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트 파이터

by 은빛바다

복싱을 배우면서 자주 유튜브를 보게 된다.


유명한 복싱 경기를 검색하면 유튜버가 분석한 동영상이 뜬다.


중요한 장면에서 어떻게 펀치를 휘둘렀는지 또 어떤 페인팅을 썼는지 자세하게 설명한다. KO 장면을 편집해서 슬로우로 반복 재생까지 해준다.


마찬가지로 유명한 복싱 선수를 검색하면 경기 동영상과 분석까지 잘 나와 있다.


나는 그런 기술을 기억하고 있다가 체육관에서 거울을 보며 따라 한다. 반복해서 그 자세가 몸에 배이도록 노력한다.


이런 방법은 나만 아니다.


링 사이드에 휴대폰 거치대를 두고 자신의 스파링을 촬영하는 관원도 있다. 경기 방식이나 폼을 분석하고 다음 스파링을 위해 교정하는 것이다.


결국 동영상이 스승이다. 그렇게 실력을 쌓아간다.


자신감이 생긴다. 예전에는 상대가 때려보라고 깐족거리면 주먹을 뻗을 수 없었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콧잔등으로 잽부터 나간다.


매주 4~5번 체육관에서 훈련했고, 금요일 저녁마다 스파링을 뛰었다. 꾸준하게 2년 지나자 거리에서 깡패가 시비라도 걸어주기를 바란다. 만일 그런 상황이 생기면 흠씬 패버릴 것 같다. 헛바람이 든 것이다.


일상에서 눈과 손이 빨라지는 것을 느낀다. 방에 먼지를 털다가 실수로 벽에 걸어둔 장식품이 떨어지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서 잡는다.


예전에는 화들짝 뒤로 물러섰을 텐데 나도 모르게 적극적으로 변한다. 미트를 받으면서 팔을 휘두르던 행동이 몸에 배인 것 같다.


그렇다고 싸움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다. 정작 싸울 상황이 되면 꼬리를 내린다.


주말에 친구와 만날 약속으로 교외 도로를 달리다가 자전거 라이더와 시비가 붙는다.


자전거가 도로를 막으며 달리자 내가 경고음을 울리면서 추월한다. 붉은색 신호등에 걸려 정차하는 도중에 뒤따라 온 라이더가 창문을 두드린다.


“왜 그렇게 빵빵거리고 지나가요?”


“자전거가 앞길을 막고 있었잖아요. 그렇게 도로 한가운데를 달려도 돼요?”


“그건 모르겠고. 아까 클락션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어요.”


적반하장이라는 고사성어를 이럴 때 쓰는 것 같다.


헬멧에 선글라스에 복면까지 둘러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서른 남짓한 목소리다. 자전거를 타서 그런지 마른 몸매다.


이 양반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고함을 지르면서 거칠게 대응할 수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려 곧장 복면을 두른 얼굴에 주먹을 꽃을 수 있는데, ‘참았다’가 아니라 솔직히 ‘쫄렸다’. 그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격투기를 배웠다고 해서 성격이 거칠게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제 나이가 50이다.


라이더와 눈싸움만 하는데 신호등이 파란불로 변했다. 참으로 싱겁게도 서로 갈 길을 갔다. 만일 성질이 있는 놈이라면 당장 붙었을 것이다.


싸움은 뒷일을 고려하지 않는 배짱이다. 나는 내일 출근해야 하고, 얼굴에 상처가 생기면 직장 생활에 피해를 당한다. 더구나 집에서 아내가 싸움질이나 하는 남편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배짱이 없으면 싸움에 얽힐 수 없다.


***


반면 배짱이 없어도, 개념이 없으면 싸움에 얽히게 된다.


체육관에서 전설적인 친구가 있다. 신창곤, 20대 초반, 고등학교 졸업 후 하는 일 없이 빈둥대면서 지내는데 2년 동안 깽값이 2천만 원이라고 한다. 대학에 들어가려는 의지도 없고, 직장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군대 영장만 기다리는 상태다.


항상 검은색 두터운 안경을 쓰고 다닌다. 스파링을 할 때 말고는 그 안경을 벗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범생으로 보인다고 할까? 전혀 주먹과 상관없는 인상이다.


인사할 때는 조금 다르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어깨를 움츠렸다가 폈다. 껄렁하다.


나랑 스파링을 뛰었는데 다른 관원과 다르지 않다. 주먹이 날카롭다거나 쉽게 흥분하는 기색은 발견할 수 없다. 어쩌다가 2천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날리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저녁에 승강기에 같이 탄 창곤을 편의점 벤치로 끌어당긴다. 나는 캔맥주를 따주고 과자 봉지를 뜯으면서 묻는다. 궁금한 건 꼭 알아야 하는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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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깽값 엄청나다며? 왜 싸우는 거냐? 힘이 남아 돌아?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것만으로도 지칠 텐데.”


“그냥 참지 못 하겠어요.”


“뭐를?”


“그냥 그 사람의 눈빛이요.”


“눈빛이 어땠는데?”


“그냥 기분이 나빴어요.”


“무조건 눈빛이 기분 나쁘면 패고 보는 거야?”


“그냥 대화를 나누다 보면 주먹이 나가게 되더라고요.”


계속 ‘그냥’으로 대답하는 창곤에게 집요하게 묻는다.


