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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ED BUTTON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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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Oct 30. 2022

제3장. 꼰대

소설 RED BUTTON


 “팀장님, 이 대리 주말 이야기 들으셨어요? 완전 장난 아니던데요”

 아이코스를 쭈욱 빨아 땅기는데 박선주 차장이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이 여자는 어떻게 사람을 홀리는지, 남자 건 여자 건 박 차장에게 비밀 이야기를 술술 잘 털어놓는다. 나도 박 차장에게 시시콜콜 남편을 씹어댄 건, 박 차장이 비밀 이야기를 잘 털어댈 수 있게 리액션 크게 잘 받아주기 때문일 것이다. 뭐 박 차장이 여기저기 떠벌리는 나팔수지만 소문나서 문제 될 건 내가 조심히 입단속하면 될 문제인 것이다.

 “이정석 대리? 왜? 뭔데?”

 “아까 이 대리랑 저랑 같이 거래처 직원 만나서 식사하러 갔다 온 거 아시죠?”

 “아, 노아 코퍼레이션? 식사하러 갔다 온다고 한 거야?”

 그런 말을 들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지만, 맞장구를 쳐준다.

 “아, 언니도 참 밑에 사람 신경 좀 써요! 카악, 퉷!”

 아직 연초 담배를 피우는 박 차장은 가래가 많이 껴서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하필이면 볼멘소리를 하며 기분 나쁘게 침을 뱉는다. 넉살 좋은 박 차장은 가끔은 언니, 가끔은 팀장님, 가끔은 부장님, 기분에 따라 내 직급을 달리 부른다. 워낙 붙임성이 좋은 동생이라 그게 매력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미안, 미안, 알잖아, 요즘 남편 때문에 짜증 나 있어서 뭐에 집중을 잘 못 하는 거. 아까 너가 말할 때 다른 생각 하고 있었나 보네.”

 “언니는 그게 문제야. 집안 문제는 집안에 놓고 오시고, 회사 문제는 집에 들고 가지 마시고 좀! 언니!”

 “얘!, 쓸데없는 잔소리 그만하고, 이석정 대리가 뭐?”

 “아 맞다, 그게 있잖아요, 부장님. 이놈이 거래처 사람들 보내고 돌아오는데 커피 한잔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무슨 고민 있냐고 했더니, 조용한 데 가서 이야기하자고 하네요. 내심 심쿵했지 뭐야”

 “미쳤니? 걔 우리 사장하고도 붙어먹는 놈인데 어쩌려고”

 “에이, 언니. 뭐 어때요? 어깨 빨이 좋잖아요, 허벅지도 튼실하고. 뭐 한번 눕자면 뭐, 난 용의가 있어요”

 이게 아침부터 낮술을 했나? 담배에 너무 취했나? 왜 이런 헛소리를 하는지 좀 더 궁금해지기는 한다.

 “얘얘, 너 요즘 남편이랑 문제 있니?”

 “아이, 언니도 참 우리 벌써 몇 년째 의리로 살고 있잖아요, 의리!”

 “그래서 이 대리가 너를 좋아한다거나 아니면 연애를 해보자고 했다는 거야?”

 “그랬으면 오랜만에 연애 세포가 터졌겠지만, 그냥 뭐 연애 상담.”

 “싱겁기는…. 저번에 소개팅했다는 그 간호사 이야기야?”

 김 빠진다. 나한테도 연애 세포…. 그런 게 있었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는 재미없다. 좀 더 강하고 자극적인 것이 필요한 요즘이다.


