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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ED BUTTON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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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Oct 30. 2022

제11장. 권위적

소설 RED BUTTON


 “내일 9시 티오프니까, 6시까지 와”

 “네, 사장님 5시 45분까지 갈게요”

 이석정 대리가 깍듯이 대답한다. 요즘 들어 이 대리가 조금씩 나를 피하는 눈치다. 카톡도 빠르게 대답하지 않는다. 가끔 전화를 받지 않을 때는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나이 먹고 집착이 생긴다니, 주책이다. 이 또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라 더 후벼 파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아프지만 짜릿한 감정….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건지. 남편과 이혼한 뒤로 벌써 15년이 넘어간다. 남편, 자식 다 버린다며 그렇게 욕먹었지만, 대신 성공이라는 보상이 주어졌다. 이제 인생을 즐기려 하니 나이는 기다려주지 않고 저 멀리 가 있다. 보상심리 때문일까? 주책스러운 집착을 하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 하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요즘 들어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 같다. 중독이 안 될 정도로만 알코올에 의지한 체 잠자리에 든다. 오늘도 할 수 없이 언더락으로 조니워커 한잔을 마신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움에 기분이 좋다.

 ‘째깍째깍’

 거실에 시계 소리만 남아 있다. 이 외로움…. 몇 년 전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 중독일 때는 느껴보지 못한 괴로움이다. 어느 정도 알딸딸함이 뇌리에 전달된다. 조용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는다.

 ‘째깍째깍’

 침실에도 시계 소리만 함께한다. 즐거운 상상만 하자. 정신적으로 지치면 안 된다. 내일 있을 라운딩을 생각하자. 이석정 대리를 생각하자. 그의 매끄러운 턱선, 그의 넓은 어깨, 갈라진 허벅지, 하얗고 긴 손…. 귓불에 간지러운 속삭임.    

 

 ‘슈 욱~ 땡!’

 티가 탄피처럼 날아가며 공이 시원하게 빨랫줄처럼 뻗어나간다. 구력은 어느덧 20년을 넘어가지만, 이 직선 감은 항상 짜릿함을 안겨준다.

 “역시, 사장님은 끝내주죠?”

 이 대리가 김 팀장과 신 팀장에게 자랑하듯 물어본다. 마치 자기 애인을 자랑하듯.

 “그럼, 그걸 말이라고 해?, 근데 내가 사장님한테 배웠잖아, 그래서 나도 드라이버는 끝내주지.”

 “김 팀장님 드라이버는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이 대리, 사장님 옆에 있다고 막 나간다?”

 “아휴, 저는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서 그럽니다. 하하하”

 “이석정 대리, 월요일에 좀 봅시다.”

 “사장님, 김신애 팀장이 저 괴롭히려고 그래요.”

 이 대리가 너스레를 떤다. 젊음이 느껴진다. 이런 젊은 화기애애함이 좋다.

 “이제 좀 출출한데 빨리 라운딩 끝내고 점심 먹으러 가자”

 “네, 그럼 빨리 쫓아가 볼게요”

 신 팀장이 냅다 드라이버를 내리꽂는다. 티 앞에 잔디가 움푹 파인다. 뒤땅이다. 쟤는 내가 몇 번을 교정해 줬는데도 들어 먹질 않는다. 10년 넘게 잘못된 자세를 고집하고 있다.

    

 “아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네에!?”

 김 팀장 전화 내용이 심각하다. 현장에서 작업자가 사고 난 것으로 보인다. 사업을 하면서 항상 느끼고 있지만, 세상에 마냥 순조로운 일만은 없다. 일이 터지지 않게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후 처리를 얼마나 빠르게 잘하느냐가 관건이다. 김 팀장이 전화 통화를 끝내고 헐레벌떡 달려온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왜? 현장에서 사고 났어?”

 “아니요, 방금 고형길 차장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마라톤 대회 나갔다가 쓰러졌다는데요.”

 “아니, 그 체력 좋은 고 차장이 왜 그랬데?”

 “아마 무리를 좀 했던 것 같다네요. 결승점 1킬로를 남겨두고 쓰러졌답니다.”

 고 차장은 회사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직원이다. 그가 이탈하면 회사로서는 큰 손해다. 잠시 머리가 지끈하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데?”

 “응급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은 없다고 하네요.”

 “다행이네, 응급실에 있으면 살아날 거야, 우선 식사나 하러 가자.”

