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둘이 티격태격하더니 같이 진급하셨네? 와, 진짜 앞으로 부사장 자리를 놓고 더욱 치열해지겠구나.’
방금 수신된 인사발령 이메일을 보며, 서로 또 으르렁대다 밑에 직원에 불똥 튀겠다고 생각을 한다. 뭐 우리 팀의 팀장님은 아니지만, 우리 팀 자체가 저 두 팀에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니, 서로 으스대려고 괜한 우리 팀을 고생시킬 것이라 예상해본다.
“김 이사님!, 식사하고 오셨습니까?”
“박 차장, 무슨 소리야? 잠시 은행 업무 좀 보고 왔어. 근데 이사라니 무슨 소리야?”
“메일 한번 봐 보세요. 이사대우 진급하셨어요. 방금 공지 떴어요.”
혼자 밖에서 식사하고 온 김신애 팀장님이 급하게 메일을 확인한다. 아까 식사하고 오는 길에 복요리 집에 혼자 앉아 있는 김 팀장님을 발견했다. 박선주 차장님은 들어가서 무안을 주려고 했지만, 나는 제발 장난치지 말라며 얼마나 무안해하시겠냐고 말렸다. 아까 분명 자기는 점심 식사 안 하겠다고 한 걸 나도 들었기 때문이다. 김신애 팀장이 얄밉기는 하지만 그래도 악의가 없는 사람이다. 자기 것만 챙기길 좋아하고 밑에 직원들에게는 배려나 베풂 또한 없지만 말이다. 가끔 멍청하게 일을 진행해서 밑에 사람들이 고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렇게 아등바등 사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출퇴근에 하루 네 시간씩 소비하고 있어서 서울 쪽으로 조금씩 이사해서 그 시간을 줄여보자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을 보며 포기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수요가 공급을 쫓아가지 못해 부동산 투기꾼들은 망하고 실수요자들이 원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렇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정반대로 흘렀고, 실수요자들은 더욱 집을 살 수 없는 환경이 돼버림은 물론이요, 투기꾼들은 승승장구했다. 그 투기꾼들 중심에 있는 김 팀장님을 괜히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왜 김 팀장님처럼 하지 못했을까 후회하기도 한다. 어쨌든 간 김 팀장님 같은 사람들도 세입자들에게 집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고, 집을 관리해주면서 서비스를 제공한다.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버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은 끼치고 있다.
“오, 사장님께서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이렇게 큰 선물을 주시다니, 호호호, 신영자 이사 축하해요”
“네, 고마워요. 김신애 이사도 축하해요. 앞으로 잘해봅시다”
김 팀장님은 굉장히 좋아한다. 신 팀장님도 크게 내색하지는 않지만 기뻐한다.
“진짜 두 분 모두 축하드려요. 이사님들, 이사 진급하셨으니 오늘 쏘셔야지요? 김 이사님은 혼자 복요리 드시지 마시고, 오늘 좀 거하게 쏘세요.”
박 차장님도 덩달아 흥분했는지 말실수를 한다.
“어머, 무슨 복요리를 먹었다고 그래?”
김 팀장님 얼굴이 빨개진다.
“에이, 이사님! 아까 걸어오다가 요 앞에 새로 생긴 복집에 혼자 앉아계신 거 봤어요, 주 과장이랑 같이 봤는데요, 하하하.”
아후, 박 차장님! 진짜! 나는 왜 끌어들이는 거야….
“주신영 과장 진짜 나 봤어?”
“아, 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김 팀장님이 얼마나 무안할까 걱정스럽다.
“아, 들켜버렸네, 호호호. 그래 혼자 복요리 먹고 정신 번쩍 들고 돌아왔더니 복이 통째로 굴러 들어왔네. 들어온 복은 서로 나눠야지. 그래, 오늘 내가 쏜다!”
“아, 역시 우리 김 이사님. 그럼 오늘은 김 이사님이 쏘시고, 내일은 신 이사님이 쏘시고 오케이?”