 “아니, 참, 남자들이란…. 결혼 전에 이 여자 저 여자 경험한다더니, 글쎄 금요일에 클럽 갔는데 거기서 늘씬한 여자를 꼬셔서 동침했다는 거예요. 엉덩이가 복숭아 같다나? 미친놈. 근데 속궁합이 그렇게 잘 맞았다는데요. 그래서 원나잇으로 끝내기가 너무 아쉬워서 어떻게 진지하게 다가가 볼까 고민이라는 거예요. 아니 근데 뭐 나같이 한물간 아줌마한테 물어보냐 했더니, 걔가 굉장히 성숙한 여자라는 거예요. 자기보다 나이는 어린데 생각하는 게 너무 어른 같다나? 그래서 그냥 보통 젊은 여자 다루는 방식으로는 안 될 것 같다며 나한테 조언을 구한다는데…. 뭐?! 젊은 여자 다루는 방식으로는 안 돼?! 그럼 난 늙은 여자냐?! 진짜 한 대 쥐어박으려다 참았죠. 뭐. 대충 여자는 가방이다, 돈으로 우선을 처발라라. 반대로 말해줬지. 호호호, 열받아서”

 박 차장은 한참을 씩씩거리면서 말하고 있지만 박 차장이 뻐끔거릴 때마다 흩날리는 담뱃재만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풋, 그래도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동룐데 조언 좀 잘해주지. 엉덩이가 복숭아 같다잖니?”

 그래도 나는 마지못해 박 차장의 연설에 맞장구를 쳐준다.

 “됐어요. 방망이 그렇게 놀리다가 성병이나 걸리라고 저주나 퍼부어 줄래요.”

 “에휴, 그래도 이 대리는 MZ세대 아니냐? 요즘 뭐 선섹후사라는 말도 있잖아. 요즘 것들은 미리 자보고 사귈지 말지 결정한다며?”

 “에이, 언니! 원래 우리 세대도 나이트 있었잖아요. 원나잇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요즘 그게 공공연한 대세가 돼서 문제인 거지. 요즘 것들은 애 낳을 생각은 안 하고 그냥 그 짓거리만 할 생각 하니까 문제인 거지.”

 “얘,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요즘 애들 부동산 때문에 희망이 없잖니.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졌는데 애들이 무슨 결혼 하고 출산에 열정이 있겠니. 그런 거라도 즐겨야지. 그나마 어찌어찌 남녀관계가 유지될 거 아니냐?”

 “오, 웬일로 꼰대 부장님이 MZ세대 편을 드세요? 별일이네.”

 “뭐? 꼰대?”

 “에이, 농담 농담.”

 재떨이가 코앞에 있는데도 박 차장은 굳이 땅바닥에 꽁초를 던지고 하이힐로 지려 밟아 불씨를 끈다. 뭐가 그렇게 열이 뻗치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대리와 상상했던 썸을 타지 못해서? 자신을 나이 많은 여자라고 취급해서? 참, 아직도 박 차장은 열정적이다.     


 “부장님도 뿌리실래요?”

 박 차장이 사무실에 들어서기 전에 작은 향수병을 건네며 골초라는 쑥덕거림을 향기롭게 휘저으라고 한다. 끽연을 한다는 것은 여자로서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됐어, 나 골초인 거 회사 사람들이 다 아는데, 뭘 새삼스레”

 건넨 향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거절한다. 거짓 향기로 나의 모습을 감출 열정도 이젠 남아 있지 않다.

 자리에 앉으며 이석정 대리를 힐긋 쳐다본다. 넋이 나가 있는 눈빛이다. 핸드폰을 만지작만지작, 업무 컴퓨터의 화면도 업무를 위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회사에서도 젊은 여직원만 들어오면 이리 집적, 저리 집적…. 개인 생활의 풍문도 그냥 주색잡기뿐이고, 허구한 날 이 여자 사귀었다가, 저 여자 사귀었다가…. 그러니까 환갑을 넘긴 사장까지 상관없다며 찝쩍대지. 이 불쌍한 중생아, 이제는 제대로 된 짝을 찾고, 결혼도 하고, 단란한 가정을 좀 꾸려봐라, 속으로 잔소리를 해준다. 아니다, 너 같은 난봉꾼이 결혼이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 잔소리는 취소한다.

