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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Jan 01. 2022

EP5. 발가벗기에 도전하다.

EP5. 발가벗기에 도전하다.EP5. 발가벗기에 도전하다.

오랜만에 출근이었다. 퇴사 전 두 번 남은 출근에 첫날이었다. 출근하기 전날부터 설렜다. 오랜만에 동료들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미 회사 책상의 근 10년간 묻은 때는 거의 정리를 했놨지만, 그 첫날 계획은 내 컴퓨터의 잔재들을 완전히 정리하고, 완전히 떠날 것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책상은 거의 정리가 됐고, 약간의 잡동사니만 남아있으니 이사 진행하려면 하고, 내 컴퓨터는 회사의 구석 빈자리로 옮겨 놓고, 내 책상 서류함의 약간 남은 서류 들은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버려주세요"

빠지게 되는 내 자리로 다른 팀원이 채우면서 팀원들 간 자리 이사를 해야 했다. 말년 병장급의 제 멋대로 휴가와 재택근무로 며칠간 팀원들을 볼 수 없었다. 그 부재기간 동안 편히 이사를 하라고 이야기 해놓은 터였다.


이사가 진행된 , 단체 카톡방에서 팀원들끼리 약간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어떻게 이동했는지, 약간의 잡동사니 같은 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나에게 묻지 않았다. 시시콜콜하게 잘 이사했느니 마니 따져 묻기에는 별 의미 두지 않는 것들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출근 전날은 재택근무 날이라 원격 접속했는데 내 컴퓨터에 못 보던 다른 원격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다. 아직은 온전히 내 물건이고 컴퓨터 내부의 자료까지 넘긴다고 한 적이 없었는데 내 컴퓨터를 누군가 멋대로 조정한다고 생각하니 약간의 부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따져 묻지 않았다. 아름답게 퇴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냥 살포시 그 프로그램 삭제만 진행했다.

 

설레는 맘으로 회사 현관에 서서 안면인식 잠금을 풀려고 하는데 언뜻 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제발 오늘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참아, 허허허 웃어 그냥...'

마치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다는 듯, 나에게 부탁했다.

'뭐 어떤 일이 던지... 나 요즘 감정에 대해 성찰했잖아'

우쭐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자만심은 곧 바닥을 드러내는데...

 

구석 자리에 치워져 있는 애증의 관계, 내 컴퓨터... 현재는 찬밥신세다. 그렇게 부숴 버리고 싶던 놈이었는데... 순간 울컥했다. 쓸쓸한 컴퓨터에 감정이입 때문이었을까? 미세하게 틀어지고 누군가에 의해 수정돼 버린 내 원래 일상들이 감정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내 컴퓨터가 놓인 의자 없는 책상... 내 의자에 걸쳐저 있던 내 회사 잠바의 행방... 각종 연락처 및 사이트 비번이 적혀있던 모니터에 붙어 있던 뜯겨진 메모지... 나의 열을 식혀주던 미니 선풍기의 실종... 없어져 버려 충전할 수 없는 나의 핸드폰 무선 충전기, 행방을 알 수 없어 갈아 신을 수 없는 나의 슬리퍼...

모니터에 뜯겨진 메모지...

가슴부터 부들부들 떨려 왔다. 눈앞이 하얗게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근 10년의 내 일상이 짓밟힌 듯한 느낌이다. 회의실 의자를 꺼내와서 들으라고 책상에 밀쳐 놓고, 입사 한 지 6개월도 안된 아무 잘못 없는 팀의 막내를 불렀다.


"이거 누가 치웠어?"

평소라면 존댓말이지만 반말이다. 앞에 막내만 들으라고 하는 목소리 크기가 아니다. 막내가 안절부절이다. 이제 막 우리 팀에 들어온 과장이 깜짝 놀라 쫓아온다.


"직원들 다 같이 이사하고 치웠습니다."

누가 그랬는지 밝히지 않는다. 내가 알면 그 사람은 큰일 날 것 같나 보다.

"내 쓰레빠는 어디 갔냐? 모니터에 붙어있던 메모지는 누가 땠냐?"

막내와 나란히 서있는 신입 과장은 끝까지 누군지 밝히지 않는다. 의리가 있는 녀석이다. 우리 팀장까지 내 눈치를 보며 원래 내 자리의 바닥을 찾아본다.