“호호호, 그러면 되겠다. 내가 오늘은 풀로 쏠게. 신 이사, 내일 오케이?”
“어, 뭐. 그러지, 뭐”
뭐야, 이 분위기? 역시 박 차장님은 분위기 메이커다. 가끔 배려 없이 우선 질러보는 것도 한 방법인 것 같다. 인력관리팀에서 사람들을 관리하지만, 아직도 인간관계라는 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식당이 왁자지껄, 시끌시끌하다. 김 팀장님과 신 팀장님이 많이 취해있다. 박 차장님은 이제 아예 반말로 언니언니 거린다. 이석정 대리는 사장님 팔짱을 끼고 연신 셀카 질이다. 저렇게 아무 여자에게나 찝쩍거리니 사장님하고 놀아난다고 소문이 나지. 하긴 뭐, 어찌 보면 나이 드신 사장님한테 얼마나 호감이 가겠냐마는, 이 대리 덕분에 사장님이 연신 싱글벙글하니까 썩 나쁜 결과는 아니다.
하하 호호 모두 웃고 떠들지만, 난 별로 즐길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편이 걱정이다. 요즘 들어 공황장애 증상이 심해지는 것 같다. 남편은 마음 편히 먹으라고 하지만, 이게 마음을 편히 먹는다고 될 일은 아니다. 지하철만 타면 갑자기 나타나는 증상이라…. 쌓아둔 일도 걱정이 된다. 사람을 관리하는 일이라 빨리빨리 처리해야 하지만, 요즘 들어 업무가 너무 늘어나는 게 큰 문제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조건은 많으나 그만큼 임금은 올리려 하지 않고, 힘든 일은 마다하는 분위기가 돼가면서 인력 끼워 맞추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과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한잔하세요.”
회사 다니며 그나마 마음이 맞는 이희정 대리가 내 앞의 빈 술잔에 소주를 한가득 따라준다.
“아니 뭐, 이것저것.”
“밖에 나왔으면 일 좀 떨어놓으세요. 맨날 그렇게 손에 붙들고 계세요?, 핸드폰 메일 좀 그만 보시고요.”
“어, 그래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희정 대리가 부럽다. 그녀가 육회를 버무리고 있는데, 딱 육회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거 드세요. 과장님 집값 많이 올랐죠? 저희도 애가 둘이잖아요. 이제 빌라는 좁아서 이사할까 생각 중인데, 걱정이에요.”
“우리 집? 몰라…. 서울 오른 만큼은 안 올랐을 거야, 워낙 변두리잖아.”
“에이, 제가 요즘 집 알아보느라 검색해봤거든요?, 거기도 많이 올랐던데요.”
“우리 집? 올라봐야 뭐 다른데 다 오르는데 똑같은 거지 뭐. 생각 있어? 우리 동네가 살긴 좋긴 좋지.”
우리 동네를 알아봤다는 말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아니요, 거긴 너무 멀어요. 그리고 저희 남편은 꼭 강남에 살아야 한대요. 지금은 시부모님 빌라에 얹혀살지만, 여기저기 서울권으로 청약 넣어보고 있어요. 뭐 집 살 때 시부모님이 안 보태 주시겠어요? 호호호.”
그래 맞다. 시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이다. 우리는 그 변두리라도 겨우겨우 아직도 은행이자 원금 갚아 나가고 있는데, 좁은 집에 살아도 집세 걱정 없이 사는 이희정 대리가 부럽다. 시부모님이 강남에 빌라 한 동을 가지고 계시는 것도 그렇고….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 혹시 부동산?”
술에 취한 김 팀장님이 끼어든다.
“아, 네. 이 대리가 좀 물어봐서요”
“에이! 이 대리, 주 과장 말 들어서 뭐 하게! 구석뺑이에 사는 사람한테! 주 과장! 거봐 내 말 들으라고 했잖아. 그 구석에 집 사놓고 이게 먼 고생이야.”