 나른한 오후다. 어느새 정점에서 기울어져서 등 뒤 통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볕이 모니터의 화면을 밝게 가려버린다. 하지만 상관없다. 지금 당장 할 일은 없다. 어차피 모니터를 봐 봐야, 밑에 애들 지적질이나 하고, 영화나 보고, 인터넷이나 뒤적거리겠지. 그냥 잠시 그렇게 햇살 가득한 모니터로 놔둔다. 스르륵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눈앞이 아른아른한다. 몽롱한 물체들이 내 주위를 감싼다. 몸이 붕 뜨기 시작한다. 흐릿한 잔상들이 여러 개의 픽셀로 나눠진다. 20만 픽셀, 400만 픽셀, 1,200만 픽셀, 80만 픽셀, 800만 픽셀…. 점점 빠르게 뒤엉킨다.

 .

 .

 .

 신 팀장님!

 저기 먼 곳, 초원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신 팀장님!”

 온 세상, 땅과 하늘에서 누가 나를 크게 부른다.

 “신 팀장!!”

 눈이 번쩍 떠진다. 유통물류팀 김신애 팀장이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아니, 신 팀장님은 집에서 밤늦게 주무세요? 맨날 이렇게 코를 고시네. 조용히 좀 주무시던가, 코 고는 소리에 일할 수가 없어요.”

 “어머, 미안해요. 내가 깜빡 잠이 들었나 보네”

 재수 없는 김 팀장에게 잔소리를 들으니 짜증이 밀려온다. 김 팀장은 학교 기수로 치자면 나보다는 선배지만, 재수로 한 기수 밀렸던 나와는 나이가 갑이다. 그녀는 멍청한 스타일이지만 사장한테 알랑방귀를 뀌어가며 신임을 얻고 급부상하여 현재 나와 같은 차기 사장 후보이기도 하다. 얄미운 성격답게 주말에 개인적으로 자기 남편을 데리고 사장과 함께 골프 라운딩을 하고, 사장 집에도 놀러 간다는 말이 들려오지만, 그렇게까지 아부를 떨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런 음흉한 뒷거래는 언제든지 실력으로 깨부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난 지금 이 재수 없는 인간 덕에 짜증이 치밀어 올라 있다. 끓어오르는 이 짜증을 그대로 표출해가며 저 인간이랑 왈가불가했다가는 더 모양이 빠질 게 분명하다. 우선 일하는 척이라도 하자. 마침 이럴 때 밑에 직원들에게 시켜놓은 일이 생각난다. 우선 업무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송대리, 저번에 말한 기획서 다 작성했어요?”

 “아네, 5대 거점 지역 외 협력업체 발굴 프로젝트 말씀하십니까?”

 모니터를 보며 열심히 타자를 치던 송시연 대리가 깜짝 놀라 뛰어오며 반문한다.

 “당연한 거 아니야? 꼭 두 번 말해야 해?”

 “아, 네…. 아직 다 완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도대체 말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못했다는 거예요? 여태껏 완성한 거라도 가져와 보세요”

 겨우 눌러놨던 짜증이 삐져나오기 시작한다. 송 대리가 안절부절못하지 못한다. 뒤적뒤적하며 한참을 찾더니 프린트를 해서 가지고 온다. 그런 모습이 보이면 나는 더욱 열이 뻗친다.

 “아니, 지금 이걸 기획서라고 작성한 거예요? 요지가 뭐예요 요지가?!”

 “팀장님, 아직 완성한 게 아니라서요….”

 송 대리가 어설픈 변명을 한다. 나에게 그런 건 용납되지 않는다.

 “아니, 완성을 아직 하지 못했더라도 어느 정도 방향성은 잡고 만들어야지, 도대체가 파운데이션이 이런데 어떻게 제대로 된 기획이 나오겠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회사는 열심히 하는 곳이 아니에요. 결과를 만들어야지 결과를!”

