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 삼매경 5편
난 17년 동안 한 우물만 팠어. 4대 보험을 적용받는 첫 직장 할리데이비슨 코리아에서 11년 5개월 동안 근무했고, 그다음에는 두카티 코리아로 옮겨서 4년 5개월을 일했지. 햇수로 17년 동안 내 뇌의 70%는 오토바이로 차 있었어. 그러다 병이 생겼지. 수개월 동안 몸살감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코피가 아무 때나 흘렀어.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점점 예민해졌지. 병원에서는 어떤 원인도 찾을 수 없었고, 그저 스트레스라는 단어만 주물럭거렸어. 처음엔 내 코피를 보면서 놀랐던 아내도 나중에는 수시로 흘리니까 별로 신경을 쓰지 않더라구.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어느 날 아침에 조용히 눈을 뜨지 못하겠구나. 뉴스에서 보던 일이 남의 얘기만은 아니네.’
그런 생각이 들고 한 달 정도를 고심한 끝에 퇴사를 결정했어. 모아놓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다른 할 일도 정하지 않았어. 우선 쉬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코피에 무심했던 아내도 흔쾌히 허락을 해줬어. 회사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 살기 위해서는 그만두어야 했으니까. 그때 내 첫 아이가 만으로 세 살이었어. 난 그때까지 평범한 직장인처럼 공휴일과 주 5일 근무를 다 챙겨 본 적이 없었어. 관리자가 되어서 수시로 야근을 했었고, 날씨가 좋은 봄과 가을의 주말에는 행사 때문에 바빴지. 아이와 놀아주지 못한 시간들이 참 미안했는데 이 기회에 잘 됐다 싶은 생각도 들더라.
난 영업을 하고 10년이 지나서 관리자 되었어. 영업사원 출신의 첫 관리자였어. 입사 3년 차에 주임을 달 때까지는 평범한 직원 중 하나였어. 보통 이하였던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사내 최고의 영업사원으로 성장하면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그만 둘 때도 꿋꿋하게 버티다 보니 진급이 빨라졌지. 작은 회사가 크게 성장하는 길을 함께 걸었던 셈이야. 주임을 달고 다음 해에 바로 대리로, 그다음 해에 과장으로 진급했어. 그때부터는 회사 내에서 내 영향력도 나름 커졌어. 힘든 일이 별로 없었어. 회사 생활이 이제 좀 편해지나 싶었지. 한편으로는 반복되는 일에 따분한 생각도 들었어. 그러다가 덜컥 강남점을 총괄하는 지점장이 되었어.
조직을 관리하는 일은 다각적인 업무와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했어. 지점장은 개성이 다른 부서와 직원들을 모두 돌보아야 했는데, 난 사실 나 하나만 돌보는 일도 쉽지 않았거든. 하나의 지점에는 모터사이클 영업부, 의류 & 용품부, 부품 & 액세서리부, 정비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어. 파는 것을 넘어선 다양한 일들이 넘쳤지. 인원, 매출, 재고, 정비까지 관리하고 지점 홍보를 위한 여러 가지 이벤트까지 구상해야 했어. 막강한 권한과 함께 책임이 부여된 자리였어. 부담이 컸지만 꽤 재미있게 일했어. 영업 출신답게 난 누구도 해 본 적 없는 이벤트들을 벌였고,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은 남들이 신경을 쓰지 않는 곳까지 뒤집어엎었지. 정신없이 1년이 지났지. 직원들은 나의 행동이 낯설고 거부감이 컸을거야. 그러나 난 고객과 회사 그리고 직원들에게 맞는 최상의 선택을 위해 노력했어. 매장의 분위기를 깔끔하게 변경하고, 근무 여건을 효율적으로 바꾸며, 매출을 끌러올렸지. 그후 더 규모가 큰 한남점의 지점장이 되었고, 모터사이클 총괄 팀장까지 역임했어. 회사 내에서 입지가 꽤 커졌지.
관리자로 어느 정도 경력을 쌓고, 이탈리아의 모터사이클 브랜드 두카티의 영업본부장이 되었어. 느긋하고 편하게 타는 미국 문화의 상징 할리데이비슨에서 매끈하고 빠른 속도를 지향하는 두카티를 맡은 것은 엄청난 변화였지. 두카티는 내가 오토바이를 처음 탈 때 좋아했던 스타일이었고, 이번 생에서 탈 기회가 있을까라며 동경하던 브랜드였어. 영업본부장은 조직도로 보자면 대표 이사 다음의 직급이었지. 국내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였어. 회사의 전체 매출은 물론, 대리점, 마케팅, 구인, 시설과 장비까지 관리하고, 발주와 회계까지 신경을 써야 했어. 거기에 회사의 목표와 비전까지 내가 다 만들었지. 할 일이 넘쳤어. 국내 공식 수입사가 바뀌면서 시작된 일이라 모든 걸 처음부터 새로 세팅했어. 매장의 디스플레이, 카탈로그, 홈페이지, 제품의 라인업과 직원들까지 내 손이 안 거친 곳이 없었지. 특히, 시간이 촉박했던 홈페이지와 카탈로그는 수시로 야근을 유발했어. 회사 초기엔 인원이 부족했고, 새로 들어온 직원들에게 늦게까지 일을 시킬 수 없어서 나 혼자 밤 늦게까지 남아 있던 적도 많았지. 단순한 문서 작업과 확인 업무를 하면서 ‘지금 내가 이 짬밥에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어. 새벽에 집으로 들어 간 적도 있었으니까.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하나하나 새로 만들어야 했기에 어려움이 정말 많았어. 거기에 전 수입사와의 소송과 기존 대리점들과의 갈등 그리고 정부 기관의 미숙한 업무 처리도 큰 골치였지. 10달 동안 수입 인증서가 발급이 안 되어 오토바이 회사에서 오토바이를 팔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발생했어. 소송 때문에 변호사를 만나면서 재판정에 끌려다니고, 웃으며 얘기하던 거래처 사람들이 바로 다음날 등에 칼을 꽂고, 불안해하는 직원들을 다독이느라 완전히 녹초가 되는 생활이었어. 사람이 코 앞에 이익과 자신의 밥그릇 때문에 얼마나 간사한지, 얼마큼 사악하고 교활해질 수 있는지 이때 당하면서 뼈저리게 배웠어. 위에서 내려오는 압박과 날마다 새로 쏟아지는 사건 사고들의 무게를 혼자서 간신히 막아내며 견뎠어. 매일매일이 지옥에서 허우적대던 느낌이랄까? 휘청거리는 삶이었어. 이때 처음으로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했어. 그런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더라구. 제대로 시작도 못했는데 포기하는 건, 내가 추구해 온 삶의 방향성과 맞지 않았어. 일단은 회사를 잘 세워 놓아야 한다는 책임감도 무시 못 했지. 정말 이를 악물고 버텼어.