기분이 좋으신가 김 팀장님이 개가 돼 있다. 하지만 뭐 워낙 악의 없이 말하는 사람이다. 부동산 이야기가 나오면 입에 게같이 거품을 무는 것은 특징이다. 잠시 화장실 가겠다며 살짝 피해 쓰지도 않을 화장실로 피신한다.
화장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푸석하다. 파운데이션을 한 번 더 찍어 바른다. 사무실에 잠시 들어가야겠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있다. 그리고 회식 자리를 빨리 빠지기에도 좋은 핑곗거리다. 애들도 언제 오냐며 연신 전화가 온다. 집으로 한참을 가야 할 퇴근길, 남은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올라서야겠다.
“저 일이 좀 남아서 사무실에 좀 들어가 볼게요.”
“주 과장, 무슨 일을 그렇게 남겨서 해, 주 과장! 열심히만 해서는 안 돼, 알지? 결과야, 결과! 응?”
오랜만에 아랫것들이 추켜세워줘서 그런지 신 팀장님도 한껏 취해 역시 개가 돼 있다.
“네, 많이들 들고 들어가세요”
불 꺼진 사무실에 가만히 앉는다. 모니터의 불빛이 내 책상을 비춰준다. 어지럽게 쌓인 서류들, 모니터 빈자리를 채운 빼곡한 포스트잇, 그리고 가족사진…. 다 한 구석으로 치워버리며 책상에 그대로 엎드렸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출퇴근이 너무 힘들다. 언제까지 체력이 받쳐줄지 모르겠다. 꾸역꾸역 다니면 어느 정도까지는 진급할 수 있다. 하지만 재미가 없다. 산적한 일들…. 압박이 점점 심해진다. 내가 처리 못 하면, 내가 구인하지 못하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 걱정만 앞선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이들 보모님께 카톡이 온다. 아이들 동영상이다.
“엄마, 사랑해요”
말을 떠듬떠듬하는 둘째가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고 있다. 눈물이 흐른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모니터를 끄고 일어난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했다.
지하철 입구가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긴장되기 시작한다. 공황장애 예기불안 증상이다. 시간이 한참 늦었다. 남편이 기다린다. 아이들이 기다린다. 빨리 가야 한다. 하지만 불안증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지하철 플랫폼에 겨우 내려왔지만, 이렇게 있다가는 당장 죽을 것 같다. 다시 밖으로 나가야겠다. 갑자기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더욱 심하게 몰려온다. 여기서 죽을 순 없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죽으면 너무 비참할 것 같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
문득 생각난다. 플랫폼 SOS 버튼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저기, 저기 앞에 있다. 겨우 진정시키며 그 버튼 앞에 섰다. 하지만 누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의 약함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그 빨간 버튼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된다. 곧 몸을 가눌 수 있게 된다.
천천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사 밖으로 나와 아무 데나 앉았다. 숨을 크게 몇 번 몰아쉬었더니 불안 증세가 서서히 사라진다.
“여보세요?”
“여보, 나 또 공황장애 증상 때문에 지하철에 못 내려가고 있어,”
“자기야, 급하게 생각하지 마, 거기 어디야 데리러 갈게,”
자상한 남편이 걱정 한가득을 수화기로 전해준다.
“아니야, 여기 회사 근처야, 멀잖아. 좀 더 안정시키면 갈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괜찮겠어? 무리하는 거면 절대 안 돼.”
“아니야, 나 맨날 살아 돌아오잖아. 괜찮을 거야. 그냥 애들 먼저 재워달라고 전화한 거야.”
“애들 재우는 거야 뭐 당연한 건데, 당신이 걱정되니까 그렇지.”
“아니야, 진짜 괜찮아. 좀 여기 앉아서 쉬다 갈게.”
“그래, 그럼 전화기 계속 곁에 둘 테니까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해. 당장 달려갈 테니까. 그리고 당신 회사 다니는 문제…. 이제 좀 심각하게 생각해보자.”