 이런 식으로 명언을 한 번씩 내뱉어 주는 상사가 있는 것도 송 대리에게는 복일 것이다. 나 때는 위에서 업무를 던져주면 알아서, 어떻게 해서라도 꾸역꾸역 해내곤 했다. 조언을 구하는 그것조차 사치였다.

 “아, 넵. 열심히 결과를 만들겠습니다”

 “오늘 퇴근 전까지 다시 완성해서 가지고 오세요”

 “팀장님, 근데 제가 지금 급히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요”

 “그럼 야근해야겠네!”

 아오, 당연히 시간을 쪼개서라도 해야지 이렇게 경망스럽게 상사의 입에서 야근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게 해야 하나…. 요즘 것들은 정말.

 “네, 팀장님. 오늘까지 마무리해서 메일로 보내 놓겠습니다”

 도대체가 요즘 애들은 열정이란 것이 없다. 일을 끝마치지 못했으면 당연히 오늘 내에 야근하던 밤을 새우던 끝내고 가야지, 워라벨이니, 뭐니, 6시만 '땡' 하면 눈치 보며 퇴근하기 바쁘고. 나 때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인데. 아니 또 ‘라떼’라고 하면 꼰대라고 할 테니까 나때라는 말은 취소하고…. 아니, 그래도 말이야 자기 업무는 그게 밤이 됐건, 새벽이 됐건, 주말이 됐건 끝내 놔야 하는 게 상식적으로 맞는 게 아닌가?….

 한참을 쏟아내고 났더니 송 대리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송시연 대리는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라서 표현을 잘하지는 않지만, 조용히 모니터를 보며 시무룩해 있는 것이 역력하다. 하지만 악역을 자처하는 것은 팀장의 숙명이다. 미안하긴 해도 당당해지자. 그래도 시무룩한 팀원의 사기를 올려줘야겠지? 그래, 좀 풀어주자. 채찍과 당근은 리더로서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카톡)신영자: 오늘 회식합시다.


 한참동안 숫자 4가 사라지지 않는다.


 (카톡)박선주: 좋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오랜만에 맛있는 것 좀 먹으러 가지요.

 (카톡)이석정: 죄송합니다. 오늘 일이 좀 있어서요.

 (카톡)박선주: 오 이 대리 오늘 데이트 있어요?

 (카톡)이석정: 아 차장님^^ 그렇습니다. ㅎㅎㅎ

 (카톡)박선주: 오, 추카추카, 아까 내가 말한 전략 잊지말고~ 가방가방

 (카톡)이석정: 아 가방~ 물론이죠ㅎㅎㅎ

 (카톡)신영자: 이희정 대리, 송시연 대리는 대답이 없는데?….


 박 차장이 일어나서 이희정 대리와 송시연 대리에게 카톡을 보라 언질을 주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남아있던 숫자 2가 곧 사라진다.


 (카톡)송시연: 참가하겠습니다.

 (카톡)이희정: 참가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회식이 성사됐다. 회식으로 회사 동료들끼리 한잔하며 팀워크를 다진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이건 불변의 진리다. 남편은 꼴도 보기 싫다. 늦게 들어갈 예정이다. 어차피 아이들은 학원에서 저녁까지 먹고 오니 일찍 들어가 봐야 남편 밥밖에 더 차리냐. 불그스름한 윤기가 흐르는 고등어에 향긋한 미나리무침, 거기에 소주를 달릴 생각을 하니 짜증으로 가득했던 머리가 사이다처럼 쏴 하게 터지며 벌써 군침이 돈다. 갑자기 기분도 좋아진다.     


“언니, 밑에 애들 자꾸 왜 이렇게 갈궈요?”

