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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ar and dear May 09. 2024

아빠의 얼굴



코로나 이후, 병문안을 가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그게 나의 일이라면, 그러니까 내가 환자나 보호자의 일이라면

꽤 좋은 일이란 생각이 드는 일이지만,

부모님의 일이 되어보니 너무 애타고 마음이 아픈 일이더라.



마스크도 의무화도 사라지고, 이제는 많이 유연해졌지만

대형병원은 아직 무조건 마스크를 써야하고,

상주 보호자 1인을 제외하고는 병동 입구까지만 출입이 되었다.

그렇다 보니 환자가 거동이 가능해서 출입구까지 나올 수 있는 사람만 면회가 가능했다.



7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던 아빠의 수술은 9시간이 걸렸고,

아이들을 케어해야 하는 나 대신 남편이 엄마와 남동생 곁을 지켰다.   

위험한 혈관 주변으로 암이 퍼져 있어 한 쪽 후두와 갑상선을 모두 제거했고

상처 부위가 너무 크다보니 허벅지의 피부를 이식하는

유리피판술을 했고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다.

워낙 큰 수술이라 중환자실로 바로 가셔서, 아빠의 상태는 중환자실 간호사를 통해

전화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의식도 있고, 손짓도 하신다고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중환자실에 있는 것이 가장 힘드셨다고 했다.



8개월의 투병 생활 내내 아빠는 식염 수 몇 모금, 물과 커피 몇 모금 마신 것이 전부였다.

살기 위해 해야하는 먹는 행위가 그토록 죄스럽고 슬플 수 있는 일일까,

아빠는 수술 후 알 수 없는 고열이 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rs바이러스라는

병원균이 감염되었다고 했다.

관리 체계의 소홀과 시스템의 한계를 느꼈지만 현장에 가볼 수 없었고 따질 수도 없었다.

간병을 홀로 감당해내는 엄마의 소식만을 매일 기다리며

잘 살아낼수도, 그렇다고 살아내지 않을수도 없는 시간들이 흘러갔다.



내가 암센터에 입원하던 날, 그래도 수술 전이니 든든하게 먹고 가라고

남편이랑 외식을 하러 가던 길, 남편은 친정엄마한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고,

엄마는 흐느끼고 계셨다. 내 앞에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엄마다.

엄마는 왜 미련하게 자식 앞에서는 그렇게 숨기실까, 참을까,

이제 보니 난 엄마의 그런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아빠의 수술부위가 아물지 않아 일주일 만에 재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었지만 난 할 수 없이 점심 외식을 하고, 입원 수속을 밟았다.



몇 주 후 아빠를 보러 갈 수 있었다.

그 때는 다행히도 아빠가 휠체어를 타고 입구까지 나올 수 있었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손글씨로 대화를 나누던 때였다.

내가 온다는 소식에

바퀴가 달린 폴대에 경관식 파우치를 달고, 병동 입구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아빠,

입모양으로 '뭐하러 왔어' 하신다.

"아빠 보러 왔지 뭐 하러 와!"

'너는 항암은 안해도 된대?'

"응! 나는 진짜 괜찮아 빨리 발견해서 협부만 절제했어, 약도 안먹을 확률이 더 높대!"

'다행이다. 얼른 가서 누워라.'

"누가 누굴 걱정하는거야?" 하고 웃었다.



내가 아빠의 얼굴을, 입모양을 이렇게 오래 바라본 적이 있었을까

그 날 이후로 아빠의 눈동자를 아빠의 모습을 하염없이 가능한 오래도록 바라보게 되었다.

나와 아이들을 볼 때만 짓는 표정과 눈빛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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