 “사장님, 고 차장 와이프가 너무 놀라 있고, 급히 도움 요청할 때가 없어서 저한테 전화한 것 같은데 지금 당장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 고 차장이랑 아내가 둘 다 지방 출신이라고 했지? 친척들도 다 밑에 있을 거고, 음…. 그래, 출출하지만 바로 병원으로 가보지 뭐. 여기 네 명 전부 가자고.”

 병원에 있다고 해서 안심은 했지만, 의식이 없다고 하니 걱정은 된다. 서울 쪽으로 이동해서 술을 한잔하려고 했는데, 오늘 이 대리와 시간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어어, 일어나지 마, 누워있어”

 서울로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고 차장이 의식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상태는 괜찮다고 하지만 이미 병원으로 가기로 했으니 그대로 가던 길 가자고 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4인 병실로 옮겨 있었다.

 “사장님을 여기까지 오시게 하고, 죄송합니다. 집사람이 김 팀장님한테 연락했는데, 어떻게 네 명이 다 같이 오셨네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도대체 왜 쓰러진 거야, 무리했어? 고 차장?”

 모든 일에 완벽하고, 한 치의 실수도 잘하지 않는 고 차장이 쓰러질 만큼 무리했다는 게 의아했다.

 “무리한 건 아니고요, 분명 1킬로 남은 걸 확인했는데,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없습니다, 의사 말로는 뇌 쪽에 MRI, CT 모두 이상 없다고 합니다. 잠시 일사병 증상이 나타난 것 같다고 하네요.”

 “이제 고 차장도 나이가 있잖아, 젊었을 때처럼 하면 안 되지. 여기 고 차장 부인 앞에서 내가 뭐가 돼? 죽으라고 일만 시켜서 쓰러진 줄 알잖아”

 “아,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사장님.”

 “호호호, 농담입니다. 월요일 하루는 푹 쉬고, 화요일 출근해. 절대 월요일 출근하지 마.”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다행이다. 고 차장은 금방 회복할 것으로 보인다. 좋은 직원 잃을까 잠시 걱정했지만, 역시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고 차장 아내가 연신 고맙다며 안절부절못한다. 나는 그저 병문안만 왔을 뿐인데 사장 방문 효과가 극대화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조그만 관심을 보이면 직원들은 감동한다. 나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잘 사용하는 편이다.


“사장님, 그럼 들어가 볼게요.”

“이 대리, 고생했어. 들어가 봐.”

 골프 백을 집 현관까지 옮겨주고, 이석정 대리가 돌아선다. 마음 같아서는 가지 말라 하고 싶지만, 나이 많은 여자로서 질척거리고 싶지 않다. 오늘 계획대로 뒤풀이 식사를 하면서 술을 한잔했으면, 자연스러웠을 것을…. 쓰러진 고 차장이 조금 원망스럽다. 오늘도 시계 소리를 안주 삼아 위스키의 힘으로 잠들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의 매끄러운 턱선, 그의 넓은 어깨, 갈라진 허벅지, 하얗고 긴 손…. 귓불에 간지러운 속삭임…. 젖어온다.

    

 “신영자 팀장, 김신애 팀장 좀 봅시다”

 “신 팀장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담배를 피우러 간 것 같다. 업무시간에 자주 자리를 비운다. 한마디 해야겠다.

 “자리에 돌아오면 김 팀장이 신 팀장 데리고 들어오세요, KS INVESTMENT건입니다. 자료 챙겨 오세요.”

 회사 매출은 그런대로 나오고 있다. 이대로 유지해도 이상은 없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는 법. 언제나 순환을 시켜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KS INVESTMENT 프로젝트 입찰 건은 우리 회사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물론 무리인 것은 알고 있다. 벌써 주 과장이 그만두기로 했다. 떨어져 나가는 직원은 어쩔 수 없다. 대의를 위해서 약간의 희생도 필요한 법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 강하게 이끌 때는 피도 눈물도 없어야 한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신영자 팀장과 김신애 팀장이 들어와 한번 인사하고 자리에 앉는다. 동년배인 두 사람. 서로의 장단점이 극명하다. 한 명은 영리하지만, 열정이 부족하다. 한 명은 열정은 충만하지만, 무지할 때가 있고 이기적이다. 한 명은 진지하지만 조아림이 부족하다. 한 명은 낮은 자세에 거리낌이 없지만, 직원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 아직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지 결정하지 않았다. 당분간 서로 경쟁시키며 시너지를 발생시키게 좋을 것 같다.     