“먼저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한 건 아냐? 네 태도에서 말이야. 또 네가 복싱을 배우지 않았으면 그렇게 때릴 수 있었을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내 말에 기분이 상했나?


두터운 안경 너머의 눈빛을 유심히 살피니 의외로 평온하다. 마치 세상 일에 관심이 없는 어린아이 같다. 그런 눈빛을 가진 것도 희한하고, 더욱이 이런 녀석이 함부로 주먹을 휘두른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일종에 자기만의 자극 버튼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치부를 건드렸다고 느끼면 욱! 하고 폭발하는 성격 말이다.


빈 캔맥주를 쓰레기통에 넣는다. 창곤이 헤어지는 도중에 휴대폰 번호를 달라고 한다.


잠시 머뭇거렸다. 나중에 어떤 식으로 연락이 올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으로 찾아와서 돈을 꿔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경찰서인데 신원 보증을 해달라고 하거나, 미심쩍은 태도를 보이다가 연락처를 나눈다.


한동안 창곤은 체육관에 발길이 뜸하더니 추석 명절에 나에게 문자를 보낸다.


- 형님, 잘 지내시죠? 전에 잘 얻어먹었어요. 한가위 잘 보내시고요. 늘 건강하세요.


읽는 순간, 이렇게 예의 바른 녀석이 왜 그렇게 사람을 때리고 다니지? 옹호하는 입장이 된다.


***


샤워 후 옷을 갈아입는데 노관장이 다급하게 문을 연다.


“형님, 혹시 차 갖고 오셨어요?”


늦은 저녁이다. 집에서 아내가 차려놓는 저녁 식탁이 기다리고 있다.


“왜? 무슨 일 있어?”


“창곤이가 지구대에 있대요. 얼른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오늘 제가 차를 안 갖고 왔어요.”


또? 이런 망할 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체육관 뒷정리는 코치진에게 맡기고 얼른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다. 뻔한 내용이라 경찰서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입을 열지 않다가 노관장이 툭 던진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목소리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들어 있다.


“복싱 배워봐야 아무 쓸모도 없고, 길거리에서 사고 치기 딱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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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대 문을 열자 창곤의 등짝이 눈에 띈다. 검은 안경테가 귀에 걸려 있다. 곱슬머리에 항상 입고 다니는 검은색 트레이닝복, 그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다.


다음 장면이 그려진다. 경찰에게 사건 경위를 듣고, 노관장은 괜히 감정이 격해진 척하면서 창곤을 윽박지르고, 피해자에게 굽신거리며 합의를 봐달라고 하고, 아이고~~ 돈은 또 얼마나 깨질는지.


“신창곤!”


노관장이 단호하게 이름을 부른다. 보여주기 식으로 몇대 쥐어박아야 한다. 그래야 합의가 조금이라도 편해진다.


돌아보는 창곤의 얼굴이 퉁퉁 부었다. 안경알이 깨지고. 이마와 뺨에 찢긴 자국도 있다. 이거 어지간한 상처가 아니다.


“너 왜 이래?”


구석에 앉은 청년이 바라보다가 눈길을 피한다. 저 놈이구나. 맞았다는 사실에 왠지 화가 나기 보다는 다행이다 싶다. 돈 벌었다.


뻔한 레퍼토리가 신선하다. 거리를 지나가다가 술집 앞에서 담배 피우는 광경을 쳐다봤는데 청년이 손짓으로 불렀다. 술 냄새가 지독하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고 따지기에, 창곤이 내가 내 눈으로 보는데 뭐가 어떠냐고 대답해서 싸움이 붙는다.


상대는 레슬링 선수다. 태클을 건다. 안경이 떨어진다. 창곤을 바닥에 눕히고 죽을 정도로 파운딩을 때리더란다.


순식간에 노관장의 태도가 바뀐다. 이거 신난다.


“도대체 사람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는 법이 어디 있어? 누구야? 깡패야? 우리 창곤이는 이제까지 착하게 운동만 하는 애야! 이거 절대로 합의 안 해줘.”


나는 흐물거리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다. 창곤이 등을 다독거리는데 격려한다.


하긴 널린 게 체육관이고, 격투기를 배우는 사회인이 한두 명 아닌데, 조금 배웠다고 깝죽대다가 이런 식으로 당하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 도로에서 얽힌 라이더도 겉으로는 맹물처럼 보이지만 무술 고수였을지도 모르고. 어쭙잖은 내 복싱 실력으로 대들었다가 도로 한복판에서 길게 뻗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창곤아, 저 청년 술 취했잖아. 그거 피하지 않고 맞았어? 태클 들어오면 스텝으로 물러서면서 위에서 목을 누르면 되잖아.”


나는 유튜브에서 본 격투기 지식을 들추며 아는 척한다. 스트리트 파이터인 창곤이면 저 청년을 제압할 수는 없더라도 이렇게까지 맞은 건 이해할 수가 없다.


창곤이 검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덤덤하게 내뱉는다.


“그냥 맞았어요.”


“뭐라고? 왜?”


“그냥요.”


아하, ‘그냥’…….


이제 이 자식도 철이 든 걸까.


뭔가 이해가 될 듯 말 듯, 나는 창곤의 등을 쓸어내리며 희한하게 칭찬한다.


"그래, 잘 했다……. 차라리 그게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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