 눈이 이미 반쯤 풀린 박 차장의 혀는 옹알이하듯 꼬부라져 있다. 얘가 이 상태라는 것은 고삐가 많이 풀려 있다는 의미다. 이럴 때면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고 쏟아내기 시작한다. 좀 전에 송시연 대리한테 짜증을 좀 부렸다고 지가 무슨 정의의 사도인 마냥 조동아리를 또 놀리는 것이다. 고등어회는 그 알싸한 맛이 일품이지만 접시에 나오는 양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이다. 그 적은 양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우리는 벌써 이른 2차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먹태 집에서 맥주를 앞에 한 잔씩 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 송 대리는 1차가 끝나고 얼마 전부터 사려고 눈여겨보던 중고차를 보러 가야 한다며 눈에 띄는 핑계를 대며 주행량을 친 상태다.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좋은 소리를 못 하는 거야, 송 대리야. 넌 나한테 좀 찍힌 것 같다, 송대리!

 박 차장과 이희정 대리만 항상 끝까지 나를 지켜주는 것 같다. 박 차장은 결혼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아직 아이가 들어서지 않고 있고, 남편과는 의리로 살고 있다며 농담 식으로 항상 떠벌린다. 이희정 대리는 아이 둘을 키우고 있지만, 강남에 전세를 살며 자가를 마련하기 위해 진급과 수당에 굉장히 적극적이라 상사와의 이런 자리에 절대 빠지지 않는다. 이런 자리는 인사고과에 민감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고마운 녀석들.


 “내가 뭘 그렇게 갈궜니?”

 “언니, 오늘도 봐봐, 송 대리한테 그렇게 면박을 주면, 송 대리가 기분이 겁나게 나쁘겠지? 그러면 또 회사 때려치운다고 하고 기냥 나가는 거야. 나야 의리가 있어서 언니 곁을 지키지만 요즘 애들은 못 버텨요.”

 하긴 송대리 자리가 유별나게 많이 바뀐다. 이번 송 대리는 몇 개월이나 버틸까?

 “내가 뭐 틀린 소리 했어? 다 저 잘하라고 내가 알려주는 거 아니야?”

 그래도 내 딴에는 정신을 차리라고 한 소린데 박 차장의 훈계를 들으니 순간 열이 처오른다.

 “에휴, 언니 요즘 애들은요, 상전 모시듯 다뤄 줘야 해요. 언니처럼 하면 그냥 꼰대가 되부리는 거여!”

 박 차장이 선을 넘는다. 아무리 친한 동생이고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처 오른 열이 결국 뚜껑을 날려 버린다.

 “뭐? 꼰대? 너 아까 담배 피울 때도 꼰대라고. 그랬지?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나처럼 트인 사람이 무슨 꼰대야? 이것 봐봐, 편하니까 너도 이렇게 언니언니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아까 송 대리한테 미안해서 이렇게 회식도 하고 있고. 그리고 박 차장, 너 요즘 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스포츠 토토 하면서 일도 안 하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니 이 언니, 내 유일한 낙인 토토를 건드네. 언니 제발 좀 정신 좀 차려요, 지금 이렇게 강제로 회식하는 것도 꼰대인 거예요. 야, 이 대리, 우리 팀장님 꼰대냐 아니냐?”

 강제로 회식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의견을 묻고 진행했다. 그런데, 열심히 먹태를 뜯어 재끼던 이희정 대리의 손이 일격을 당한 듯 순간 멈춘다.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린다. 둘러댈 말을 찾고 있는 듯 눈알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얘 봐라, 고민을 하네.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 녀석들이 뒤에서 쑥덕이고 있었던 거야? 너 내가 진짜 꼰대 맞니? 이 대리, 솔직하게 말해봐”

 “아니, 저…. 그게….”

 “괜찮아, 술자리인데, 뭐 어때 편히 말해, 편히”

 솔직히 말해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왜냐면 나는 꼰대가 아닌 소통이 되는 사림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팀장님이 좀 무섭긴 하죠. 뭘 열심히 만들어서 가면 어떻게 준비했는지 과정은 생각 안 하시고, 팀장님 스타일에 안 맞는다 싶으면 결과가 뻔히 보인다며 부정적인 말로 시작해서, 폰트가 이게 뭐냐 느니, 논리적이지 않다느니, 자료는 확실히 조사한 게 맞냐느니 트집 잡기 바쁘시고…. 그리고 팀장님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실 때, 아, 그게 집에 일이 있는 건지는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느낌이 들 때는 버럭버럭도 잘하시는 것 같고….”

