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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ED BUTTON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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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Oct 30. 2022

제9장. 완벽

소설 RED BUTTON


‘릉링르리릉 띠리리리리링, 릉링르리릉 띠리리리리링’


 눈은 한 번에 떠진다. 전날 과음을 했을 때가 아니라면 언제나 5시 30분에 일어난다. 아내는 아침잠이 많다. 예전에는 그 점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잔소리해봐야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제는 포기한 상태다. 여명이 거실을 비추고 있다. 아침은 언제나 고요하다. 간단히 물을 마시고, 자기 전 챙겨둔 마라톤 바지를 갈아입는다. 최대한 부스럭거리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옷방 옆이 딸들이 자는 방이다. 첫째 딸 고주아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고 사춘기가 왔는지 굉장히 예민하다. 지금 부스럭대다 깨우면 짜증만 내고 다시 잠들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둘째 딸 고주현은 엄마를 닮아 둔한데, 고주아는 꼭 나를 보는 것 같다.


 아침햇살은 상쾌하다. 아침 조깅은 벌써 5년째. 전날 아주 과음하거나 아주 늦게 퇴근하지 않은 이상 이렇게 꼭 아침에 나오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나태해지는 행위는 스스로 용납이 안 된다.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고 주위에서 말하지만, 이건 나의 삶의 방식이다. 여태껏 이렇게 살아왔고, 좋은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나처럼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싫은 내색을 하고, 조언해주고, 잔소리하고, 그건 아니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주위에서 조금씩 나를 불편하게 생각한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남에게 조언하는 것만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냥 누가 어떻게 하든 간에 열심히 나에게만 채찍질하면 되는 것이다.    

 

 숨이 차오른다. 하지만 속력을 늦추지는 않는다. 지금 임계점을 돌파해야 다음 임계점으로 넘어갈 수 있다. 임계점 앞에서 멈추면 늘 그 자리다. 하지만 임계점을 돌파하고 쉰다면, 다시 시작할 때 이 임계점을 쉽게 돌파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더 높은 임계점을 쳐다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지만 오히려 더욱 속력을 높인다. 숨 쉴 수 없을 정도의 이 느낌이 좋다.     


 “안녕하세요”

 “어우, 고 차장 조금 늦었네”

 오늘따라 강변북로, 올림픽 대로가 예상외로 막혔다. 사고가 난 듯했다. 김신애 팀장의 잔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별로 존경스러운 상사는 아니다. 하지만 구리에서 출퇴근하기에, 출근 시간 맞추기란 여간 운 일이 아니다. 사는 곳에 관해서 말한다면, 오래전 구리의 신축 아파트를 구매할 때, 김신애 팀장은 왜 그 구석에 집을 사냐고 뭐라고 했지만, 그냥 거주할 집을 사는 거다, 복잡하지 않은 곳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편안히 살 곳을 고른 것뿐이다, 적당한 가격이다, 라며 조언을 무시했다. 그 당시 김신애 팀장은 강남에 아파트 한 채를 샀지만, 은행 대출을 갚느라 강남 아파트에는 전세를 주고 은행 대출을 받아 잔금을 치르고 본인은 노원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거주할 때였다. 왜 그렇게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결과를 보니 이해가 됐다. 최근 오른 집값에 그녀는 강남 부자의 대열에 낀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잘 컸고, 아내도 여기서 살기를 잘했다고 나를 위로해준다.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릴 뿐, 또 서울 쪽은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는 말에 가끔 배가 아플 뿐, 전혀 이상이 없다.   

  

 “네, 아침에 차가 좀 밀리더라고요.”

 “그래, 뭐 워낙 멀리서 출퇴근하니 그럴 수 있지.”

 조롱하는 건지, 그냥 생각 없이 내뱉는 건지, 이런 한마디 한마디 생각 없이 내뱉는 말에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낀다.

 “고 차장, 저번에 내가 주신영 과장한테 인력 세부 예산 짜라고 이야기했거든요. 그거 이따가 주 과장한테 자료 받아서 우리 예산 한번 최종적으로 짜 보도록 하지요”

  김신애 팀장은 아침부터 지시하고 싶어 안달 났는지 출근해서 컴퓨터도 켜지 않았는데 명령을 내린다. 대답도 하기가 싫다.