“어, 그래 나중에…. 끊는다”
남편은 나보고 이제 회사를 그만두라고 한다. 하지만 그만두면 당장 경제적으로 힘들 것은 분명하다. 남편의 벌이도 아주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외벌이로 살기는 힘들다. 또 몇 년간 해온 회사 업무를 그만둔다면 회사에 막대한 지장을 줄 것이 뻔하다. 회사 다니는 문제는 진짜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다. 밤공기가 시원하다. 헤드라이트가 흐르고, 빌딩의 불빛들이 별처럼 수 놓여 있다. 바쁨들 속에서 이 여유 있는 빛의 연주는 조용히 흐르고 있다.
날이 밝고, 또 하루가 시작된다. 모든 사람이 바쁘게 움직인다. 서울은 분주한 사람들 투성이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 보면, 지하철 환승으로 1분 1초라도 아끼기 위해 최단 거리 환승 동선을 외운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점심시간에 사람들이 왁자지껄 건물 밖으로 나온다. 퇴근 시간에 사람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온다. 숨 막히는 다람쥐 쳇바퀴의 연속이다.
“인력관리팀, 잠시 미팅 좀 할게요.”
이사로 진급한 김신애 팀장님의 목소리에 좀 더 힘이 들어가 있다.
“저희 김선우 팀장님은 출장 가셨고, 저랑 박정구 대리만 있습니다. 괜찮으세요? 이사님?”
“상관없어요, 좀 있다 회의실에서 좀 봅시다.”
“네, 이사님.”
불길한 느낌이 든다. 유통물류팀에서 보통 회의하자고 하면 까다로운 요청이 대부분이다. 커피를 진하게 한잔 타고 소회의실로 수첩을 들고 일어선다.
“박 대리, 유통물류팀에서 이사님이 보자고 하시네”
“아, 지금 바빠 죽겠는데 또 뭔 일을 꾸미시려고. 네, 알겠어요. 요것만 마치고 들어갈게요”
박정구 대리는 자주 덜렁덜렁거리고, 가끔 상황 파악을 잘 못 하지만, 할 말 똑 부러지게 하는 면이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우리 팀장님이 없는 상태에서 유통물류팀과 미팅을 하지만 박 대리 덕분에 든든하다. 분명 우리 팀에 해가 될 것 같으면 바로 유통물류팀 김 이사님을 쏘아붙일 게 분명하다.
‘탁탁탁’
김 이사님은 서류를 소회의실 탁자에 치며 정리하더니, 한 부씩 박 대리와 나에게 던져준다.
“주 과장, 박 대리, 거기 인력관리팀은 항상 바쁜데 미팅하자고 해서 미안해요. 우선 좀 요청할 게 있어서 모이자고 했어요. 김선우 팀장은 자리를 비웠지만, 어차피 주 과장이 실무적으로 일을 다 하니 나중에 대략적인 것은 주 과장이 직접 김선우 팀장과 이야기하도록 하고.”
역시, 예상이 맞았다. 지금 업무도 폭발인데, 또 뭘 물어와서 진행 하나 보다. 우리 팀장님의 특성상 먼저 발 담근 사람이 업무를 맡게 되는데, 이것은 또 내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저, 김 이사님, 아주 급한 것이 아니면 김선우 팀장은 내일모레 복귀하는데 그때 미팅하시면 어떨까요?”
이야기도 듣기 전에 아주 티 나게 거절 성 맨트를 날린다.
“주 과장, 아주 급한 일이야!”
“아,네….”
“다름이 아니라 소문으로 떠돌던 KS INVESTMENT 프로젝트 건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번에 입찰을 넣어보기로 했어요.”
“네? 아니, 그건 덩어리가 엄청나게 큰 건인데…. 저희가 되기도 힘들거니와 설령 된다고 하더라도 그게 저희가 감당되겠어요?”
“아, 주 과장, 맨날 안 된다고만 하고 안 할 거야? 그럼 영원히 못하는 거야.”
도대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을 맡아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건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 업무도 폭발 직전이라 겨우겨우 처리해나가는 상황이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지금 상황에서 불가능한 일이라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주 과장, 우선 일부터 따오자고. 되면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인력이 모자라면 더 뽑으면 되는 거고.”
