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팀장, 좋은 아침!”
“깜짝이야, 네, 좋은 아침이에요! 오, 신 팀장님이 웬일로 이렇게 늦게 나왔어? 맨날 제일 일찍 출근하는 사람이? 근데 목소리가 밝네, 무슨 좋은 일 있어?”
신영자 팀장은 같은 여자로서 좀 수치스럽다. 책상에 쌓인 서류들과 잡동사니들은 도대체가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더럽지, 머리는 삼일에 한 번 감는지 덕지덕지할 때가 많고, 업무시간에 맨날 딴짓에, 오후가 되면 코를 골면서 낮잠을 즐기지 않나, 특히 옆에 있으면 담배 절은 냄새가 진동한다. 사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 관계에 있지만, 어떻게 저런 사람과 내가 경쟁하는지 수치스러울 뿐이다.
“김 팀장, 그래 보여? 하하하, 어제 박 차장하고 이 대리한테 꼰대라고 한 방 얻어맞고, 정신 차리고 살아 보려고.”
“네? 저는 그런 말 한 적이 없습니다!”
이석정 대리가 거울 보며 왁스 바른 머리를 고쳐 잡다 깜짝 놀라 대답한다.
“아, 이석정 대리 말고, 이희정 대리”
이상하다, 신 팀장 얼굴에 미소가 만연하다. 도대체 어제 저 영업관리팀은 어떤 회식을 했길래 짜증 왕 신 팀장 저렇게 기분이 좋은 거지?
“호호호, 나도 좀 자세히 알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신 팀장님이 이렇게 싱글벙글이야?”
“비밀~!”
신 팀장이 윙크를 날린다. 도대체 뭐야? 궁금한 건 잘 못 참는 성격인데 더 이상 물으면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아 우선 참아본다. 이따가 박 차장한테 좀 물어봐야겠다. 우선은 오늘 할 일이 많으니 궁금증은 저기로 미뤄 놓는다.
-오전 유통물류팀 미팅 및 결과 사장 보고.
-업무추진 결과서 정리.
-경영검토회의 자료 2/4분기 자료 수집 및 정리.
-예산 집행 2/4분기 자료 수집 및 정리.
-세입자 형광등 교체요청 타당성 검토.
-임장 결과 업로드.
-갭 투자 담보대출 신규 발굴.
회사 일과 개인 일이 거의 반반이다. 대략적인 계획을 적어놓고, 세부 계획안을 나의 소중한 다이어리 플래너에 적어 넣어야 한다. 계획은 세부적으로 세워야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시 난 팀장으로서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개인적인 투자 면에 있어서도 그렇게 투기하면 망할 거라고 하던 사람들은 이제 나를 우러러보며 부러워한다. 바로 갭 투자한 대치동의 아파트가 근 2년 세에 두 배 가까이 올라버린 것이다. 물론 세입자의 전세금과 은행의 대출이 2/3 이상 차지하지만, 나는 강남에 아파트 두 채를 소유하고 있는,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부자인 것이다. 오늘도 꽉 채운 하루를 보내려고 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Hard work always pays off, whatever you do!
“랑랑랑랑랑”
사장님의 다이렉트 콜이 유선 전화기에서 울린다.
“네! 사장님”
“김신애 팀장, 방으로 잠시 들어와요”
나는 우리 사장을 존경한다. 그녀는 대기업에서 말단으로 시작해서 홍콩지사에서 다년간 근무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했다. 기업이 커지면서 한국에서 따로 외주 할 회사가 필요했다. 우리 사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한국에 들어와 법인을 만들고 자신이 다니던 기업과 위탁 계약을 맺었다. 그게 지금 우리 회사의 창립이었다. 때론 불같이 화를 내지만,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하고, 업무를 진행하고, 확인한다. 그녀의 그 통찰력에 항상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서수진 사장과 같이 되는 게 나의 최종 목표다.
“네, 사장님 부르셨어요?”
“김 팀장, 이번에 KS INVESTMENT에서 견적 요청 들어온 프로젝트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따내면 좋을 것 같은데 혹시 타 업체와 경쟁이 심할까요?”
