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무아 Sep 22. 2021

이식(移植)

   옮겨 심기


 "아이구 큰일 났네. 올해 배추 농사는 다 망쳤다."

 "김장 김치 배추는 사서 담아야겠다."


 밭 저쪽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인가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아뿔싸, 이게 웬일인가? 내가 어제 옮겨 심어 놓은 배추 모종들이 한결같이 고개를 푹 숙이고 비실비실 땅에다 몸을 눕히고 있는 게 아닌가?


 귀향한 첫해 초가을, 백일쯤 키운 후 수확하여 김장 김치를 담는다고 시매부가 배추씨를 뿌렸다. 싹이 트고 자라나 쏙쏙 땅을 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며칠 자라는 것을 지켜보니 하나, 둘, 땅을 뚫고 빽빽하게 고개들을 내밀어 올리고 있었다.

  중 실하게 자란 모종들을 골라 뽑아 땅이 비어 있는 다른 고랑으로 옮겨 심었다.  긴 고랑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로 가득 채워 심었다. 그게 어제 저녁나절의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간이 철렁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 맘대로 손을 대서 한 해 김장 김치 배추를 망쳐 버리는구나.

 큰시누 부부랑 작은 시누, 남편, 네 사람 모두 이건 못 쓰게 되었으니 뽑아 버려야 된다고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귀향 후 첫나들이를 위해 모인 날이다. 2박 3일 예정으로 지리산 산청 법계사를 다녀오기로 되어 있었다.


 먼 길을 떠나야 하니 밭일은 손을 댈 수 없어서 다녀와서 처리하기로 하고 그냥 두었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여행은 여행이다.


 '에라, 어쩔 수 없지 뭐. 잘난 척하느라 대형 사고를 한 판 쳤구먼.'


 큰시누가 정성스레 준비한 다양한 메뉴의 집밥 음식으로 어른 다섯 명이 다섯 끼나 해결해 가면서 가을산 산행을 재미있게 잘 다녔다.

 처음 가 본 법계사는 비탈진 좁은 땅에서도 비범한 기개를 품고 우뚝하니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라고 했다. 두세 시간 더 가면 천왕봉이라는데 난이도가 높은 편이라고 해서 법계사로 만족하기로 했다.

 오가는 길에 들른 산청 금호강가 식당에서 먹은 어죽도 정말 맛있었다. 강에서 오늘 막 잡아 올린 싱싱한 민물고기로 바로 끓여 낸다고 했다. 근처에 있는 시골 장터 대형 베이커리에서 갓 구워낸 쿠키랑 빵들도 고급지고 맛있었다. 가격도 착한 가격.

 깨끗하고 맑은 가을 산길의 정취를 흠씬 맛보며 어른끼리 편하게 잘 다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 같이 일단 고향집으로 향했다. 

 나는 배추 걱정에 마음이 무거웠다.

 차에서 내리자마 곧장 배추 랑으로 향했다. 

 

 ! 이런 게 기적일까?


 비실비실 죽어 가서 뽑혀 던져질 뻔했던 배추 어린싹들이 싱싱하게 생기를 머금고 꼿꼿이 바로 서 있는 게 아닌가?  

  반갑고 기뻤다.


 "어머, 어머. 이것 좀 보세요. 배추가 다 살아났어요!"


 이틀 전, 시든 배추를 보고 크게 걱정하던 때와는 달리 다들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혼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남편을 포함한 시댁 식구들 사이에서 완전 얼굴을 못들 뻔했던 내 처지를 바로 잡아 준 어린 배추싹들이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농촌에서 자라진 않았지만 태어나서 20년 가까이 한 집에서 살았던 친정집에는 꽤 넓은 텃밭이 있었다. 해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봄날이면 엄마랑 이웃 아주머니들이 자기 집에 있는 꽃모종들을 서로 바꾸어 나누면 마당 텃밭 가장자리에 옮겨 심곤 . 학교 실과 과목 수업에서는 묘목이나 모종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 자리를 바꾸어 심는 이식을 배운 적도 있었다.


 한참 지난 어느 날 농촌에서 장녀로 자란 큰올케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래 배추 모종은 옮겨 심으면 그렇게 되고 2,3일 지나면 도로 살아난다고 한다.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자란 남편과 시누이들은 왜 여태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옮겨 심어진 나도 처음에는 움츠려 들고 비실거리더라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건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튼실하게 잘 적응해 갈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 이후로 엉뚱한 곳에서 힘들게 자라고 있는 어린 모종들을 보면 눈에 띄는 대로 알맞은 곳을 찾아 곱게 옮겨 심어 주었다. 옮겨갈 곳과 지금 자라고 있는 두 곳 모두 흙에 물을 흠뻑 주어 땅을 충분히 적신 다음 흙째 뿌리를 떠서 촉촉한 땅으로 옮겨 심고 도독하니 흙을 덮어 눌러 준다.

 잘 자라라고 기원하며 떠나온 고향과 옮겨온 타향, 두 곳 모두 따뜻한 인정이 촉촉히 스며 있는 다정한 곳이라고 속삭여 주었.

작가의 이전글 미친년 방댕이만한 ᆢ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