이에 반발해 다시 복직되었다. 동료들 사이에서 신임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관현악 모음곡 〈셰에라자드〉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1888년에 작곡했다. 셰에라자드는 도시라는 뜻의 ‘셰에라’와 태어난다는 뜻의‘ 자드’가 합쳐진 페르시아 말로, 도시에서 태어난 소녀라는 뜻이다. 아내에게 배신을 당한 왕이 온 나라의 여자를 데려다가 하룻밤을 보낸 후 죽이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지혜로운 여인 셰에라자드는 날마다 재미난 이야기를 해서 천일을 넘기고 결국 왕의 화를 사랑으로 변모시킨다. 어린 시절 읽었던 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인공이 바로 이 셰에라자드다. 조금은 무시무시한 이야기지만 셰에라자드의 지혜와 재치로 행복한 결말을 맺는 줄거리다. 모음곡 〈셰에라자드〉는 전체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선율이 굉장히 비슷하다. 1악장 <바다와 신드바드의 배>는 처음에 ‘라르고 에 마에스토소’(아주 느리고 장중하게), 아주 웅장하고 무섭게 시작을 한다. 그리고 템포(빠르기)가 더 느려지면서 유혹적인 선율로 바뀐다. 서주에서 두 가지 주제가 등장하는데, 굉장히 반대되는 선율이다. 첫머리에 제시되는 위압적인 금관 주제는 샤리아르 왕을,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처연하고 애소하는 듯한 선율은 셰에라자드를 묘사한 것이다. 이 두 주제는 전곡에 걸쳐 등장한다. 2악장 <칼렌다 왕자의 이야기>는 서주에서 독주 바이올린이 셰에라자드의 주제를 연주한 뒤 목관악기 바순이 탁발승 왕자의 주제를 연주한다. ‘칼렌다’는 이슬람의 탁발승을 말한다. 3악장 <젊은 왕자와 젊은 공주>에서는 바이올린이나 비올라, 첼로 등의 현악기가 자주 등장해 줄을 타고 움직이는 활의 움직임처럼 관능적인 선율이 샤리아르 왕과 셰에라자드의 사랑을 묘사한다. 4악장 <바그다드의 축제-바다-난파-종결>은 지금까지 등장했던 1, 2, 3악장의 주제가 총집합해서 성대한 축제를 벌이듯 연주된다. 바다에서 신드바드의 배가 난파되고 다시 파도가 잠잠해지면서 음악이 조용하게 끝나는 구성이다. 많은 곡들의 마지막이 크고 웅장하게 빨라지면서 끝나지만 이 곡은 정반대인 것이다. 환상적이고 마법 같은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유럽의 유명 미술관에 가면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작품 중 하나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 1640)의 그림이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루벤스가 그린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중 <마르세유에서의 하선>을 보고서는 그림이 주는 압도감에 한참을 멈춰 서서 쳐다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루벤스는 대부분 큰 화폭의 그림을 그렸으며, 왕이나 귀족 등 부유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작품으로 남겼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플랑드르 화가다. 플랑드르는 지금의 벨기에 북부지방을 말하는데, 원래는 네덜란드의 남부 지역이었지만 네덜란드와는 엄연히 다른 화풍을 간직했다. 대부분 플랑드르 화가들이 조그만 작품을 그렸던 것에 비해 그는 대규모의 캔버스에 작품을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 중에 거장 루벤스를 빼놓을 수 없는데, 그는 초상화 뿐만 아니라 신화나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역사화, 그리고 반종교 개혁적인 세 폭 제단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굉장히 관능적이고 화려한 화풍을 가진 그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인문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그림에도 탁월한 실력을 드러냈다. 어릴 때부터 귀족 사회 문화에 익숙하게 성장하면서 라틴어를 비롯해 인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양 문화의 보고인 이탈리아에서 8년 동안 머물면서 르네상스 미술을 연구했고,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인 카라바조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만토바의 공작에게 인정받았다. 그 덕에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스페인 여행을 하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1609년에 플랑드르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했다. 명문가의 딸과 결혼하면서 명성은 더욱더 높아졌고, 여유롭고 우아한 품성 덕에 주변에 많은 제자들을 두고 유럽의 각국 왕실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왕과 귀족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예술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화가다. 왕들은 앞다투어 루벤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주문했는데, 마리 드 메디치의 일생을 묘사한 24개의 연작이 아주 유명하다. 