“이사님. 현재 인력도 겨우 맞추고 있는데…. 예산은 얼마로 잡으실 건가요? 저희에게 배정된 예산은 얼마지요?”
“에이, 주 과장, 주 과장은 걱정이 너무 많아서 문제야. 그리고 인력 세부 예산은 인력관리팀에서 알아보고 알려주세요. 거기 필요 인원수랑 자격 있지요? 인력에 배정된 총예산은 거기 적어놨고.”
딱 봐도 터무니없는 수치다.
“팀장님, 아, 이건 딱 봐도 엄청 작습니다. 이거 가지고는 단 한 명도 저 자격에 못 맞춰요. 아무나 데려다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력관리팀이 있는 거 아닌가요? 우리 회사 인력관리팀은 능력이 출중하니까 한번 맞춰보세요. 총예산이 그렇게 되니까 예산 배분 잘해서 임금으로 좀 더 쓰면 되지. 간단하잖아.”
“아니, 그래도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있는데….”
“주 과장, 예산일 뿐이잖아. 우선 계약 맺고, 추가 예산 집행하면 되지, 그냥 우선 세부 예산부터 뽑아주세요. 어차피 사장님 결정하실 거니까.”
추가 예산을 받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미 진행이 된다면 그 책임은 전부 우리 팀이 떠맡게 된다. 사람을 못 구한다느니, 관리를 잘 못 한다느니, 할 게 뻔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박 대리도 너무 큰 건이라서 그런지 아무 말 못 하고 앉아 있다. 분명 우리 팀장님에게 말해봐야 사장님이 하라는데 별수 있냐며, 주 과장이 한번 진행해보랄 것이 분명하다. 쌓여있는 기존 업무가 밑에서 치고 올라온다. 새로운 걱정거리가 위에서 짓누른다. 퇴근할 때 공황장애가 찾아오지 않을까 식은땀이 난다…. 밥 맛이 뚝 떨어진다. 오늘은 점심을 걸러야겠다.
“주 과장, 수고해줘. 이번 주 내로는 줘야 해”
“네….”
책상 위에 김 이사님에게서 받은 서류를 던져 놓는다. 그만두고 싶다. 하지만 이 서울 하늘 아래 나를 받아줄 회사가 얼마나 있을까?…. 남편은 분명히 그만두라고 할 건데.
“주 과장님, 진짜 우리 이거 덜컥 맡아버리면 어쩌지요?”
소회의실을 정리하고 나온 박 대리가 묻는다.
“모르겠다, 뭐 어찌 되겠지, 우선 지금 하던 일들 빨리 정리하자. 난 대충 정리해서 우리 팀장님께 보고할 수 있게 만들어볼게.”
“네, 과장님.”
모니터가 노래진다. 웅웅웅 시선이 울린다. 흐려졌다, 또렷해졌다. 현기증이 난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반 듯 네모로 400만 픽셀, 200만 픽셀, 1,100만 픽셀, 30만 픽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 어지럽다. 잠시 책상에 엎드린다. 죽고 싶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오늘은 퇴근할 때 로또를 사서 가야겠다. 로또에 당첨되면 이 거지 같은 회사 때려치우고 말 거다.
다시 몸을 가눈다. 우선 머리를 정리한다. 계획을 세워본다. 진행해야 할 일들을 살펴본다. 며칠은 꼬박 야근해야 할 것 같다. 시간은 또 빠르게 흘러가겠지.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
.
.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베개를 뒤집어쓰고 엎드려 누웠지만, 틈새로 기어코 부산스러운 아침이 기어 들어온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정말이지 출근하기가 싫다. 아이들이 흔들어 깨운다. 하지만 미동도 하고 싶지 않다. 어젯밤도 겨우 잠들었다. 아니, 자기가 싫었다. 아침이 오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아니, 내일 자체가 오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죄어온다. 뱃가죽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아려온다. 김밥 같은 출근, 폭주하는 전화, 쏟아지는 이메일, 여기저기 부탁, 이곳저곳 확인, 스트레스, 스트레스, 시루떡 같은 퇴근.... 또 쳇바퀴의 시작이다.