헐떡거리며 1년이 지나자 회사는 정상적인 궤도에 올랐어. 전과 비교하기 어려운 시설과 서비스에 고객 관리까지 업계 최고 수준이었지. 직원들과 함께 매년 최고 매출을 갱신했어. 직원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내 일도 많이 줄었지. 그런데 아직은 작은 회사였기에 난 모든 일에서 손을 놓지는 못했어. 작은 실수에도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이었지. 사소한 일까지 직접 관여했는데, 그게 결국 내 몸을 망가뜨렸어. 종종 코에서 뜨거운 느낌이 들어 만져보면 코피였어. 그리고 몸살이 계속됐지.
난 두카티 코리아를 다니면서 포기하지 않기 위해 틈나는 대로 취미의 영역을 불태웠어. 종종 직원들과 함께 투어도 다니고, 장대같이 퍼붓는 비를 맞으면서도 고객들과 전국일주를 다녔어. 직원끼리 팀을 만들어 내구 레이스에도 참가했지. 밤늦은 시간까지 직원들과 연습하고 F1 경기가 열렸던 영암 서킷에서 선수들처럼 달리며 경주를 할 때 처음 오토바이를 타면서 느꼈던 흥분을 맛보기도 했어. 본사에서 실시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유럽 전역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테스트를 거친 인스트럭터 자격도 얻었어. 정말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짧은 기간에 많이 쌓았지만, 탈이 난 내 몸과 정신을 구원할 수는 없었어. 결국엔 17년 동안 달려온 오토바이 인생을 마무리 지었어. 함께 어려운 환경을 이겨낸 동료들에겐 미안함이 있었지만 내가 죽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일을 그만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 모든 병은 다 나았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달도 안 걸렸지. 결국 내가 무리하게 해 왔던 업무와 정신적 압박이 원인이었던 셈이었지. 직원들과 적당한 의무와 권리를 나눠가졌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지. 난 좋은 리더가 아니었어. 아무튼 마지막 직장이었던 두카티 코리아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엄청난 고난과 시련의 기간이었어. 그런데 말야. 그때는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지나고 보니 조금은 달리 보이더라구. 그때 내가 겪은 고통이 나를 진정으로 성장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드다”는 니체의 말을 온몸으로 체득한 셈이지.
그만두면서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도 했어. 오토바이를 타고 업계에서 일하면서 내가 해보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해봤기 때문에 뭔가 아쉽고 부족한 미련이 없더라구. 걸레질로 시작한 막내 영업 사원에서 한 브랜드를 총괄하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며 쌓인 경험은 살면서 쉽게 얻지 못할 추억과 내공을 주었지.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던 할리데이비슨, 두카티, BMW를 비롯한 유명브랜드의 대표 모델들을 전부 다 경험하고, 미국을 포함하여 동남아, 유럽 등지에서 실컷 오토바이를 타고, 일본에서 세계적인 모터사이클 경주 대회 MotoGP를 관람하고, 직접 아마추어 경주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누렸지. 거기에 공익 프로그램으로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무료로 기회를 제공했던 업계 최초의 이륜차 안전교육프로그램까지 만들고 나니 더 이상 하고 싶은 게 없었어.
대학을 졸업하고 철없는 즉흥적인 생각에서 시작한 오토바이라는 취미는 이제 내 인생에서 뺄 수 없는 큰 기둥이 되었어. 삶에 거창하고 구체적인 꿈이 없어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교훈도 얻었지.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한때는 오토바이가 위험해서 안된다는 부모님과 싸우고 3년 동안 얼굴을 안 보기도 했어.(물론 지금은 손주 덕분에 아주 잘 지내지) 자신의 길은 부모가 반대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야 보람이 크다는 사실도 배웠어. 오토바이로 경험한 세계는 너무나 크고 깊었어.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내가 지금 오토바이를 안 타는 건 아니야. 지금도 난 스쿠터를 내 애마로 삼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녀. 아이들도 함께 타기도 해. 큰 애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작은 애는 두 살 때부터 같이 스쿠터를 탔어. 그리고 2005년식 할리데이비슨 XL883R 모델을 여전히 가지고 있지. 가능하면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물론 아들이 원할 경우에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