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고 있는 날개
그 여직원분은
"그렇구나. 안경학과가 공부하기 많이 힘드니?
원래 학교가 그렇잖아."라고 말했다.
"응? 너 내가 안경학과에 다니는지 어떻게 알았어?"
"나 너 기억나.
너 처음 배리에 왔을 때 나한테 이 한국여권 보여주었었잖아.
나는 신분증으로 여권을 받는 게 오래간만이었는데 한국여권이라 더 신기했어.
나 한국여권은 처음 보거든.
그래서 네가 기억나.
조지안 대학에서 안경공부 할 거라고 말했었잖아.
그나저나 너 영어 정말 많이 늘었다."
"뭐라고? 내 영어가 늘었다고?
나는 지금 영어가 안 늘어서 솔직히 한국에 가고 싶어서 왔는데."
"아니야. 너 처음 나랑 이야기했을 때보다 영어가 정말 많이 눌었어.
뭐랄까..
여유 있고 예의 바르게 변했어.
좀 더 자연스러워졌달까."
"진짜? 나 솔직히 오늘 하루종일 영어 못 한다고 지적받았고,
같은 반 인도친구한테는 영어 못 한다고
앞으로는 자기한테 말 걸지 말라는 소리까지 들었어.
그래서 솔직히 지쳤어.
이제 영어도 싫고 학교공부도 싫고 캐나다도 싫어.
나 이제 30살이야. 영어공부 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야.
다 그만두고 그냥 한국 가고 싶어.
왜 이 나이 먹고 공부하겠다고 캐나다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나는 주위사람들이고 뭐고 서러워서 펑펑 울었다.
직원분은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티슈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오늘 너에게 영어 못 한다고 지적한 사람들이 다 캐네디언들이었니?"
"아니. 다들 나 같은 유학생들이야. 한놈은 인도고."
"내가 말해줄 수 있어.
캐네디언들은 아무도 남들 영어를 평가하지 않아.
문법, 발음 등 상관없어.
그냥 그 사람의 말투, 억양 등이라고 생각하지 그 사람한테 대놓고 지적하지 않아.
더군다나 처음 본 사람을.
그리고 너처럼 다른 나라에서 영어를 배우려고 온 게 확실한 사람한테는 더욱더 평가하지 않지.
오히려 너의 용기와 열정을 응원하지.
다른 사람들이 영어로 평가하는 거 무시해.
분명 그 사람들도 영어로 스트레스받다가 그냥 엄한 너에게 화풀이한 것 같은데.
그리고 솔직히 인도영어 발음보다는 니 영어가 더 알아듣기 쉬워."
하며 한쪽 눈을 찡끗. 윙크를 해줬다.
"네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도 너의 결정에 뭐라고 할 자격은 없어.
그런데 내가 보기엔 처음 너를 봤던 그때보다 지금의 너는 영어도 정말 많이 늘었고,
학교 생활도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간다는 게 속상하고 억울하지 않니?"
"네 말이 맞아. 솔직히 속상하고 억울해.
내가 캐나다에 얼마나 힘들게 왔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 돌아가서 다시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비굴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 나 다시 해볼 거야.
나를 무시했던 반친구한테 보란 듯이 버티고 이겨낼 거야."
"넌 할 수 있어. 캐나다까지 왔잖아.
넌 정말 용감해.
거기 앞에 놓여있는 초콜릿 가져가서 먹어도 돼."
이 은행은 손님들에게 가져가라고 이렇게 초콜릿도 놓았었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초콜릿이 보였다.
"정말 고마워. 그럼 좋은 하루 보내."
나는 한 손에는 코를 푼 휴지를, 다른 한 손에는 초콜릿을 들고 당당히 은행을 나왔다.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
적어도 학교 졸업장과 돌아가서 이태원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게 영어를 늘려가자.
은행에서 가까운 거리의 심코호수에 앉아
초콜릿을 우걱우걱 먹으며 다짐했다.
한국에 가더라도
졸업장, 영어는 반드시 가지고 간다.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
집에 가서 청소를 하고 있자 홈스테이호스트 J가 퇴근하고 왔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J는 은행직원에게 고마우면 감사편지라도 전해주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다.
좋은 생각이다.
마침 나에게 한국에서 사 온 팩소주가 하나 남아있었다.
나는 저녁을 먹고 방에 올라가서 감사의 편지를 정성스럽게 쓰고
예쁜 쇼핑팩에 팩소주를 넣어서 다음날 은행에 갔다.
그런데 그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그 직원의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직원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 후로 며칠을 찾아가 봐도 그때 그 여직원분은 보이지 않았다.
요정할머니였나?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