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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Jan 01. 2022

EP6. 출근길 스케치

EP6. 출근길 스케치

알람이 한참 남았지만 시계를 들여다본다 06:10이다.


조용한 불 꺼진 거실이다. 근 10년간의 마지막 출근길을 그려낼 팬과 수첩을 찾는다.


평소보다 30분 일찍 나서기 위해 샤워기에 물을 틀고 머리를 적신다.


집을 나선다. 참새들과 까치들이 지저귄다. 나의 마지막 출근길을 위로해주고 응원해준다.


아파트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나의 그 길을 찬란히 비쳐준다.


겨울 낙엽들이 메마르다. 바삭바삭 그 길에 카펫을 깔아준다.


녹색 신호등이 얼른 오라 재촉한다. 나를 뛰게 한다.


멀리 보이는 지하철역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평소 같으면 빨리 잡아 먹히려 서두르겠지만,

이젠 먹거리가 되지 않는다. 간절히 입맛 다시게 만들 것이다.


플랫폼의 사람들이 분주하다. 그 사이에 내가 여유롭다.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아저씨가 뒤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다.

머릿결이 아직 마르지 않은체 손가락 춤을 추며 메신저를 하고 있는 아가씨,

교복을 멋스럽게 입고 수다 떠는 학생들,

앞에 앉은 총각을 노려보고 계신 곱슬머리 아줌마. 하지만 총각은 머리를 푹 숙인 체 대답이 없고...

저마다의 삶이 있는 그들의 표정을 지나치며 보지 못했던 바보 같은 나...


출근길마다 지옥 같았던 사람들의 비좁음이, 마지막이라는 미명 하에 따뜻함으로 느껴진다.

숨 막힘으로 느껴지던 일상이 정겨움으로 느껴진다.

빨리 가라 재촉하던 조바심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움으로 곁에 조금 더 있어달라 붙잡는다.


눈앞을 어지럽히던 광고판은 오색 찬란하게 뽐낸다.


환승역의 가장 짧은 동선을 따라 종종걸음 한다.

오늘은 여유 있게 움직이려 했지만 버릇 들린 내 근육과 관절들이 제 멋대로다.


길게 줄 서있는 대형 환승역... 나는 저 나란함을 못 견뎌했다.

지금도 식은땀이 절로 난다.

여전히 김밥 같은 급행을 멀리하고 완행에 몸을 싣는다.


여기 완행에 앉은 사람들은 나와 같이 공황장애 환자들일까?

되지도 않는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다.


외부에 있는 환승역이 춥다.

하지만 왠지 나의 마음은 따뜻하다. 설렌다.


한강 철교 위에 철마는 무심한 듯 달린다.

내려다보이는 파란 한강은 그저 아름답게만 펼쳐저 있다.


세 번의 환승동안, 각 색깔의 열차는 저마다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지방색 마냥, 마치 서로의 사투리를 쓰는 것 마냥.

서로 다른 지역출신 사람들이 섞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터에 상륙하는 기분인 을지로 입구 역이다.

사실 을지로 3가 역이 더 가깝다.

조금 더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항상 이 역을 선택하는지도 모르겠다.


독일 분식, 국수 대장... 구수한 빵 냄새, 은은한 커피 향... 사람들의 발걸음...

색깔들의 향연 안에서 이정표가 가리키는, 회색빛이었던 나의 지하도로.

그 길을 따라 마지막 전쟁터로 걸어간다.


마지막 날까지 5분 지각이다.

고속 엘리베이터는 나를 급하게 내려준다.


"안녕하십니까?"

여기서의 마지막 아침 인사다...


모르핀을 맞은 듯 아무 기억이 없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퇴근길은 가장 아름다운 야경이 되었다.


안녕... 수고했어...




* 아내에게 불러 줬던 결혼식 축가는 100번을 듣고 50번을 불러보며 연습했습니다.

퇴직의 변은 그보다 못한 10번을 써보고 30번을 되네여 봤습니다. 떠듬떠듬 떨리는 목소리로, 그래도 토시 하나 놓치지 않고 다행히 전부 읊조렸습니다.


표현해야 할 말들이 많지만,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감사했고, 또 죄송하고, 또 부족한 저때문에 고생하셨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 합니다. 정말 고생하셨고,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근 10년 동안 근무하면서 많이 웃기도 하고, 많이 울기도 하고, 많이 신나기도 하고, 많이 힘들어도 했습니다.

그리고 육상의 첫 직장으로서 많은 것을 이뤘습니다.

우선 결혼을 했고요, 차도 샀고요, 애들도 셋씩이나 얻었고요, 요즘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내 집 마련도 했고요.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을 여기에서 이뤘습니다.

또 잃은 것도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제 나이를 잃었고요, 아버지를 떠나보냈고요, 그리고 장인어른을 떠나 보내드렸고요, 또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자신감도과 행복도 잃었었고요.

이렇게 인생의 희로애락을 전부 느끼면서 여기는 회사라는 차원이 아닌, 당연히 함께 해야 할 가족이라고 느꼈습니다. 가족의 품을 떠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가족의 품을 떠나 이 잔인한 세상에 나선 다는 것이 또한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마음을 고쳐 먹고, 이 실패가 좌절이 아닌 또 다른 성장을 위한 발판이라고 생각하고 힘내 보려고 합니다.

여기 계시는 우리 가족 분들, 조금만 더 고생하시고, 조금만 더 계속하신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좌절하지 마시고 힘내십시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부성 맨트 시작)

사장님, 그동안 굽여 살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회사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잘 살아가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모든 직장인 분들께...

 회사 동료들은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한 번씩 되새겨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전 06화 EP5. 발가벗기에 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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