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돌이킬 수 없는

by Quat


희수는 카페 문을 열기 전, 한 박자 멈춰 섰다. “도와줄게.” 며칠 전 그렇게 말은 했지만, 지금도 그게 맞는 선택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후 3시 반, 조용한 재즈가 배경음처럼 깔려 있었다. 가게는 한산했고, 창가에 앉아 있는 영수가 눈에 들어왔다. 회색 후드티에 검은 슬랙스. 고개는 숙여져 있었고, 테이블 위엔 노트북과 종이 뭉치, 그리고 반쯤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주문을 하고 나서 희수가 의자에 앉자, 영수는 그가 온 지도 몰랐는지 노트북에 박혀 있던 시선을 돌리고 나서는 피식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그냥 입꼬리만 올라간 인사 같은 거였다.

“왔네.”

“응.”

영수는 곧바로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그 안에는 텍스트 문서가 하나 열려 있었고, 제목엔 <폐가 실시간 라이브 – 희수 질문 스크립트>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 너 혼자 다 쓴 거야?” 희수의 말에 영수는 아까보다 좀 더 크게 미소를 짓는다.

“응. 며칠 동안 정리했어. 너는 이 질문들만 해주면 돼. 음성은 따로 안 들어갈 거니까, 그냥 밖에서 대화하듯이. 내가 안에 있고, 넌 카메라 밖에 있고.”






곧이어 그는 희수에게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이 몇 장을 건넨다. 희수는 말없이 종이를 들고서 프린트되어 있는 글자들을 살핀다.
‘여기서부터는 즉흥으로’, ‘지금 뭔가 들린 것 같다고 말할 것’, ‘잠시 침묵’. 대사 사이사이마다 지나치게 촘촘한 계획과 강박적 흐름이 느껴졌다. 희수는 흡사 자신이 연극배우이고, 영수가 감독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로 세세하게 쓰인 각본이다. 새삼 영수가 이 정도로 꼼꼼한 녀석인지 몰랐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한 마음이 든다.

“진짜 이대로 할 거야?”

“응. 무조건 리얼하게 보여야 해. 중간에 끊기면 안 돼. 진짜처럼 느껴져야 한다. 말 그대로 ‘진짜처럼’.” 영수는 말을 마치고 기도하듯 손을 깍지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한다. 희수는 고개를 숙인 영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한쪽 다리는 떨고 있고 눈 밑은 어두웠으며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손톱 옆엔 뜯긴 자국도 보인다.

“너... 잠은 좀 자냐?”

“그럭저럭. 며칠째 영상 편집하다 보니까. 근데 신기하게, 막상 피곤하진 않아.”

영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그 말 끝에선 뭔가 비정상적으로 맑은 눈빛이 느껴졌다. 지쳐야 할 타이밍에 오히려 흥분해 있는, 어딘가로 점점 빠져들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영수야.” 희수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 이거...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위험할 수도 있어. 사람들한테 들키는 문제가 아니라, 네가 계속... 빠져드는 게 보여서 그래.”

영수는 희수를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그 눈빛에는 감사도, 반항도, 체념도 아닌 묘한 무표정이 있었다.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어.”

카페 밖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누군가는 강아지를 안고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노트북으로 과제를 하고 있었다. 그 일상적인 배경 속에서, 영수는 자신만의 무너진 세계를 정돈하듯이 대본을 정리하고 있었다. 희수는 창밖을 한 번 보고, 다시 영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내일 같이 가자.”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9화아직 아무도 모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