막내가 헐레벌떡 어딜 갔다 오며 청소 아주머니에게서 들은 슬리퍼 행적을 말해준다. 어제 누가 버려놔서 쓰레기랑 모아 이미 버렸다며... 주위 다른 팀 동료들은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지만,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최악이다. 갑분싸를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차장님, 이거 안 싣는 쓰레빠라도..."

의리 있는 과장이 어디서 다른 슬리퍼를 가지고 왔다.

"됐어, 가봐 괜찮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보지 않아도 되는 이메일을 정리하는 척하며 분을 삭인다. 마우스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하... 또 저질러 버렸다. 그들이 나쁜 뜻으로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저 조금 세심하지 않게 치웠을 뿐인데...

또 내 안의 다른 나에게 지고 말았다. 사무실 앞에서 나에게 부탁받았던 나는 완벽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그만둘 회사, 이제 헤어질 사람들 감정 따윈 생각하지 말자. 잘했다. 맨날 허허거리고 웃기만 할 거야? 이렇게라도 해야 알아먹지. 잘했어... 정신 승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막내에게 언제 그랬냐는 듯,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살갑게 남은 인계 할 업무를 친절히 내어 주었다.


이렇게 하찮은 일로 빵빵 터져버리는 예민한 나다. 그래서 그만두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좋게 포장하려고 한다. 섬세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나다. 이제는 좋게 포장하려고 한다. 말수 적은 듬직한 사람이라고.

남들 앞에 나서길 부끄러워하는 나다. 귓불이 빨개질 정도로... 이제는 좋게 포장하려고 한다. 신중한 사람이라고.

눈치를 많이 보는 나다. 나의 것을 포기하면서 까지. 이제는 좋게 포장하려고 한다. 상대방 감정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약간의 위반도 잘 용납하지 않는 고지식한 나다. 이제는 좋게 포장하려고 한다. '겨우 나하나쯤이야가 아닌, 나부터라도'라고 생각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일기를 써내려 간다. 포장된 나를 이제는 남들 앞에서 기꺼이 발가벗겠다. 숨기지 않겠다. 만천하에 드러 낼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그러니까 그게 중학교 사춘기 때 정도부터 됐을 거다. 그때 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쓴 일기장이 있었다. 꽁꽁 숨겨놓은 나만의 일기장이었다. 모든 하찮은 생각까지 다 적어놓고 누가 보면 나의 치부를 들킬 것 같은 온전한 나만의 비밀. 결혼하면서 모든 공간을 공유하는 아내가 있기에 그 보물은 종량제 봉투에 스스로 들어갔다. 소중한 나의 인생이...

하지만 새롭게 쓰고 있는 일기장 '인생 2막 초등학교 4학년 1반'은 이제 그냥 내 책상에 언제든지 놔둔다. 첫째 아이가 봐도 된다. 아내가 봐도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공개적인 이런 곳에도 가끔씩 공개하려고 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갑분싸를 만든 공간에 앉아 있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인수인계도 다 끝났고, 할 일도 없었다. 아직 퇴직인사 돌리지 않은 사람이 있나 핸드폰을 훑어보며 시간을 때운다. 다행히 저녁 약속으로 만나려던 친구 녀석 업무가 예상보다 빨리 끝나 회사 앞에  일찍 온다고 한다. 우리 팀 단체 카톡방에 죄송하지만 약속이 있어 1시간 반 정도 먼저 퇴근한다고 통보한다. 외투를 입고 가방을 들고 미안한 척 허리 숙여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선다. 마지막 이틀 중 하루가 그렇게 끝이 났다.

 

1차원

 친구 녀석과 약속 자리가 즐겁다. 불혹의 나이지만 친구와 있을 때는 어려진다. 1차원적인 일들로 웃어재낀다. 음식점으로 1차원적인 이동에 발걸음이 가볍다. 육회 탕탕이와 육전과 막걸리에 1차원적인 취기가 올라온다.


아직은 정신적으로 미숙한 4학년 1반 학생아, 잘하자... 인마!!!




* 이 글을 읽는 모든 직장인들께...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1차원적인 것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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