 “주 과장, 지금 이사님이 이야기하는 인력 예산 다 짰어?”

 “아네, 대략 짜 놨습니다.”

 “그래? 이따 소회의실에서 좀 보자.”

 “네, 차장님.”

 김신애 팀장이 어떻게 인력관리팀에 말했을지 뻔하다. 아마 그대로 넘겼을 것이다. 저 예민한 주신영 과장은 또 머리 싸매고, 며칠 고생하면서 만들어 놨을 것이다. 예전에 주신영 과장이 같은 팀에 내 밑에 있을 때, 좀 답답하게 일하는 면은 있었지만 열과 성의는 다하는 스타일이었다. 부지런은 한데 성과는 잘 내질 못해서 안타까운 면은 있었다. 한때는 잔소리도 많이 하고, 애정도 많이 가졌는데, 팀을 옮기고 나서 관계가 많이 소원해졌다.


 “고 차장, 주 과장이랑 살살 해. 회사 떠날 사람이야. 주 과장 사직서 던졌다. 로또 맞았데.”

 이 여자는 아침부터 낮술을 했는지 또 헛소리한다.

 “주 과장, 진짜야?”

 “아, 네. 회사 그만둔다고 말은 했어요.”

 “진짜 로또 맞았어?”

 “로또 맞아서 회사 그만두는 건 아니고요, 그전부터 그만두려 했어요.”

 세상 참 모르는 일이다. 항상 풀이 죽어 다니던 주 과장이 로또에 당첨되고….

 “아, 그래서 저번에 갑자기 아침에 긴급 휴가 낸 거였어?”

 “아아, 아니요. 그때는 정말 몸이 좋지 않아서 냈던 거고요, 다음날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묵혀놨던 로또 번호 맞춰봤는데, 1등에 당첨된 거예요. 진짜 깜짝 놀라서 소리쳤는데, 지하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그랬죠. 하하하.”

 오랜만에 주 과장이 즐겁게 이야기한다.

 “주 과장, 맛있는 거 쏘고 가야 해, 호호호”

 김 팀장이 밉상답게 또 껴든다.

 “아, 네네, 물론이지요.”

 주 과장이 로또가 당첨되던, 김 팀장의 아파트값이 폭등하던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난 내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주 과장, 갈 때 가더라도 일은 단디 마무리 짓고 가야지? 인력 예산자료 확실히 만든 거 맞지?”

 그만둔다고 해서 대충 할 주 과장도 아니지만, 하하호호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아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고자 재차 물었다.

 “네, 최선은 다했어요, 지금 보실래요?”

 “그래, 지금 바로 보자.”

 영 맘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짜임새 있게 예산을 짜 왔다. 비현실적인 예산안에서 현실적으로 맞추려고 고민한 흔적이 여기저기 있었다. 우선 주 과장에게서 받은 인력관리팀 예산을 입력하고, 이제 우리 팀 예산을 맞춰 올리면 된다.     


 “저번에 조사하라는 거 다 했어?”

 신황선 대리와 김가현 대리 가운데 파티션 앞에 서서 물으니 둘 다 움찔한다.

 “아, 네. 다하긴 했는데….”

 신황선 대리와 김가현 대리가 파일을 클릭하여 화면을 보여준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고칠 것투성이다. 신황선 대리는 딱 자신의 책임 한계까지만 조사한 듯 보였고, 김가현 대리가 만든 것은 일일이 다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자료를 믿을 수가 없다. 워낙 대충대충이라서…. 나는 밑에 사람 복은 없는 것 같다. 예전에 주신영 과장이나, 지금 신황선 대리나, 김가현 대리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자료가 많이 미흡하나요?”

 신황선 대리가 내 한숨에 불안한 듯 조용히 물어본다.

 “내가 뭐 정리하면 되지.”

