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철 복싱 체육관

by 은빛바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복싱 체육관을 찾는다. 미트 소리와 샌드백을 치는 감각이 그립다. 집에서 가까운 복싱 체육관 몇군데 고른다.


아내는 얼른 나가라고 밀어준다.


“복싱할 때가 더 보기 좋았어. 장비를 버리지 않고 베란다에 둘 때부터 알아봤지.”


이미 나는 이 스포츠에 중독이 돼 있다. 베란다에 둔 박스에서 글러브를 꺼내는데 왠지 가슴이 뭉클하다.


저녁마다 자전거를 타고 근처 체육관을 답사하기 시작한다.


“체육관 알아보러 왔는데요.”


문을 열면서 관장님에게 상담을 요청하면 테이블로 안내한다.


비용이나 시설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대부분 거기에서 거기다. 연회비가 5만 원 정도 차이고, 입관 당시에 샌드백용 글러브를 주는 것뿐이다.


개인적으로 관장님이 나이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올스타 복싱클럽에서 당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의외의 체육관을 만나게 된다. 신정철 복싱 체육관.


재래시장 앞 상가에 자리를 잡아서 주차가 어렵다. 임대료는 쌀 것 같다. 휴대폰 지도를 확인한 뒤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간판이 작아서 발견하기 어렵다.


직접 상담한 관장님은 플라이급답게 덩치가 적었지만 서글서글하고 붙임성이 좋다. 환갑은 지난 나이다.


검색을 해본다. 신정철. 선수 시절에 WBA 플라이급 세계 1위, 아쉽게도 세계 타이틀전에서 판정패를 당한다.


그후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청소년 지도에 앞장 선다. 학교마다 돌아다니며 많은 제자를 양성한다.


올스타 복싱 클럽 사무실에서는 생활체육대회 트로피가 벽을 가득 채웠지만, 신정철 복싱 체육관은 책상에 노트북만 놓여 있다. 구석에 2인용 상담 소파만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이다.


트로피로 체육관의 위상을 드러내는 허세는 나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다만 체육관에 자기 이름을 걸었기에 그만큼 운영에 책임감이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올스타 복싱클럽에 비해 3분의 1정도로 규모가 작다. 샤워실도 2인용이다. 하지만 나는 관장님에게 호감을 갖고 1년을 등록한다. 무엇보다 1년 관원비가 10만 원 저렴하다.


곧장 사물함을 배정받고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맨손으로 샌드백을 쳐본다. 가슴이 후련하다. 이 맛이 그리웠다.


KakaoTalk_20250907_185743273_06.jpg


“기본기는 된 것 같은데…….”


내 쉐도우 복싱을 본 관장님이 칭찬한다. 고등학생과 스파링을 주선하면서 조심스럽게 주의를 준다.


“오늘 처음 등록했거든. 나이가 많은 아저씨니까 살살 해.”


다시 해보는 스파링이 신선하다. 고등학생을 코너에 몰고 가볍게 연타를 날린다.


1라운드가 끝나자 관장님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달라진다. 어디에서 복싱 물 좀 먹었구나.


열을 받았는지 고등학생이 제안한다.


“한판 더 해요.”


나중에 알았지만 고등학생 중에서 제일 실력이 좋은 친구다. 코너에 몰려 두들겨 맞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하지만 2라운드 역시 비슷한 상황이 된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긴 아이라 자기만의 거리를 두면서 잽과 스트레이트로 승부를 본다. 그 거리를 깨며 바싹 붙어서 훅을 날리자 고등학생은 사용할 무기가 없어진다.


패자의 변명은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나이 많은 아저씨랑 스파링을 하니까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어요.”


하긴 타이틀매치가 걸리지도 않았고, 다음 날 출근하고 등교해야 하는 처지에 죽자살자 싸울 필요는 없다.


이 계기로 나는 관장님에게 확실하게 눈도장을 받는다.


“얼마 정도 했어?”


“2년 조금 넘었어요.”


“어디에서?”


“지방에서 살다가 직장 때문에 이 근처로 왔어요.”


거짓말로 둘러댄다. 괜히 올스타 복싱에 대한 이야기는 꺼낼 필요가 없다.


“잘 됐네. 가끔 학생에게 지도 스파링도 좀 해주고 그래.”


처음에는 그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체육관 본모습을 보고 납득한다.