프랑스의 왕 앙리 4세 부인이었던 마리 드 메디치는 자신의 출생부터 당시의 모습까지 특별했던 사건을 신화처럼 멋있게 그려줄 화가가 필요했는데, 루벤스는 거기에 아주 적합한 화가였다. 특히 160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공주 마리드 메디치가 마르세유 항구의 배에서 하선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을 보기 위해 루브르로 몰려드는 사람은 꽤 많다. 루벤스는 주문하는 사람이 원하는 그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보다는 주문자의 의도를 잘 읽어내서 만족할 만한 그림을 그렸다.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외교의 본질이 아닐까?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화가일 뿐만 아니라 문화외교의 선봉자로서 배울 점이 많은 화가다.
플랑드르에 루벤스가 있다면 프랑스의 고갱 역시 여러 직업을 가진 화가였다. 고흐와의 친분으로 유명한 화가 폴 고갱은 신문기자였던 아버지가 페루에서 신문사를 차리기를 원해 이주하는데, 불행히도 아버지가 페루로 가는 배 안에서 죽게 되자 고갱의 어린 시절은 매우 어려웠다. 생활고에 힘들었던 그의 가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가정 형편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고, 도선사가 되어 세계 전역을 돌아다니다 인도 항해 중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1872년부터는 선원 생활을 접고 증권거래소에 취직한다. 이듬해인 1873년에는 덴마크 여성인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고 둘 사이에 5명의 아이를 낳으며 윤택하게 살게 되면서 그림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다. 미술품 수집으로 시작했던 그림에 관한 관심은 직접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 직업으로 변화를 유도했다. 프랑스 주식시장의 붕괴와 고갱의 화가에 대한 야망이 합쳐지면서 그는 전업 화가로서 변모하고 가정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자주 보냈다. 자연스럽게 부인과의 사이는 멀어지고, 결국엔 남프랑스 아를에 있는 고흐의 노란 집에서 같이 살며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그의 방황은 멈추지 않았고, 고흐와는 점차 다른 화풍을 발견하면서 문명을 뒤로 한 채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떠난다. 타히티에서 처음은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 덕에 고갱은 많은 희망과 꿈을 꿨지만, 점차 가난과 빈곤, 고독에 시달려 가기 시작했다. 긴 가난과 외로움은 그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고갱은 파리에서 자기 작품을 알리기 위해 여러 작업을 시도했지만 여의찮았고, 1895년 다시 남태평양으로 향했고 타히티의 파페에떼에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완성한다. 고갱의 삶도 고흐의 삶만큼이나 만만치 않았다. 여러 직업을 병행하며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자 노력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언제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만은 아님을 알게 해주는 씁쓸한 인생의 한 모습이 비치기도 한다.
본업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예술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노력했던 N잡러의 작곡가와 화가를 만나봤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성공적으로 잘 잡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했던 경우도 있다. 고갱의 마지막 작품처럼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인생이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의 소리에 집중해서 순간을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아낸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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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MP9kEJS2Ho?si=Re6pqiMx1Xkdxrfg
Rimsky Korsakov: Scheherazade / Maestro: Valery Gergiev· Vienna Philharmonic
림스키코르사코프-세헤라자데
I. Largo e maestoso – Allegro non troppo
II. Lento – Andantino – Allegro molto – Vivace scherzando
III. Andantino quasi allegretto
IV. Allegro molto – Vivo – Allegro non troppo e maesto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