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이면 버팔로 복싱 체육관과 정기전을 갖는다. 여름에 선수 명단을 맞추고 1달 정도 훈련한 뒤 선수로 출전한다.
그곳 관장은 올스타에서 5년 동안 수석코치 생활을 한 노관장 후배다.
노관장이 체육관에서 나를 볼 때마다 이번 시합에 나가달라고 부탁한다.
“버팔로에서 40대 이상 헤비급이 출전하는데, 저희 체육관에서 그에 대응할 선수는 형님밖에 없어요.”
사회인 복싱 경기는 먼저 연령을 나눈다. 다음으로 체급을 구분한다.
흥미가 당긴다. 이제까지 2년 동안 노력한 내 기량을 공식적인 무대에서 시험을 해볼 수 있다. 이기고 지고는 나중의 문제다. 권투협회에서 주최하는 생활인 체육대회도 아니라 부담이 없다. 시합 도중에 KO를 당하면 그것 또한 경험으로 여기면 된다.
하지만 훈련기간이 문제다. 1달 동안 코치진에게 혹독한 지도를 받아야 한다. 체육관의 이름을 걸고 출전하는 시합이니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출전 선수가 없다고 하니, 나는 싫지만 노관장의 부탁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척 선수 등록을 허락한다. 사실 속으로는 엄청 흥분한 상태다.
퇴근 후 곧장 체육관으로 온다. 다른 선수와 기초 체력 훈련부터 한다. 선수는 총 14명, 그중 여성이 3명이다.
경력은 다양하다. 4개월 복싱을 했는데 시합 소식을 듣고 무조건 신청한 청년도 있고, 나처럼 2년 동안 아무 대회도 나가지 않다가 이번 기회에 참석한 경우도 있다.
전부 이 시합에 참석한 목적은 같다. 복싱으로 나 자신을 증명하는 것.
격투기에서 중요한 요소는 3가지가 있다. 체급, 체력, 실력.
체급은 어쩔 수 없다. 체육관끼리 친목 대회에 계체량까지 완벽하게 맞추는 건 무리다.
체력은 무조건 길러야 한다. 링에서 상대 선수를 마주 보면 엄청 긴장하기에 체력이 빨리 떨어진다.
3분 2라운드 시합이지만, 복싱은 주먹만 몇번 휘둘러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운동이다. 코치진은 스테미너 확보를 위해 선수에게 고기 위주 식사를 권한다.
선수들은 3개조로 나눠 먼저 체육관에서 1주 동안 체력 훈련만 한다. 버피, 런치, 스쿼드, 플랭크, 달리고, 뛰고, 구르고, 때리고, 할 수 있는 운동은 다한다.
가장 인상 깊은 건 집중력과 사이드 스텝을 강화 훈련인데, 코치가 중앙 의자에 앉아 테니스 공을 던진다.
선수는 왼쪽으로 3보 이동해서 받거나 오른쪽으로 3보 이동해서 받아야 한다. 받은 공은 곧장 코치에게 던져줘야 한다. 코치는 또 공을 받자마자 왼쪽과 오른쪽을 선택해서 던진다. 이걸 30회 정도 마치고 나면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는다.
실력은 선수 체형에 맞춰 코치가 개발해준다. 팔이 길면 스트레이트 위주의 아웃복서로, 키가 작으면 무조건 파고드는 인파이터로 훈련을 시킨다.
내 경우는 일단 고개를 박고 레프트 잽을 던진다. 다음으로 바싹 붙어서 바디를 두드리다가 마무리 훅 치는 패턴을 반복한다. 버팔로의 상대 선수의 신장은 184cm, 리치가 길다. 접근전이 아니면 해답이 없다.
훈련을 마치면 늦은 저녁이다. 간혹 노관장이 피자를 들고 와서 격려한다. 선수들의 결속력은 강해진다. 서로 힘을 내자고 다독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뿌듯하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긴다. 군대에서 행군 후 처음이다. 이번에 구입한 복싱화에 발이 맞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다.
바늘에 실을 꿰어 물주머니를 통과시킨다. 실을 걸치자 물을 빨아들인다. 집에서 층간소음을 조심하며 발뒤꿈치로만 걷는다. 아니면 아예 네 발로 기어간다. 발바닥에 걸친 실이 덜렁거린다.
아내가 징그럽다며 별일이라고 난리다. 반면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은 이런 과정을 통해 강해지고 있다는 희열이 채우고 있다.
***
시합은 청소년부가 먼저다.
다음으로 여성부, 다음으로 남성부 체급이 낮은 순으로 시작한다. 나는 가장 마지막에 출전하는 선수가 된다. 체급 때문에 의도치 않은 메인 게임이 된 것이다.
