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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18. 2022

13번 아가씨

1985년.


 그날은 ‘첫 눈’이라 말해도 될 만큼 제법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며칠전에도 물론 조금씩 눈발이 날렸던 적은 있었지만 ‘첫 눈’이라고 부르기엔 눈도 너무 적었다. 우리 보령화력발전소 사진동우회 일행이 카메라를 메고 태안군 오천면 ‘오천항’에 닿았을 때는 먼 길을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버스의 털털거림도 싹 잊을 만큼 펑펑 눈이 내려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고, 먼 바다의 여러 섬과 연결되는 연락선도 움직이지 못한 채 다른 어선들처럼 묶여 홈빡 눈을 맞고 있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가 빗금을 그으며 항구 건너편 산의 모습을 희뿌옇게 보이게 하더니 점점 굵어지는 눈송이에 곧 산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고, 내륙으로 뻗어 들어온 항구에는 눈 줄기 방향을 따라 작은 물결이 일고 있었다. 우리는 일제 때 지은 다 허물어져가는 목조 창고와, 눈을 맞으며 배 안의 물을 퍼내는 어부의 모습, 조선 수군이 주둔했던 오래된 오천성(城)을 카메라에 담고서는 다음 목적지로 향해 떠나기 전에 그 눈 내리는 조용한 부두가 횟집에서 잠시 막걸리로 목을 축이기로 하였다.

 

 파카 위에 쌓인 눈을 털고, 그다지 넓지는 않은 홀의 난롯가에 모여 앉아 낚지 볶음과 막걸리를 주문하여 기울이면서 한창 어촌 풍물과 사진소재에 대한 이야기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을 때였다. 홀 안으로 예쁜 파마머리의 아가씨가 들어서더니 “어느 방이예요?”하면서 우리 일행에게 묻더니, “아차 잘못 물었구나” 하고 후회하는 듯, 성큼 안쪽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방이 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수족관 펌프의 물 품는 소리가 갑자기 시끄러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 내리는 포구와 정박한 어선들, “어-이” 하고 소리 지르면 목소리는 이내 눈송이를 타고 저 앞 작은 섬 어느 인가에 닿았다가 되돌아올 듯한 분위기, 달콤한 막걸리와 이곳 특산물 간재미 회, 취기를 돋우는 따뜻한 난로의 열기와 눈을 덮어쓴 화장한 아가씨의 등장...


 우리가 막걸리를 마시며 한참 떠들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아까 그 아가씨와 젊은 사내가 뒷모습만 보인 채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좀 있으니 전화벨이 울리고, 안에서 쫓아 나와 전화를 받은 주막집 아들이 소리쳤다.

 “엄마. 13번 아가씨 바꿔달래”.

 “금방 나갔다고 그래라”. 주문을 받던 주인 아낙의 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천이 바람에 펄럭이듯 묘한 분위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나저나 우리도 일어설 때가 되어 그 집을 나설 때 술 값을 계산하면서 경상도 출신인 사진동우회 총무가 주인 아낙에게 농담을 걸었다.

 “우리는 12번 아가씨를 쪼매 불러주이소. 이래 눈 오는 날 사진 모델이라도 할라 안캅니꺼”.

 “12번 아가씨가 누구예요?”

 아낙은 이상한 질문을 다한다는 듯 되물었다.

 “방금 13번 아가씨 안 왔다 갔능교. 그러니까 12번도 안 있겠능교?”

 “아저씨도 참! 12번 아가씨는 모르겠고, 13번 아가씨야 따라 나갈른지 안 나갈른지 13번에 물어봐야 알지요”

 뭔가 이빨이 잘 맞지 않는 대화를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에 도착하니 건물 이층의 간판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항구다방 전화 13번」

털털거리며 태안 시내로 타고 가는 버스 속에는 장난스러웠던 남자들의 객기가 싱거움으로 가득하고, 차창엔 해풍에 밀린 눈송이가 자꾸 세차게 와 닿아 차유리를 뚫고 들어와서는 이마에 부딪칠 듯 덤벼들고 있었다. 원 싱거운 사람들 같으니라고....


*2022년 현재

요즘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라때는(예전에는) 보령군 오천면이라는, 면소재지가 있는 마을의 한 다방의 전화번호가 그냥 13번이었으니, 전화가 그렇게 귀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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