“당신, 출근 안 할 거야?”
베개를 뒤집어쓰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묻는다.
“자기야, 미안해, 도저히 출근 못 하겠어. 애들 옷은 다 꺼내 놨으니까 입혀서 보내.”
아이들 아침 식사, 등원은 항상 남편이 도맡아서 한다. 출근 시간이 자유로운 남편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당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회사를 그만두자. 좀 아끼면서 살면 되지.”
“여기서 더 어떻게 아껴?! 당신은 도대체 왜 생각 없이 말을 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조금만 쉬면 돼, 나 신경 쓰지 않고 출근이나 해!”
괜한 남편에게 화풀이다. 천사 같은 남편은 아무 대꾸 없이 조용히 안방 문을 닫고 나간다. 회사 스트레스를 남편에게 푸는 것 같아 미안해진다.
핸드폰으로 개인 사정으로 인한 긴급 휴가 공지를 날렸다. 이런 면에 있어서 우리 회사는 좋다. 하지만 누가 내 일을 해주는 건 아니기에 어차피 일은 쌓인다. 모르겠다, 우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이왕 얻은 휴가니 눈 감고 자보기로 한다. 하지만 잠은 잘 오지 않는다. 만약 인력을 맞추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만약 내가 힘들다고 그만두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딸년 하나 잘 키웠다고 좋아하시던 우리 엄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정신이 다시 몽롱해진다.
안방에는 어수룩한 어둠만 있을 뿐이데 웅웅웅 울린다. 어둠이 네모 반듯하게 나눠진다. 50만 픽셀, 100만 픽셀, 300만 픽셀, 600만 픽셀, 1,000만 픽셀, 1,200만 픽셀….
저 멀리 아주 멀리…. 하얀 세상이 있다. 그곳에는 딱하나 아주 작은 빨간 동그라미가 있다. 가까이서 보니 빨간 버튼이다. 누르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깨끗이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천사 같은 내 아이들과 듬직한 남편은 다시 볼 수 없다. 그래도 누를 거냐 누군가가 묻는다.
나는 한참을 망설인다.
또 한참을 망설인다.
누를 수가 없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나는…. 도저히 누를 수가 없다.
나는 잠이 든다.
.
.
.
“당신, 오늘 푹 쉬었어?”
퇴근한 남편이 진심으로 물어본다. 난 저런 진심이 좋다.
“응, 덕분에, 나 내일부터 다시 힘내서 일해볼게.”
“괜찮아,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그만둬, 응?”
“또, 그 소리. 열심히 하겠다는 사람 앞에서 왜 그만두라고!”
“아아, 미안미안, 그래 우리 사랑스러운 아내, 파이팅!”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남편이 고맙다. 그래 못할 건 없다. 힘 내보자. 몇 년을 해온 일이다. 피하기보다는 직접 맞닥뜨려 싸워보자.
분주한 아침의 또 다른 시작이다. 두근두근, 우리 동네서 출발하는 지하철은 여기가 종착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로 없다. 한산한 지하철에 올라타지만, 곧 꽉 들어찰 거라 긴장이 좀 된다. 아직 목적지가 한참 남은 시작점이다. 한 정거장이 지나고 사람들이 거의 반 이상 찬다. 두 정거장을 지나니 발 디딜 틈이 없다. 세 정거장을 지나니 앉아 있는 나에게까지 그 무게감이 전달된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압박감이다. 시작된다. 공황장애….
조금만 버티자, 조금만 버티자….
할 수 없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역에서 내렸다.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이 이용할 일 없는 벤치에 앉았다. 진정되지 않는다. 원망스럽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 했는데…. 진정하려고 하니까 더욱 심장이 쿵쾅거린다.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조금 더 지체되면 지각이다. 멀리 살아서 지각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아직 가슴에서 진동이 미친 듯이 느껴지지만, 다시 답답하게 줄 서 있는 행렬의 꼬리로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