“일부 대기업들도 입찰에 참여하려는 것 같아”
“힘들 수도 있겠네요”
“김 팀장! 안된다고 생각하면 영원히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아, 제가 잠시 헛소리를 했네요. 네, 한번 해보시지요.”
“그래, 우선 예산은 최소한으로 잡고, 견적서 한번 만들어봐”
“우선 자재비용은 더 이상 네고가 힘드니, 인건비를 최대한 낮춰 잡겠습니다”
“오케이, 견적서 제출하기 전에 반드시 나한테 먼저 보여주고 진행해”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서 사장은 항상 말한다. 과정도 중요하지만, 회사는 항상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예산을 최대한 적게 잡자고 하면, 분명 일선에서는 불평불만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우선 건수를 잡아야, 지지고 볶고라도 하지. 이런저런 사정 다 들어주다가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이건 내가 여태껏 겪어오면서 배운 실전 경험이다.
“유통물류팀, 11시에 미팅 좀 합시다”
팀원들이 열심히 모니터를 보고 있지만, 뒤에다 대고 통보를 해준다.
“네….”
고형길 차장은 마지못해 대답하는 것 같다. 사사건건 시비 거는 녀석이다. 사리가 분별하고 꼼꼼하고 모든 일에 능수능란하지만, 정이 영 가지 않는다. 어떨 때는 누가 윗사람인지, 누가 아랫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그래도 대충대충 일 처리하는 김가현 대리나 책임 관계 따져 이익되는 일만 하려는 신황선 대리보다는 팀에 훨씬 도움이 되긴 한다. 나의 창창한 앞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자. 싫은 내색은 하지 말자.
‘어머, 난꽃이 피었네’
언제부턴가 공용 화장실 창문가에 난이 놓여 있다. 다른 사무실 누군가가 물 주고 물을 빼고 화분을 들고 다니기 귀찮아서 그런지, 아예 화장실에 놔둔 것 같다. 그 팽개쳐진 듯한 난에 나를 주목해주라 항의하듯 꽃이 핀 것이다.
‘참, 너는 아름답게 피어서 이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향기로움을 발산하는 기구한 운명이구나.’
꽃향기를 맡기 위해 좀 잡아당겼더니 어렵사리 핀 꽃이 ‘뚝’ 하고 떨어진다.
‘어머, 일을 저질렀네.’
키우던 사람이 들어오지 않을까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떨어진 꽃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요즘 투자해놓은 강남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서, 뭐 강남 부자 됐니 그렇게 짠돌이처럼 굴어서 아파트를 두 채나 가지고 있다느니, 말이 사사건건 나오는데 또 이런 사소한 일 가지고, 뭐 혼자 보려고 꽃을 땄느니 마느니, 말이 나오는 건 질색이다. 화장실에서 어렵게 핀 꽃에게는 미안하지만, 냅다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변기통에 아쉬운 운명의 꽃잎을 흘려보냈다.
‘미안해, 안녕….’
“팀장님, 11시가 넘었습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네, 유통물류팀 소회의실에 모입시다.”
떨어진 난꽃 때문에 정신이 없었는지 미팅 시간을 까맣게 잊었었다. 데리러 온 김가현 대리를 따라 소회의실로 들어선다. 역시 칼 같은 고형길 차장이 먼저 자리에 앉아 있다.
“신 황선 대리는?”
“아, 좀 전에 전화가 와서 잠시 전화받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신 대리 들어오면 시작하지.”
신 대리의 전화가 길어지는지 한참을 들오지 않고, 회의실에 앉은 세 명이 고요한 시간을 이겨내고 있었다. 침묵을 깨기 위해 밑에 직원의 근황을 묻기로 한다.
“김 대리는 저번에 이사해야 한다고 했잖아, 잘 알아보고 있어? 회사 가까이 원룸으로 알아본다고 한 것 같은데?”
