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하면서 경험하는 풍요로운 변화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친정 형제들의 카톡방에서 생긴 일이다. 열아홉 살 손 위인 큰오빠와 열네 살 손 위인 큰언니는 카톡을 쓰지 않고 여덟 살 손 위 작은 언니는 카톡방 식구이긴 하지만 글은 전혀 올리지 않고 할 말 있으면 바로 전화를 한다. 공사다망한 여동생도 눈팅만 하다가 꼭 집어서 묻는 안부에만 한두 줄 간단히 글을 올린다. 여기저기서 퍼 나른 정치 루머들, 건강 정보, 좋은 글, 음악, 근황을 알리는 사진 몇 장 등을 올리는 것이 전부인 아주 평범한 카톡방이다. 그런데 '우리 집 우물'을 이 방에 올렸더니 반응들이 뜨겁다.
작은 오빠
추억의 장소들.
다 기억들을 하고 정말 하나의 드라마 같네. 어려운 가정에서 엄마 한 분만 믿고 다들 시키는 대로 탈 없이 자라온 삶의 보금자리라고 해도 나무랄 데가 없지.
한 해 여름, 엄청 가물었을 때 작은누나가 아파 엄마한테 손수제비가 먹고 싶다고 조르니 엄마가 부엌에서 나를 보고 우물물을 길어 오라고 해서 우물에 갔는데 윗집에 살던 대일이 집에서 우물물이 안 나와 우물을 더 깊이 파는 바람에 우리 집 물줄기가 대일이 집에서 끊기니 물이 많이 모자랐지. 두레박 줄이 짧아져서 내가 고개를 숙여 물을 퍼려다 나도 빠질 뻔했다. 다행히 발목이 독깡에 걸려 동네 어른들이 나를 건져 올렸는데 놀란 나는 가야 파출소까지 뛰어 내려갔다 왔지. 그때 놀란 심장이 지금도 아픈 것 같애.
7형제가 살던 곳. 추억의 장소지만 이젠 옛 흔적은 사라지고 새로운 집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네. 지난 일을 되새기는 좋은 기회가 되었네. 고맙다. 다들 이렇게 살아줘서~~~
여동생
글 잘 쓰는 형제들 덕에 모처럼 소리 내어 웃어보는 주말 오후. 좋은 추억거리를 더듬어 줘서 고맙습니다. 언니가 글 잘 쓰는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작은오빠가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줄은 ...
자서전이 기대됩니다.
작은 오빠
한 핏줄 한 형제자매지만 개성은 한 날 한 시에 생긴 손가락처럼 다들 다르지만 일편단심 형제 자매 간의 우애는 어릴 때부터 다른 집 사람들보다 더 깊었지. 나이 60이 지나 새삼 이런 글을 보니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아주 감미롭네.
좋은 글 잘 읽었고 이 마음 우리 끝나는 그날까지 변치 말고 영원히 지키며 가슴속 깊이 간직하면서 살아가자.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 사랑한다.
다들 고마워~~~♥♥♥
오늘 한순간 동심으로 돌아가 기분이 좋다
수고 했다~~~*
남동생
오늘은 참 재밌는 날이네. 우리의 어린 시절을 주마등처럼 되살리기에 혼자서 웃기도 하고 지나온 세월의 덧없이 스쳐버린 시간들의 여운에 아쉬움으로 맘을 저민다. 서울대 어느 교수의 말이 생각나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조직이 어떤 조직이냐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는데 답들은 다양하게 군대조직, 깡패조직, 검찰 조직 등등으로 나왔는데 교수님의 답은 가족이란 조직. 이 말에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고ᆢ
우리 7형제가 다혈질이 아니고 반도 국가의 국민은 다혈질로 된단다. 이탈리아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다혈질 민족이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우리 형제들은 서로를 생각하는 혈육이란 관념이 남들보다 깊다고 생각한다.