놀이터 수준이다. 체계가 잘 잡힌 올스타와 결이 다르다. 비록 올스타만 아니라 다른 복싱 체육관이라도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관장님은 복싱으로 명성을 얻은 뒤 청소년 지도를 많이 다녔다. 학교에서 의탁을 받아 체육관에서 학생에게 복싱을 지도해준다. 그 영향인지 체육관에는 중고등학생이 많다.


수업을 마친 학생 대여섯 명이 우르르 들어온다. 등록한 관원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탈의실 바닥은 함부로 벗어던진 옷가지로 엉망이다.


곧장 상담용 소파에 널브러진다. 꼭 휴대폰을 꺼낸다. 자기 방 침대에서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는 그 자세다. 심지어 윗몸일으키기 운동기구에서 누운 자세로 1시간 동안 게임하는 녀석도 봤다.


더 기가 막힌 건 초등학교 학생끼리 링에서 공기놀이를 한다. 그러다가 깔깔거리며 지들끼리 잡으러 체육관을 사방으로 뛰어다닌다.


갑자기 옆에서 훅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는 줄넘기를 멈춘 적도 있다.


제일 가관은 샌드백을 타고 천장까지 오르는 녀석이다. 내가 그만두라고 소리치면 시큰둥하게 노려보면서 관장님에게 쪼르르 달려간다.


직원은 한봉진 코치 1명뿐이다.


그것도 학생 수업이 마칠 즈음인 오후 4시에 출근한다. 아이들이 체육관에서 떠들든지 장난을 치든지 개의치 않는다. 미트만 받아주면 자기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이다.


체육관의 시설이 그리 좋지는 않다.


군데군데 천장의 전구가 나가서 링 주변으로 어둑신하다.


샌드백은 옆구리가 터져서 녹색 테이프로 칭칭 감겨 있다. 빈 공간마다 아이들이 화이트로 쓴 낙서가 어지럽다. 누가 그렸는지 가드를 잡은 관장님의 캐리커처도 인상적이다.


아자아자. 파이팅! 겨울방학 다이어트 성공 GO GO! 중학교 빨리 가서 교복을 입고 싶다. 영어학원 가기 싫어. 아이유 HAPPY HAPPY 너무 좋아.


러닝머신마다 옆구리쪽 손잡이가 낡아서 덜그럭거린다. 달리는 도중에 손잡이를 짚으려다가 깜짝 놀란다.


KakaoTalk_20250907_185704128_09.jpg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런 거 상관없다. 운동 기구가 너덜거리든, 수건에 구멍이 나든, 탈의실 바닥이 움푹 꺼졌든, 냉난방이 안 되든, 자기만 편하면 된다. 하긴 도시에서 아이들이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뛰어다닐 곳이 있던가.


피해를 당하는 쪽은 성인이다. 특히 여성 관원은 멋모르고 등록했다가 불편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돈을 지불한 만큼 서비스가 안 되는 것이다. 자연히 발길이 끊게 된다.


관장님은 시설에 투자하기보다 립 서비스가 강하다. 그것도 너무 과하다.


운동하고 있으면 관장님이 다가와서 말을 건다.


펀치 치는 자세를 잡아주고,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묻기도 한다. 나름대로 배려라고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운동의 흐름이 끊겨 불편하기만 하다.


옛날 복싱 체육관에서는 관장님이 훈련하는 관원에게 몇마디만 해줘도 굉장한 응원이었다. 그만큼 권위적인 사회였다. 아직도 관장님은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평생 운동만 해서 그런지 고지식한 부분이 많다.


관장인 자신이 신경을 써주는 만큼 관원이 좋아하리라 착각하고 있다. 오히려 귀찮게 여기는 줄도 모르고.


아마 한코치를 대하는 태도도 그런 시절에서 기원하는지도 모른다.


더불어 관원끼리 서로 소개를 해주면서 유대감을 높이려고 한다. 끈끈한 정이라도 생겨 체육관을 떠나지 않으리라 여기고 있다. 나도 쉐도우 복싱 도중에 또래의 남성과 악수를 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여러가지 상황을 봐서 나는 짐작한다.


여기는 복싱 체육관을 처음 다니거나 나처럼 어리바리가 붙들리는 곳이구나.


이런 식으로 체육관을 유지하면 관장님 노후 생활은 걱정이 없겠네.

keyword
월, 수, 금, 토, 일 연재
이전 15화산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