 “영업관리팀 하고 유통물류팀, 이번 KS INVESTMENT 프로젝트 입찰 건 준비사항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네,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적극적인 김 팀장이 먼저 시작한다. 그녀는 열변을 토하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쩐지 깊이가 없다. 팀원들이 만들어 온 것을 그냥 앵무새처럼 그냥 조잘거리는 것 바로 티가 난다. 팀장으로서 사정할 것들은 과감히 쳐내야 하는데, 사족까지 그대로 달고 가져와서 보고한다. 그냥 받아줄 수는 없다.

 “아니, 김 팀장!”

 “네?”

 “분명 내가 저번에 제시한 예산안에서 맞추라고 했잖아요? 근데 지금 값이 안 맞잖아. 이래서는 우리가 경쟁력이 없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해?”

 “아네, 사장님, 현실을 반영해서 이것도 최대한 맞춘 겁니다.”

 “나를 설득하려 하지 말고, 우선 결과물을 가지고 오라니까!”

 “아, 사장님 죄송합니다. 다시 만들어오겠습니다”

 주말에 골프를 같이 쳤다고 해서 당근만 줄 거라 착각하게 하면 안 된다. 공과 사는 구별하고,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언제든 채찍을 꺼내야 한다.

 “김 팀장은 이틀 내로 다시 보고하고, 신 팀장, 영업관리팀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네, 우선 저희는 여기 보시면 5대 거점 지역 외 협력업체를 조사했습니다. 꽤 경쟁력 있는 업체들도 많이 보입니다. 우선 리스트업은 전부 다 해놓은 상태고요, 대략적인 특징들은 파악해놓은 상태입니다. 이번 주 내로 박선주 차장, 송시연 대리, 이석정 대리, 이희정 대리와 직접 현장 방문해서 탐문 예정입니다”

 일주일은 외근할 태세다. 이석정 대리도 껴있다. 곁에 두고 싶다.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좀 예외로 한다.

 “팀 전체가 외근한다고?”

 “네, 우선 계획은 그렇습니다.”

 “그럼 업무 공백을 어떻게 할 거야? 이석정 대리는 내가 좀 시킬 일이 있으니까, 이석정 대리를 제외하고 외근하러 다니세요. 문제없지요?”

 “네, 전혀 문제없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이 협력업체 발굴 건은 두 팀 간 자료를 좀 공유하세요. 어차피 같은 건이잖아요, 서로 시너지를 발휘하도록.”

 “사장님, 그런데 시너지보다는 그렇게 하면 업무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서로 미루다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 팀장이 입바른 소리를 한다. 하지만 밑에서부터 약간 욱하고 올라온다.

 “하라면 하지, 뭘 그렇게 말이 많아!”

 “아, 네. 사장님 알겠습니다.”

 신 팀장이 억울하다는 듯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상위 포지션은 유지해야 한다.     


 ‘째깍째깍’

 시간은 덧없이 흘러간다. 이제 알코올 의존도를 줄여야 할 것 같다. 여태까지 자제하며 살아온 인생이다. 의존이 아닌 의지를 다지고 살아왔다. 가끔 전 남편에게서 연락이 오지만 다시 합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술기운에 의존해서 연락해 오는 그는, 이미 나에게는 생기가 없는 사람이다. 나는 잃어버린 젊음을 혼자 온전히 보상받을 예정이다.

 또 쳇바퀴 같은 하루의 시작이다. 나는 신문을 보고, 동향을 살피고, 전화하고, 메일을 유심히 살핀다. 아직은 내가 지적할 만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김 팀장은 김 팀장 나름대로 고 차장, 신대리, 김 대리를 데리고 동분서주다. 불호령이 효과가 있다. 영업관리팀은 이석정 대리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외근 중이다. 인력관리팀은 주 과장이 곧 퇴사하지만, 그 공석에 채용공고를 통한 입사지원서가 가득 대기 중이다. 회사는 그렇게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이 공허함.

 잘 빚어진 사기그릇에 이가 빠진 듯한 이 느낌을 견딜 수가 없다. 모양이 빠지긴 하지만, 질척거리는 것 같지만, 하는 수 없이 이석정에게 메신저를 날린다.

 ‘오늘 술 한잔할까?’

