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스타 복싱클럽에는 다시 찾아가지 않는다. 코치진에게 오는 연락은 무시한다. 그가 성질을 내며 펀칭볼이나 샌드백을 친 것은 일종에 협박이다.
노관장이 정말 나를 형님으로 여겼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다. 같이 밥 먹고 술 마시면서 개인적인 대화를 많이 나눴으니 동네 형으로 허물없이 대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어느 정도 친해졌으니 돈을 뜯어내려고 했는지도, 이렇게 떠날 줄 예상하지 못 했을 것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나는 어디까지나 체육관 관원일 뿐이다.
한동안 심란한 기분을 추스르다가 결국 단순하게 결론을 내린다.
나는 관원이고, 관장과 마음이 맞지 않아 체육관에서 나왔을 뿐이다. 뭐라고 언질도 않은 채 떠난 내가 한심하다. 그 꼴을 당했으면 성질이라도 한바탕 부려야 했다.
등록 기간이 아직 남았는데, 아내는 미리 지불한 관원비가 아까운지 툴툴거린다.
나는 복싱 장비를 전부 박스에 담는다. 베란다 구석에 처박아 버린다. 노관장의 얼굴이 떠올라 발끝으로 툭 차고 돌아선다.
운동하지 않으니 몸이 찌뿌둥해진다. 뱃살이 불어나는 것 같아 불안하다.
쉬는 날마다 집에서 지내니까 아내가 잔심부름을 시키면서 들들 볶는다. 어디든 집에서 나가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
등산을 선택한다. 오래 전에 산을 좋아하는 친구가 넘겨준 중고 등산화가 있다. 체육관처럼 등록할 필요 없이 주말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그만이다.
도서관 등산 야유회 경험을 되살려 쉬는 날마다 장비를 챙겨 산에 오른다. 정상에서 발밑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혼자 맥주를 마시는 맛도 괜찮다.
한동안 잘 다니다가 게을러진다. 확실히 같이 운동하는 동료가 없으면 자꾸 미루게 된다.
인터넷을 통해 산악회 카페에 가입한다. 닉네임을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멋있게 적는다.
황금빛태양. 조용필 노래 <여행을 떠나요> 가사에 나온다. 푸른 언덕에 배낭을 메고 황금빛 태양 축제를 여는~~~~.
확실히 나도 나이를 먹었다. 조용필이 언제 가수인데…….
약속 시간에 산 입구에서 모인다. 벤치에 앉아 있으니 산악회 대장이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건다.
“황금빛태양님 맞죠?”
듣는 순간, 얼른 닉네임을 평범하게 바꿔야겠다는 부끄러움이 먼저다. 너무 튄다.
회원이 다 모이자 동그랗게 둘러서서 자기 소개를 한다. 여성 회원 비율이 절반이다. 다들 유명 메이커가 새겨진 등산복이 현란하다. 은근히 기가 죽는다.
내 소개를 마치자, 신입회원이 왔다며 격하게 박수를 친다. 일단 기분은 좋다. 환영을 받으며 둘러보니 복싱 체육관과 달리 여기는 평균 연배가 높다.
산을 오르면서 호흡이 가빠진다. 그러면서도 처음 만난 회원과 대화를 나눈다.
산행 경력은 얼마나 되는지,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결혼은 했는지, 외길을 걷는 동안 산악회 회원과 도란도란 즐겁다.
오빠 형 동생 하면서 금방 친해진다. 나처럼 초짜에게 필요한 산행 지식도 알려주고, 버스를 타고 지방으로 원정 산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아마 참석율을 높이려는 것 같다.
정상에 이르면 산악회 카페에 올릴 기념 사진을 찍는다. 둘러앉아 간단하게 정상주를 마시고, 내려와서 식사하고 헤어진다.
물론 마음이 맞으면 2차 3차 술자리로 이어진다. 산악회에서 친해진 회원끼리 단단한 결속력이 생긴다.
쉬는 날마다 등산 가방을 챙기던 나는 1달 만에 진저리 치면서 탈퇴한다. 닉네임을 고치기도 전이다.
첫 만남에 신입회원이라고 나에게 박수를 치던 그들이 텃세를 부리기 시작한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사도 잘 받지 않는다. 나는 정상까지 혼자 산길을 걷는다. 산악회 회원은 내 앞뒤로 무리를 지어 지들끼리 깔깔대면서 먼저 가거나 따라온다.
정상주를 마시는 동안, 혹은 산에서 내려와 식사하는 동안 나는 소외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아무리 잘 보이려고 해도 모임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모든 이의 눈에 들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산악회 임원이 이번에 신입으로 들어온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으로 뒷마다를 까면 그를 형님으로 따르는 추종자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조치를 취한다.
어느 동호회든 왕따 문화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걸 해결하는 방법은 나도 지원금 같은 걸 내고 임원을 맡는 것이다.
내 나이면 대부분 산악회에서 회장 고문 등을 맡으며 중요 직책으로 활동한다.
산악회 회장은 버스 회장 사장이고, 고문이 번화가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호프집 사장이다. 시산제 같은 행사 때마다 건네는 찬조금도 만만치 않다. 그것으로 자기 위세를 떤다.
등산 장비도 메이커가 아니면 위축된다. 산행 전에 둥그렇게 서서 인사를 나누는데 왼쪽 가슴에 오바로크 친 상표를 훑는 눈길이 부담스럽다 못해 짜증이 난다.
에베레스트도 아니고, 고작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뿐인데, 등산 장비는 수백만 원이다.
게다가 얽히고설키는 남녀 관계가 왜 이리 복잡한지, 산학회 회장부터 그랬다. 20대 여성 회원에게 꽃집을 차려주고 산행 후 그곳으로 들리는 건 산악회에서 다 아는 불륜이다.
산악회를 그만 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가 온다. 나에게 처음 인사를 건넨 산악회 대장이다.
- 황금빛태양님, 탈퇴를 하셨더라고요. 왜 그러셨어요?
나는 한마디만 적어 보낸다.
- 더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