 조목조목 따져주는 것도 이제 할 것이 못 된다. 오히려 시간 낭비다. 김가현 대리는 아예 자료만 던져줘 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똥오줌 치워 주는 것도 지겹다. 예전 같으면 가르쳐 주고 확인하고 피드백해 줬는데…. 다 소용없다. 원하는 사람만 가르쳐 주면 된다. 그리고 난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며칠 있으면 마라톤 대회다. 마라톤 대회는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예전에는 회사에서 마라톤 멤버들을 모았었다. 몇몇이 관심을 보였고, 42.195까지는 아니더라도 5킬로, 10킬로, 20킬로에 나눠서 참가했다. 대회에 참가한 멤버 가족들까지 불러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서수진 사장님께서 몇 번 그 뒤풀이 자리를 금전적으로 지원까지 해줬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한두 명씩 참가하지 않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아예 언제 그랬냐는 듯 무색해졌다. 참가율이 저조해질 때쯤 열정적으로 이번에 참가하자, 참가 신청했냐 홍보했지만, 원치 않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주 과장 정도가 좀 꾸준히 참가했었는데, 인력관리팀 일이 바빠지면서 주 과장도 언제부턴가 참가하지 않았다.

 말은 물가에 데리고 갈 수 있지만, 물을 마시는 건 말이다. 나는 마음에 좋고, 몸에도 좋은 마라톤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뛰는 건 그들의 자유기 때문에 더 이상 강요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물은 말이 마시는 거다. 모니터의 업무 자료들을 빠르게 정리한 후, 인터넷에 접속해서 마라톤 대회에서 제공하는 물품의 택배 발송 현황을 확인한다. 대회에 맞춰 이상 없이 도착하는 것으로 검색된다.     


‘릉링르리릉 띠리리리리링, 릉링르리릉 띠리리리리링’


 역시 눈은 한 번에 떠진다. 풀코스 출발은 아침 8시다. 최소 7시 반까지는 도착해야 한다. 몸은 최상은 아니지만, 오늘은 자신 있다. 여태껏 4시간 안에 들어온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3시간대로 주파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달을 열심히 준비했다. 첫째 딸 고주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마라톤 바지를 갈아입고, 어제 싸놓은 가방을 메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가 나의 엔도르핀을 돌게 한다. 주말 새벽 올림픽대로는 한산하다. 시원한 새벽 공기가 차창을 통해 나의 피부에 존재감으로 안착한다. 내가 목표하는 시간대에 꼭 닿으리라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탕!’

 “42.195 풀코스 선수들이 출발했습니다! 모두 완주하시길 응원합시다!”

 아나운서의 확성기가 웅웅웅 울린다. 길게 늘어선 주자들에 묻혀 출발 총성이 울린 뒤 한참 후에야 출발 센서를 지난다. 동시에 손목시계를 눌러 시간을 체크하기 시작한다. 오버페이스 하지 않기를 다짐하며 천천히 호흡한다. 지면과 운동화 바닥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나의 기분도 튀어 오른다. 출발이 좋다.

 “힘내라, 힘내라”

 ‘헉, 헉’

 도착 지점 1킬로를 남겨 놓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다. 시계는 3시간 48분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쓰러지지 않는 한 3시간대 목표가 달성된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무릎에 느낌이 없다. 지금 내가 뛰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발바닥에 감각이 없다. 하지만 해낼 것이다. 48.195킬로를 계획한 랩타임에 거의 일치하게 주파했다. 그리고 남은 1킬로를 계획대로 진행하면 된다. 3시간 55분이 예상된다. 임계점이 코앞이다. 임계점 앞에서 멈출 수는 없다. 임계점을 뛰어넘자. 3시간 55분을 넘어서 1분이라도 줄여보자. 감각이 없는 발바닥을 좀 더 세차게 굴려본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더욱 펌프질해 본다. 웅웅웅…. 응원가가 희미해진다. 저기 앞에 보이는 결승선이 네모반듯하게 잘리면서 퍼진다. 400만 픽셀, 200만 픽셀, 800만 픽셀, 1,000만 픽셀, 1,500만 픽셀….

 가슴에 피니쉬 테이프가 와 닫는 게 느껴진다. 팔을 들 힘도 없지만 힘겹게 손목시계를 본다. 3시간 53분 59초…. 목표 달성이다.      


나는 완벽하게 목표 달성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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