“말도 마세요. 올 전세 원룸 겨우 찾았어요. 전세가 원체 있어야 말이죠. 그나마 유흥가에 잘 안 나가는 오피스텔 원룸 나온 게 있어서 겨우 잡았어요. 환경이 너무 안 좋은데, 전세니 그냥 계약하기로 했죠”
“거봐 규제하면 매물이 잠긴다니까, 풀어줘야 활성화가 되지. 어휴 정말 진짜 고생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모르고. 이번 정부는 정말 맘에 안 들어. 싹 갈아엎어야 해”
나는 이번 정부가 정말 부동산 정책에 있어서 생각이 있는 건지 의문이다. 강남에 쏟아지는 집중 규제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네, 그러니까요. 회사에서 좀 멀더라도 지금 사는 전세 아파트가 너무 좋은데, 계약 연장 권리를 주장하니 집주인이 직접 들어온다고 나가라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죠…. 그 주위에 전셋집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전세 매물도 없거니와, 있어도 이건 뭐 전셋값이 천정부지로 올랐으니….”
“아니, 그러니까, 전세 끼고 집 산다고 뭐 갭 투기니 머니 말이야! 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 이바지하고 임대 공급해서 주거환경을 좋게 하는 거지, 뭘 그게 투기라는 거야. 그런 사람들이 투자하니 전세 구하는 사람들이 싸게 구하는 거고, 서로서로 윈윈인데 말이야”
부동산 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열이 오른다. 하긴 그래도 이번 정부 덕에 내가 사놓은 아파트 두 채는 천정부지로 가격이 올랐다. 자산 가치로는 몇십 억대 부자로 만들어 주긴 했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팀장님, 그래도 어쨌든 간 그런 사람들이 자전거래하면서 아파트 가격이 많이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될는지….”
바른 소리 잘하는 고형길 차장이 한마디 한다. 그러니까 내가 그때 경기도로 이사하지 말고 무조건 힘들더라도 서울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말 안 듣더니 저런 소리 하는 것이다. 자기 집값 올랐어봐라. 저런 소리 하나.
“뭐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물론 부동산 가격이 올라서 집 사기는 좀 어려워졌지만 봐봐라, 경제가 부양되어서 지금 우리나라 잘 나가잖아. 이제 곧 선진국 요건에도 만족한다고 하고.”
“아니, 부장님…. 이제 근로소득으로 아파트를 살 수 있는 구조도 무너지고, 아빠 찬스 엄마 찬스 아니면 아파트를 살 수 있는 희망도 없어지고 양극화가 극대화되는데 그러면 지금 청년들이 무슨 꿈이 생기겠습니까? 봐 보세요? 결혼도 세계 꼴등, 출산도 세계 꼴등 그리고 2등과의 격차도 엄청나게 난답니다. 곧 우리나라는 소멸될 지경이에요. 사람이 같이 사는 공동체에서 서로 어느 정도 같은 수준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야지 집 있는 사람과 집 없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저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이제 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 차장이 잡아먹을 듯 달려든다. 꼭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마냥.
“아니, 아니, 고 차장. 뭐,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왜 이렇게 열을 내? 됐어,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서로 생각한 데로 살자고. 나 참.”
크게 대꾸하지 않았다. 서로 저런 논리로 이야기했다가는 우파 좌파 나누면서 정치색으로 미팅 분위기도 흐릿하게 망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거래처 전화가 좀 늦어져서요”
다행히 신황선 대리가 들어오면서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를 바로 잡아준다.
“네, 그럼 유통물류팀 미팅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번에 내가 조금 언급했던 KS INVESTMENT 프로젝트 건 있지요? 사장님이 견적서 좀 만들어보라고 합니다.”
“네에?, 와…. 그거 대기업들도 많이 들이댄다고 들었는데요. 저희가 견적서 내봐야 시간 낭비 아니겠습니까? 이미 내정됐다는 소리도 있고요.”
고 차장은 이미 그 프로젝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저렇게 너무 분석적이라서 부정적인 게 문제다. 사사건건 시비인 녀석 오늘도 또 시작이다.
“고 차장, 우선 사장님이 좀 밀어붙여 보자고 합니다. 우리가 대기업에 이길 수 있는 것이 뭐겠습니까? 바로 가격 경쟁력 아니겠습니까? 예산 최대한 적게 잡아서 견적서 만들어보지요.”
