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관장과 친한 형 동생으로 지내고 있다. 밤늦게까지 술자리에서 갖은 적도 여러 번이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복싱 선수였는데 실업팀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프로 전적을 잘 쌓아가는 도중에 심한 훈련으로 허리를 다쳐 선수 생활을 접었다.
체육관에 만날 때마다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도 그렇고, 아홉 살 차이가 나기에 형님으로 불러주면서 항상 예의를 갖춘다. 참 괜찮은 친구라고 여긴다.
어쩌다가 복싱 기술에 대해 물으면 세세하게 잘 가르쳐준다. 늦은 나이에 복싱을 시작한 나를 배려를 해주는 게 고맙다.
덕분에 나는 장기 회원이 된다. 이제 갓 등록한 신입 회원에게 스파링을 받아주며 약간의 기술을 알려줄 실력은 된다.
러닝머신으로 올라가는데 노관장이 다가온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간판 보수는 남식이 형님이 해주시고요. 창문 선팅은 현교가 해줬어요. 샤워실 물 새는 건 병석이 형님이 해결을 해주시고요.”
체육관 관원은 직업이 다양하다. 노관장은 그들을 봐뒀다가 필요할 때마다 부탁한다.
친한 사이라 거절할 수 없다. 더구나 자기가 운동하는 체육관 관장 아닌가. 재료비만 받고 봉사를 해준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나한테는 돈을 꿔 달라고 한다. 한두 푼이 아니다. 가만히 더 들어보면 그냥 달라는 식이다.
그 동안 내가 1년 단위로 등록하면서 가끔 술도 사줬다. 나잇값 하느라고 중등부 아이들에게 피자를 사주기도 했다. 그게 다 친하게 지내려는 의도였다.
반발이 일어난다. 그런 이야기를 러닝 머신에서 하다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렇게 호구로 보이지는 않을 텐데.
“형님은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잖아요. 그 동안 목돈도 모았을 테고…….”
체육관이 어려운가? 아니면 이제 친한 사이가 되었으니 작업에 들어가는 건가?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처음으로 운동부 출신에게 의구심이 일어난다. 거기는 일반인과 사고방식이 다르지 않던가.
일단 나는 대답을 보류한다. 이제까지 돈을 꿔줘서 좋은 결과를 당한 적이 없다.
노관장이 구겨진 얼굴로 돌아선다. 러닝머신에서 버튼을 누르는데, 갑자기 뒤에서 대포 터지는 소리가 난다.
팡!
화들짝 돌아보니 벽에 붙은 펀칭볼이 까닥거리고 있다. 펀칭볼이 흔들리는 모양새가 노관장이 달려가면서 온 힘으로 친 것이다.
다음으로 더 가관이다. 노관장은 맨손으로 샌드백을 친다. 기합 소리가 평범하지 않다.
“이 씨, 이 씨, 이 씨, 이 씨.”
온갖 성질을 부리면서 과격하게 친다.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내가 돈을 꿔주지 않는다고.
저게 운동부 출신의 맨 얼굴인가 싶다.
다음부터는 나를 만나도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인사한다. 발음도 이상하다.
“형님, 안냐세요.”
새로운 신입 코치가 온다. 노관장이랑 관계를 회복할 계기로 나는 저녁밥을 같이 먹자고 제안한다.
체육관 베란다에는 파라솔이 있다. 녹슨 대형 꽁치통조림에는 항상 담배 꽁초가 그득하다. 꽁초를 비워야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코치의 대답은 한결같다.
“엊그제 비웠는데 그새 이만큼 찬 거예요.”
건강을 위해 그렇게 땀 흘리며 운동하면서 또 담배를 피우는 이유를 모르겠다.
중국집에 짜장면과 탕수육을 주문한다. 나, 노관장, 신입 코치가 파라솔에 둘러앉아서 랩 포장을 벗긴다.
노관장은 말이 없다. 음식을 먹는 동안 이것저것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돈 안 꿔줘서 자기 삐쳤다는 표현을 그렇게 하고 있다. 탕수육이 목에서 걸릴 것 같다.
결정적으로 노관장은 자기 짜장면을 비우자마자 나무젓가락을 툭 던진 채 일어선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신입 코치도 황급히 일어선다.
나중에 노관장의 변명을 들었는데, 신입 코치가 끝까지 남아서 빈 그릇을 치우리라 알았다. 노관장이 일어서니 엉겁결에 따라나서서 뒤처리를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어이없게도 빈 그릇을 치우는 게 내 몫이다. 내 돈으로 밥 사주고, 내가 잡일을 처리한다.
그때 나는 이 체육관에서 떠날 결심을 한다.
저 자식은 도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걸까? 이제까지 형 동생 하면서 너무 친하게 지낸 게 잘못이었나? 온갖 의문이 일어나지만 더 고민하지 않는다.
나 마음 편하게 운동하려고 등록한 체육관이다.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다. 그때 나에게 운동부 출신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이 생긴다.
마우스피스나 붕대는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닌다. 운동을 마치면 집에서 세탁해야 되기 때문이다. 반면 글러브와 운동화를 사물함에 넣고 다닌다. 부피가 커서 가방에 담기에 불편한 품목이다.
나는 그것을 가방으로 꽉꽉 눌러 담는다. 다들 그런 행동을 의아하게 여긴다. 사물함을 비우는 건 이제 체육관에 나오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가까이 다가온 신입 코치가 눈으로 쓱 훑고 지나가더니 곧장 노관장에게 달려간다. 당황한 노관장은 굳어버린다.
가방을 어깨에 걸고 체육관에서 나서는데, 노관장이 다가온다.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슬쩍 걸음을 늦춘다. 노관장도 자존심이 있는지 주저하다가 입을 뗀다. 이럴 줄 몰랐다는 반응이다.
“형님, 갑자기 왜…….”
거기까지만 듣고 나는 체육관 문을 확 열면서 나와버린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벙벙한 노관장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화가 난다. 욕설도 튀어나온다. 젠장, 도대체 나를 뭘로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