오늘 나는 맘이 참 착잡하다. 종일 식당일 하면서 한쪽 팔이 퉁퉁 부어 있고 힘들게 일하는 누나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서글프다. 그렇게 번 돈으로 오늘도 내한테 10만 원 준다. 안 받으려 해도 돈이 있어야 남들에게도 떳떳하다고 다음 주에 3박 4일 교육받으러 가는 데 쓰라고 주네.
이 10만 원은 일반 사람들 100만 원보다 큰돈인데 ~~ 여하튼 앞으로 다가오는 삶의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을 보답할 날은 분명히 올 것이다. 우리 가족들 모두에게 즐거움과 평화 가득한 나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
나
진짜 우리 형제들이 다 글을 잘 쓰네. 정련이 글도, 정민이 글도 다 좋~~다. 예쁜 마음을 정확한 문장과 풍부한 어휘로 잘 표현하네. 우리 다 같이 글 모아서 합동 자서전 한번 내 볼까?
시간 되는 대로 여기에 글 함 올려서 모아 책으로 만들어 보자. 뜻깊겠다. 생각날 때 열씨미 맘대로 글 올려놓으면 내가 교정 보고 정리해서 모아 볼게.
작은오빠
각자 옛날 기억으로 문장 하나씩 만들어 놔 봐라. 집체하면 글이 만들어질는지. 옛날에 '억새'라고 내가 20대 때 대학 노트에 4권 정도 자작시를 적은 게 있었는데 이사 다니다 잃어버렸다. 그것만 있어도 시집 하나는 충분히 나올 텐데ᆢ
지금 생각하면 아까워 죽겠네~~~^^
큰언니 집에 놀러 가서 카톡방에 올린 형제들의 글을 읽어 주니 언니도 때때로 소리를 내어가며 소녀 같이 웃었다. 그리고 몇 가지 이야기들을 더 보충해 주었다. 우리 집 우물이 동네에서 제일 시원하고 물맛이 좋아서 여름 점심 때면 이웃들이 시원한 물에 밥 말아 먹는다고 물 뜨러들 왔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6.25 전쟁 중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집 위 넓은 빈터에 신병 훈련소가 생겨 징집된 어린 청년들이 매일 줄을 이어 훈련을 받으러 왔다. 어머니는 낮에는 바쁘게 바깥일을 하시다가 저녁에 귀가하셔서는 종일 고된 훈련을 받고 파김치가 되어 부대로 돌아가는 군인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우리 우물물을 퍼 나르셨다. 우리 집은 대로에서 30미터쯤 골목길 안쪽에 있었다. 커다랗고 무거운 사각 나무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머리에 이고 가서 바가지를 띄워 길가에 내려놓으면 목마른 군인들이 너무도 맛나게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름 한철 내내 저녁마다 그렇게 하셨다. 그때 초등학생이었던 언니도 엄마 곁에서 박으로 만든 바가지에 찰랑찰랑 담긴 물을 담아 들고 따라가 물통을 채우는 일에 한몫하였다. 깻잎을 된장에 박아 둔 깻잎 장아찌 밑반찬을 그 부대에 가져다 주라는 어머니 심부름을 하면 군인들이 어린 우리 언니를 이뻐하며 맛있는 건빵을 손에 쥐어 주었다. 그 뒤에 덧붙인 언니 말이 짠하다. "그 군인들, 전쟁터에 나가 아마 거의 다 죽었을 거야. 며칠 훈련받고 바로 전쟁터로 보내졌으니까."
그러고 보니 생전에 어머니께서 하신 이야기가 기억났다. 전쟁이 끝난 후 고맙다고 찾아온 군인이 몇 명 있었고 그중에 대장 한 명도 찾아와서는 그때 정말 고마웠다고,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당신을 찾아오라고 주소를 적어 주고 갔다. 그런데 사느라고 바빠 못 찾아가 본 게 항상 마음에 아쉽게 남아 있다는 말씀이었다.
내 글이 마중물이 되어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운 마음들을 글로 표현해 왔다. 재밌고도 매력적인 작업, 글쓰기.
2017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