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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지 않는 주말이었다. 영인에게서 연못 근처 국숫집에서 만나자는 카톡이 왔다. 시에서 거액을 들여 데크를 깔고, 인공 수초를 조성하면서 자연 웅덩이인 연못은 등산객들의 고정 코스가 되었다. 사람들이 몰리자 무심재 아랫집은 아예 국수와 막걸리를 파는 작은 주점으로 변했다. 주점 앞에는 매실액이나 푸성귀 따위를 늘어놓고 등산객을 상대하는 노점까지 들어섰다.
은퇴한 뒤 세상일에 무심하게 살고 싶었던 노인은 잡다한 세상일과 얽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언젠가 무심정 노인이 개를 데리고 온 중년의 남자와 소리 높여 싸우는 걸 본 적이 있다. 개 목줄을 하지 않은 게 시비가 되었다. 무심재 노인은 개가 주인을 따라가지 않고, 자꾸 무심재 안으로 들어온다고 야단이었다. 녀석은 부랑자처럼 어슬렁어슬렁 무심재 안을 들쑤시다 번번이 똥을 싸고 달아났다.
약속 시각보다 두어 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 산으로 올라가 연못으로 내려가는 대신 아파트 정문을 우회해 연못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걸었다.
평탄하게 쭉 뻗은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완만하게 오르막길이었다. 길은 서서히 높아져 어느새 멀리 보이는 산의 중턱과 얼추 높이가 같아졌나 싶었다. 그러더니 이내 내리막길이었다. 왼편 차도에는 차들이 쌩쌩 바람을 일으키며 달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려 연못 부근까지 갔다. 곧장 국숫집으로 가려는데 진입로 공터에 무심재 노인이 나와 있었다. 그는 얄궂게도 넓적하고 야트막한 바위 위에 날름 올라앉아 있었다. 가슴엔 배드민턴 라켓을 두 개를 포개 안고 있었는데, 라켓 사이에 깃털이 달린 공이 납작하게 끼어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는 나를 노인이 불러 세웠다. 그리고 라켓 하나를 내밀며 한 게임만 치고 가라고 했다. 약속이 있어서 빨리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난감했다. 배드민턴 친 게 언제인지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아예 칠 줄 모른다며 그냥 가려는데, 노인이 라켓을 차단기처럼 내밀며 막아섰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길목을 막고 행인에게 수수께끼를 강요하는 스핑크스처럼. 그는 한 게임 치고 가야지 그냥은 못 간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마지못해 노인이 건네주는 라켓을 받아 들고 노인이 서 있는 반대편 공터 끝으로 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연히 서 있는데, 시작한다는 소리도 없이 공이 날아왔다. 하늘로 붕 떠오른 공을 바라보다 적당한 위치라고 생각해서 라켓을 휘둘렀다. 헛스윙이었다. 공은 머리를 훌쩍 넘기고 내 뒤에 떨어졌다.
상대가 백발에 등이 굽은 노인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노인의 힘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공 때리는 소리가 텅하고 울리면서 힘 있게 날아왔다. 가까스로 달려가 받아쳤지만, 공의 깃털에 맞아 픽하고 중간도 못 가 곤두박질쳤다.
노인은 불필요한 힘을 쓰지 않고 제자리에서 스텝을 밟는데, 나는 공을 받느라 이리저리 뛰었다. 공을 쫓아가느라 미끄러지면서 흙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그래도 한참 공을 뒤쫓다 보니, 어느 정도 주고받기가 가능해졌다. 승부를 내기보다는 공을 떨어뜨리지 않는데 온 신경을 썼다. 나중에는 공을 오래도록 주고받는 것이 대단한 사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랠리가 계속되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만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노인은 들은 척도 않고 공을 날렸다. 노인은 좀처럼 놔 줄 기색이 없었고, 난 숨이 막히고 가슴을 조여 오는 통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노인은 이번이 마지막, 마지막, 하며 자꾸 미뤘다.
마침 공터를 지나는 젊은 남자가 있어, 그에게 재빨리 라켓을 넘겼다. 내 등 뒤로 빠르게 움직이는 발소리와 텅, 텅 하는 공 소리가 울렸다. 라켓과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