청소년부는 웃음이 터진다. 별명이 UFO 시합이다.
파이팅 벨이 울리면 링 중앙에서 붙어야 하는데, 가드를 잡고 링줄을 따라서 사이드로 돈다. 그러다가 동시에 링 중앙으로 나와 주먹을 치고 받은 뒤 떨어져서 다시 링줄을 타고 돈다. 오래 전에 장터 마을에서 본 팽이치기 같다.
“붙어! 붙으란 말이야!”
세컨드 코치가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나이 어린 선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버팔로답게 여성부에서 다다다다 잰걸음으로 달려오면서 붕붕 훅을 휘두르는 닥돌(닥치고 돌격) 선수가 등장하고, 성인 남성부에서는 바디를 맞아 다운이 나오기도 한다.
친선 경기에서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상호 존중하는 예의가 먼저다. KO가 나오지 않으면 대부분 경기는 무승부로 양쪽 선수의 손이 같이 올라간다.
작은 축제다. 버팔로에서 음료수와 간식을 든든하게 준비해왔다. 시합을 마치면 전부 호프집으로 이동해서 술자리로 마무리를 할 것이다.
드디어 내가 올라간다. 스파링을 꽤 해봤지만 이렇게 많은 관객은 처음이다. 떨려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상대 선수는 예상보다 더 커 보인다. 팔과 다리가 가늘다. 헤드기어를 써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래도 꽤 잘 생겼다. 넥타이를 매면 중소기업의 건실한 과장처럼 보이는 인상이다.
세컨드 코치가 마우스피스를 끼워주면서 당부한다.
“절대로 떨어지면 안 돼요. 바싹 붙어서 바디 바디 훅 알죠? 형님, 팔이 빠질 정도로 훈련했잖아요. 자신감을 가져요.”
링 중앙에서 공손하게 글러브 터치를 한다. 방금 만난 사이다. 이름만 안다. 무슨 직업인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서로 주먹을 휘둘러야 한다. 프로 선수는 이렇게 싸워서 돈을 받겠지.
나를 위한 파이팅 벨이 울린다. 링 중앙에서 탐색전을 벌이다가 상대 선수의 잽을 맞는다.
의외다. 예상보다 약하다. 다시 슬쩍 가까이 간다. 역시 툭툭 던지는 주먹의 강도가 약하다. 이거 만만하다. 나는 자신감이 생긴다. 연습한 대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어퍼를 치려고 한다.
원투. 복싱의 기본이다. 왼손 잽과 오른손 스트레이트, 거기에 원투원투, 다시 원투원투 상대 선수가 연속으로 날린다. 더구나 정확하다. 계속 맞으니 허리가 젖혀진다.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
“형님, 고개 숙이고 가드 올리고 밀어요. 맞아도 별 거 아니에요. 맞고 들어가세요. 형님, 강하고요. 강하게 보여야 해요. 잘하는 거 탱크! 탱크! 탱크! 무조건 붕붕 훅 3방 휘둘러요!”
덩치로 밀어붙인다. 상대가 왼손을 쭉 뻗어 내 얼굴에 댄다.
내가 훅을 휘두르지만 주먹이 닿지 않는다. 그렇게 헤매는 사이에 다시 원투원투, 또 원투원투 내 얼굴에 지겹도록 맞는다.
많은 관객이 보고 있다. 개망신이다. 더 열받는 건 상대가 때리면서 미소를 짓고 있다.
휴식 시간에 코치는 무조건 붙으라는 지시밖에 없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쉽지가 않다
링 아래에서 올스타 관원들이 힘내라고 파이팅! 을 외친다. 정신이 없는 상태이지만 내 가슴이 짜릿해진다.
“어라? 저기 보세요.”
상대 선수가 벌컥거리며 물을 마신다.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호흡이 거칠다. 세컨드 코치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비시시 웃는다.
“지쳤어요…….”
이래서 경력이 중요하다. 나는 2년 동안 꾸준하게 운동했고, 저 선수는 고작 몇개월 안 된 것 같다.
1라운드에서 그렇게 원투를 던졌으니 체력이 다 빠졌을 것이다.
나는 다시 자신감을 얻는다. 2라운드 작전을 세운다. 내가 맷집이 좋으니 이마로 펀치를 맞으면서 들어간다.
야구, 축구, 배구, 1시간 넘게 경기를 치른다. 선수는 퇴장할 때 관객과 호응하고 서로 장난을 칠 정도로 여유가 있다. 경기 도중에 체력을 조율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구기 종목은 상대의 주먹을 경계하는 긴장도 없다.