 사장실 넘어 불투명 시트지로 비치는 이 대리의 모습을 주시해 본다. 등받이에 깊게 젖힌 모양새가 업무에 집중하지 않는 것 같다. 아직 메신저를 확인하지 않고 있다. 곧 자세를 바로잡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내 메신저를 확인한 듯하다.

 ‘사장님, 어쩌죠? 제가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술 한잔하자면 좋다고 따라나서던 그가 요즘 변했다. 우리는 단둘이 종종 저녁 식사를 했다. 내가 퇴근 시간 30분 전에 미리 나가 있으면 이석정이 퇴근 시간을 넘겨서 약속 장소로 오는 패턴이었다. “아휴, 눈치 보며 퇴근 안 하시는 분들 때문에 곤욕이라니까요” 이석정의 단골 맨트였다. 식사를 하고 술을 한잔하고, “사장님 댁에 가서 한잔 더하시지요” 그것도 그의 단골 맨트였다. 그리고 시계의 째깍 소리는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따뜻한 밤…. 젊음을 잃은 나에게 부드러운 감촉을, 짜릿한 감동을, 끝을 향해 달려가는 극단적인 욕망, 나는 침대에서도 그를 지배할 듯 위로 올라가서 오르가즘을 느끼곤 했다….

 ‘그래, 할 수 없지, 요즘 바쁜가 보네, 영 얼굴 보기가 힘들어.’

 ‘죄송해요, 다음에 한잔하시죠.’

 꽃집 한편에 팔리지 않는 시든 꽃이 된 느낌이다. 상실감보다는 분노가 치민다. 눈알 뒤로 뜨거움이 올라온다. 마우스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에 따라 모니터 상의 포인터도 미세하게 흔들린다.     


 ‘째깍째깍’

 거실의 시계 소리만 남아 있다. 오늘도 언더락으로 조니워커 한잔을 한다. 그는 지금 젊은 여자와 동침하고 있을까? 저질스러운 생각의 구름을 휘휘 저어 본다. 하지만 그의 매끄러운 턱선, 그의 넓은 어깨, 갈라진 허벅지, 하얗고 긴 손…. 귓불에 간지러운 속삭임…. 그 상상 속에 나는 없다. 젊은 남녀의 하얗고 보드라운 속살들만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취기가 올라온다.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네모반듯하게 잘려 눈앞에 펼쳐진다. 1,300만 픽셀, 300만 픽셀, 500만 픽셀, 800만 픽셀, 20만 픽셀, 60만 픽셀, 40만 픽셀…. 이렇게 또 잠이 드나 보다. 침실까지 걸어 들어갈 재간이 없다. 이대로 소파에 몸을 맡긴다.     


 “사장님, 사이트 보십시오”

 김신애 팀장이 사장실 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젖힌다.

입찰 결과가 나왔다. 분명 다른 업체들보다 낮은 견적으로 들어갔는데 타 경쟁사 이름값에 밀린 것 같다. 그래도 친분이 있는 KS INVESTMENT 지연수 부장 말로는 우리 회사가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 약간의 기대는 하고 있었는데…. 가능성을 더욱더 높이기 위해 견적을 피도 눈물도 없이 쥐어짰는데….

 “도대체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세부 예산 똑바로 확인했어? 내가 그것까지 일일이 확인해야 해?”

 결코 세부 예산까지 세세히 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난 지금 핑곗거리를 찾고 있다.

 “아닙니다, 제가 몇 번을 확인하고 사장님 보여 드린 건데요.”

 김 팀장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신 팀장 들어오라고 해!”

 신영자 팀장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다.

 “협력업체들 직접 가서 확인한 거 맞지? 왜 우리가 입찰에서 떨어진 거야?!”

 “몇 날 며칠 외근 다닌 거 사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탈락한 건 저로서도….”

 신 팀장이 억울해 보이지만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자세히 검토하고 또 검토했어야지! 내가 언제까지 일일이 다 확인해야 해?!, 다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기대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화가 너무도 치민다. 분노가 치민다. 그건 꼭 입찰이 떨어져서 생기는 분노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지배할 수 없는 그 욕망! 사그라지지 않는 그 욕망.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그 욕망이 분출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장실이 새하얗게 불태워진다.


 호흡이 가빠진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다.


 웅웅웅 빙글빙글 돌아간다.


 이대로 쓰러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슬퍼해 줄 사람은 있는가?


 이석정?….


 가끔 오는 전남편의 취기 어린 전화를 받아 볼 걸 그랬나?….     



 인제 와서 후회한들,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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