 이런 답변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밑에 사람한테 직접 듣고 나니 갑자기 술맛이 떨어진다. 더 이상 따져 묻지도 않았다. 다운된 기분에 우리는 맥주 한 잔씩만 더하고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나도 처음부터 그런 것 아니었다. 우리 서수진 사장님과 오랜 세월 함께 일해왔다. 강압적인 그녀를 닮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강강약약형 인간이 되기 위해서 직원들을 대변해서 사장님 앞에서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사장님이 원하시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성공시키기를 수도 없이 했다. 사장님을 모시고 골프장도 수도 없이 다녔다. 팀워크를 중시했고 밑에 들어오는 직원과 소통하려 회식도 잦게 가졌다. 당연히 팀으로 움직이니 지시할 일이 많았고, 또 피드백할 일도 많았다. 회사 일에 치중한 덕분에 남편과 아이들에게 소홀해졌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쌓여 꼰대가 되었다니…. 허탈하다.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인지 반문하며 깊은 나락으로 빠진다.

 집으로 더욱더 가기가 싫어진다. 다시 회사 사무실로 발길을 옮긴다. 불 꺼진 사무실에 앉아 지난날 나를 다시 돌아본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나는 필요 없는 존재였던 것인가? 그게 회사건 집이건 어디에서도, 그게 회사 동료건 남편이건 아이들이건 그 누구도 나를 환영해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박 차장의 취기 어린 조언이 다시 뇌리를 스친다.

 “언니, 제발 정신 좀 차려요”

 ‘나. 정신 놓고 산 적 없는데….’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고 싶지는 않다. 풀 열정도 남아있지 않다. 푼다고 해도 다시 엉킬 것 같다. 깨끗이 다시 시작하고 싶다.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싶다. 삶의 의미는 없다.

 얼마 전 거래처에서 선물 받은 실링 왁스 편지 봉투를 꺼내 본다.

 -마음 전하지 못한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이 실링 왁스로 밀봉해서 전달해 보세요, 디자인이 아름다워서 마음이 잘 전달될 거예요-

 남편과 아이들과 서 사장과 박 차장과 송 대리와 두 명의 이 대리에게 글을 남겨본다.

 ‘나 돌아갈래’

 편지 봉투에 나의 유서를 담는다. 라이터에 불을 붙이고 왁스를 녹여 편지 봉투에 빨간색 농을 떨어뜨린다. 그 빨간 원형 실링이 나를 다른 인생으로 바꿔줄 시작 버튼으로 보인다. 의미 없는 시신은 바다에 뿌려주길 바란다. 새로운 삶을 시작해줄 도구가 필요하다. 내 몸무게를 지탱해줄 딴딴한 줄을 찾아보았지만, 사무실에는 마땅한 것이 없다. 그러고 보니 내 원피스의 벨트가 딱 좋아 보인다. 환풍구에 빗겨 풀리지 않도록 그 벨트를 옭아맨다. 작은 발판으로 쓸만한 플라스틱 상자를 구해서 환풍구 밑 책상 위에 올려 뒀다. 그리고 나의 목에 벨트를 묶었다. 이제 모든 게 새롭게 시작된다.


 하나

 .

 둘

 .

 셋

 .

 나는 플라스틱 상자를 걷어찼다.

 .

 천천히 강하게 조여 온다.

 몽롱해진다.

 또 여러 개의 픽셀로 시선이 나눠진다. 1,000만 픽셀, 400만 픽셀, 200만 픽셀, 80만 픽셀, 10만 픽셀…. 서서히 감각이 무뎌진다.

 고통은 없다.

 평온하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 같다.

 .

 그 끝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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