“팀장님, 아니…. 생각해보세요. 무턱대고 덤핑 해서 들어갔다가 덜컥 맡으면 손해까지는 아니겠지만, 직원들 고생할 거 모르세요? 특히 인력관리팀에서는 난리를 칠 건데….”
“고 차장!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이 뭐겠어? 맨날 그렇게 쉬운 일만 해서 어떻게 일할 거야? 우선 이익 나지 않더라도 연결 끈을 만들어놔야, 다음에 더 좋은 일을 또 잡을 거 아니야? 우선 힘들더라도 힘을 합쳐 한번 해보자.”
나도 생각 없는 건 아닌데 꼭 가르쳐 들려는 고 차장이 너무 맘에 들지 않는다.
“아, 네 뭐…. 팀장님이 뭐 그렇게 말씀하시니 따르긴 하겠습니다. 뭐부터 시작할까요?”
“그래, 그래, 고 차장 잘 생각했어. 저번에 내가 말했던 5대 거점 지역 외에 업체들 동향 파악해 보라고 했지?”
“그거 영업관리팀에서 저번에 조사하는 것 같던데요?, 자료를 달라고 해볼까요?”
눈치 없는 신황선 대리가 끼어든다. 이건 나의 실적에 중요한 일이다. 남의 팀 업적을 얹을 필요는 없다.
“그건 그 팀 일이고, 우리는 우리식으로 한번 조사를 해보자. 우선 고 차장은 다른 일로 바쁜 것 같고, 신 대리, 김 대리가 협력업체들에 연락 돌려보고, 거점 지역 외 업체들에 대해서 조사 좀 해봐.”
“구글링으로도 우선 검색해 보겠습니다.”
대충대충 김가현 대리가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것이 보인다. 요즘 것들은 정말….
“김 대리, 그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업체에 직접 연락 돌리세요”
“네….”
“고 차장은 신 대리랑 김 대리가 자료 가지고 오면, 그 업체들 대상으로 견적 좀 받아보고 예산 한번 짜 보자고.”
“네, 그래 보죠.”
영 떨떠름한 답변이다. 그래도 일 하나는 확실히 하니 좋게 좋게 끝내자고 다짐해본다.
“자 그럼, 더 질문 없지요? 오, 벌써 점심시간이네, 식사하러 갑시다. 오늘도 사장님이 같이 식사하시겠지? 좀 멀더라도 그 칼국숫집 갔으면 좋겠구먼, 호호호.”
배가 출출해진다. 회사는 작지만, 서울 중심가에 있어서 주위 맛집이 즐비한 게 좋다. 서울에는 전국에 맛있는 음식이 총망라해있다. 서울에 산다는 것이 정말 좋은 일이다. 그래서 서울 서울 하는 것 같다.
날씨가 쾌청하니 너무 좋다. 내 자리 뒤 유리 통창으로 빌딩 숲이 즐비하다. 빌딩 사이로 비추는 햇살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배꼽시계가 무진장 울리고 있어 사장님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다. 벌써 11시 45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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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오늘 약속 있으시답니다, 그냥 식사하러 가시지요.”
사장실에 결제받으러 다녀온 인력관리팀 박정구 대리가 공표한다.
‘아….’
“팀장님, 식사하러 가시죠.”
약삭빠른 신황선 대리가 나한테 붙는다.
“아니, 난 생각이 없어, 가서 식사들 하고 와요”
팀원들 데리고 가면 내가 또 사야 한다. 정말 아까운 돈이다.
“아, 김 팀장님! 밥값 내기 싫어서 그런 거죠?!”
넉살 좋은 영업관리팀 박선주 차장이 정곡을 찌른다. 쟤는 가끔 날 ‘언니’라고도 부른다. 신영자 팀장과 함께 골초다.
“아이, 무슨 소리야?!, 진짜 생각 없어서 그래, 박 차장도 얼른 가서 식사하고 오세요”
“아닌 것 같은데…. 음, 식사하고 돌아올 때 뭐라도 사다 드려요?”