반면 복싱은 3분 동안 전후좌우로 빠른 스텝을 밟는다. KO가 나지 않으면 중간중간 30초 쉬면서 그것을 12라운드 동안 해야 한다. 상대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대처하며 쉴 새 없이 맞고 때린다.
생활체육 복싱 2라운드만 뛴다고 가볍게 보는 경우가 있다. 1라운드 후반부터 헉헉거리고, 2라운드 중반부터 체력이 훅 떨어져서 팔이 올라가지 않는다.
역시 파워가 달라졌다. 1라운드에서는 몽둥이로 치는 거라면, 2라운드는 회초리로 때리는 것 같다.
나는 이마로 상대의 펀치를 맞으면서 밀고 들어가 양훅을 던진다. 자신의 펀치가 먹히지 않으니 수비가 급급하다.
주먹을 맞은 상대의 얼굴이 돌아가자 링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나는 거기에 도취되어 새로운 힘이 솟는다. 연습한 대로 바디 바디 훅도 넣어본다.
상대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원투를 꽂으면서 거리를 벌린다. 나는 계속 맞으면서 들어가 양훅을 던진다. 붙을 때마다 누구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거친 숨소리가 가득하다.
서로 주먹을 휘두르며 공방이 이어지는 도중에 경기 끝나는 종이 울린다. 체육관에 박수가 천둥처럼 울린다.
판정은 무승부, 심판은 동시에 양쪽 선수의 손을 올린다.
상대 선수와 포옹하는데 왠지 속이 후련하다. 뭔지 모르지만 가슴에 뭉친 찌꺼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다.
그 동안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내 밑바닥까지 끌어올리며 싸웠다. 승패를 떠나 미련이 남지 않는다.
모든 경기가 끝나자 링에 양쪽 체육관의 관장과 코치진이 올라간다. 이 경기를 준비하느라 뒤에서 고생한 운영진이다. 각자 자기 소개와 소감을 한마디씩 한다.
버팔로 막내 코치가 인상 깊다.
“저희 체육관 선수랑 열심히 준비했는데, 이렇게 잘할 줄 몰랐어요. 뒤로 갈수록 막 가슴이 부풀어 오르더라고요. 세계 타이틀매치보다 더 멋있었어요. 여러분, 사랑합니다.”
체육관이 터질 것 같은 함성이 터진다.
***
호프집으로 이동한다.
체육관을 나누지 않고 앉아 맥주를 마신다. 새로운 술친구가 생긴 것 같다. 샤워를 못 해서 땀 냄새가 진동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복싱이 공통 화제이고 방금 시합을 치렀으니 서로 나눌 이야기가 많다. 체육관의 첫인상, 시합하다가 맞은 자국, 어느 선수의 복싱 스타일 분석 등 공통된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
역한 땀 냄새에 여성 종업원이 미간을 찡그리며 주문을 받는다. 비싼 안주를 더 시키면서 매상을 올려준다.
노관장이 일어서서 건배를 제안한다.
“오늘 시합을 위해 선수랑 코치랑 모두 수고하셨어요. 내년에도 계속 이어 가겠습니다. 올스타, 버팔로, 모두 신나게!”
나와 시합을 뛴 선수와 맥주잔을 부딪친다.
링에서 원투를 던질 때는 이빨을 드러낸 늑대 같았는데, 호프집에서는 귀여운 말티즈 같다.
나이, 경력, 직업 등 서로 궁금한 내용을 묻는다. 나보다 7살 어리고, 5개월 복싱을 했으며, 직업은 의외로 유치원 원장이다.
“어릴 때부터 복싱을 해보고 싶었어요. 제가 키만 크지 엄청 찐따였거든요. 눈 딱 감고 체육관에 등록했는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어디에 가서도 꿀리지 않고.”
나와 비슷한 경우다. 나도 늦은 나이지만 복싱을 잘 시작했다고 감회에 젖는다.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정말 경기 멋있었어요.”
버팔로 여성 관원들이 칭찬하면서 나와 잔을 부딪친다. 다음에 또 시합에 나오라고 부추긴다. 멋진 경기를 한 프로 선수가 이래서 돈을 많이 버는구나.
사방에서 들이미는 잔을 부딪치느라 나는 일찍 취기가 돈다. 경기를 치른 뒤라서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제 체육관에서 개인 훈련이 없으니 시원하고 또 섭섭하다.
나는 화장실로 향한다.
얼굴을 씻으면서 세면대의 거울을 보는데, 왼쪽 눈가에 붉은 상처가 있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영광의 상처, 나는 얼굴을 바싹 붙이고 자세하게 확인한다.
문득 눈동자가 뜨거워진다.
취한 걸까,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어허허허 웃으면서 세수한다.
해냈다.
나는…… 복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