“아아, 아냐, 아냐, 괜찮아.”
가끔 개념 없이 행동하지만, 박 차장은 밉상은 아니다.
“네, 식사하고 오겠습니다, 김 대리, 신대리 가자.”
고 차장이 희생양이 되어 팀원들을 데리고 간다. 고마워요. 고 차장….
텅 빈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자니 배가 더욱 텅 빈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기껏 점심값 때문에 배까지 곯아야 해? 그래 나가자, 나가서 나를 위한 선물을 주자. 얼마 전에 지나가다 보니 복집이 크게 문을 열었던데, 한번 가보자. 이제 점심시간도 끝나가고 사람도 많이 빠졌을 테니 혼자 가더라도 그렇게 피해 주지는 않겠지.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몇 분이세요?”
“네, 혼자예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빠지거든요”
혼자라는 말을 듣고 친절했던 점원의 말투가 뽀로통해진다. 뭐 상관은 없다. 남 눈치를 보며 살아온 인생이 아니다. 한 그릇에 이만 원에 육박하는 일 인분이지만,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는데도, 아직 식당은 북적북적한다. 참 활기차다. 이 생기 넘치는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다.
“저기 앉으세요, 뭐로 드릴까요?”
“지리탕 주세요”
“참복? 까치복?”
“참복으로 주세요”
나한테 선물을 주러 와서 가격 따져서 까치복을 먹을 순 없다. 참복으로 간다. 플라스틱 컵에 이슬 서린 차가운 생수를 따랐다. 생순데도 이 좋은 기분에 달게 느껴진다.
악착같이 살아왔다.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나서 오빠와 막냇동생 사이에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스스로 쟁취해야 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항상 노력해야 했다. 남을 배려할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가진 몫이 없는 나는, 너그럽게 배려해 줄 수 있는 몫이 거의 없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1년 만에 다시 복직했다. 아이는 그래도 집이 가까운 친정엄마가 키워줬다. 이사를 하며 재산을 최대한 불리려고 노력했다. 부동산에 대한 정보를 항상 접하고 있었다. 조금 무리해서 대출받고 전세를 끼고 집을 샀다. 서울 집값은 항상 우상향이었다. 집값이 올라갈수록 차익을 다시 투자해 집을 사고, 팔며 점점 서울 중심으로 이동했다. 아직은 전세와 대출이 많지만 결국, 강남과 서초에 내 명의로 집이 두 채다. 뿌듯하다. 이제 직장에서만 더 위로 올라가면 된다. 사장님도 날 신뢰하는 것 같다. 물론 신 팀장이 눈엣가시지만, 행색으로 보아 내가 선택될 것은 당연지사로 보인다.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수북한 콩나물과 미나리를 살짝 들춰보니 맑은 국물과 탱탱한 복 살이 푸짐하다. 어우, 국물 맛이 끝내준다. 시원하다. 나의 앞길도 이렇게 시원하게 펼쳐지길 기대해본다. 통통한 복 살이 입 안에서 녹는다. 텅 빈 배 속을 뜨끈하게 채워준다. 점심 식사를 따로 보낸 팀원들을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다. 그냥 한번 쏠 걸 그랬나? 들어가서 이따 나른 해 질 때 커피나 한 잔씩 돌려야겠다. 물론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고를 수 있는 커피의 가격은 이미 고정되어 있다.
뜨겁게 먹어서 그런지 식은땀이 흐른다. 조금 어지럽다. 정신이 약간 몽롱해지는 것 같다. 어, 뭐지? 갑자기 너무 어지럽다. 시야가 흐려졌다, 또렷해졌다, 반복이다.
300만 픽셀, 60만 픽셀, 800만 픽셀, 400만 픽셀, 1,000만 픽셀….
시야가 네모반듯하게 수도 없이 쪼개졌다, 합쳐졌다, 반복이다.
아….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물, 물, 물을 마시자….
어, 물까지 손을 뻗지 못하겠다.
아…. 복요리 사고 같다.….
앞날이 창창한데 이대로 죽기는 너무 아깝다,
안된다….
그런데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다….
난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