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지출하던 돈의 절반으로 작은 아파트를 빌려 혼자 살게 되었다. 집을 나서면 변함없는 풍경이 어색하고 외로웠지만,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큰 뿌듯함과 자유를 안겨주었다. 집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방과 주방이 있었고 꽤나 깨끗했다. 혼자서 DVD 플레이어로 영화를 보거나 주말에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소소한 즐거움을 누렸다. 샤워 후 냉장고에서 꺼낸 캔맥주를 마실 때면,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패딩을 입고 이불 안에 있어야 추위를 견딜만했다
그러나 겨울은 참으로 혹독했다. 전기장판을 켜고 이불 안에서 패딩을 입고 지내는 날이 많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창문 새시에 전선이 들어오는 작은 구멍이 있었고, 그 구멍을 휴지로 막아 추위를 한결 견딜 만해졌다. 수영장 월 정액권을 결제하고,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건강한 생활 사이클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이 정말 좋았다. 하얼빈에서의 삶은 베이징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립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둘째, 혼자 여행을 자주 떠났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먼 곳은 꿈꾸지 못했지만, 하얼빈에서 저렴한 기차표를 사서 가까운 지역을 탐방했다. 혼자 러시아 국경을 찾아가기도 했고, 내몽골에서 양 떼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동북 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도 내 주무대였다. 길림, 장춘, 선양, 대련 등을 방문했으며, 기차를 타고 아무 곳에서나 내려 이름 모를 시골의 잔디밭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고, 송화강이나 목단강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기도 했다.
내몽골 몽구바오에서 중국 학생들과 하루를 보냈다
가슴이 답답해질 때쯤, 느닷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 나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되었다. 어느 날 밤, 자정이 지나 하얼빈 역으로 걸어가 여행을 시작한 기억도 있다. 경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로 중국의 일일 노동자나 학생들이 머무는, 하룻밤 2000원짜리 여인숙에서 지냈다. 스티로폼 벽으로 나누어진 방이었지만, 중국 생활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그런 허름한 숙소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식사는 주로 중국 사람들과 함께, 2000원을 넘지 않는 국수나 만두로 해결했다. 만약 그때 유튜브가 있었다면, 중국의 작은 마을들을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과 나눴을 것이다.
셋째, 친구들과 길거리 장사를 했다.
하얼빈 유학 생활 중 손에 꼽히는 추억 중 하나다. 절친이 어느 날,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나 중국에서 김밥 장사 해볼 거야. 너도 같이 할래?” 망설임은 있었지만, 추진력이 기가 막힌 친구의 설득에 따라 나는 그 도전을 함께하기로 하였다. 다만, 길거리에서 김밥을 파는 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설마는 늘 현실이 되곤 한다.
하얼빈 야시장, 이즘 어딘가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하얼빈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대학로에서 김밥을 팔기로 했다. 대학로 간식거리는 양꼬치, 마라 꼬치, 중국식 구운 냉면 등 1위안~15위안에 판매되고 있었다. 우리가 팔게 될 김밥은 건강한 한국 음식을 콘셉트로, 한 줄에 15위안(약 2500원)으로 정했다.
친구는 작은 리어카를 구입했고, 우리는 리어카를 작은 가게로 꾸미기 시작했다. 리어카 중간에 작은 나무 의자를 올리고, 김밥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투명 아크릴판을 둘렀다. 리어카 주변의 눈에 잘 띄는 곳에는 두꺼운 마카팬으로 ‘留学生紫菜包饭’(유학생 김밥)이라고 정성껏 썼다.
작은 가게가 완성되었다.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첫날, 김밥 옆구리가 터질 때마다 웃음을 터트렸던 우리들은 점점 더 능숙해졌지만 오십 줄 이상을 만들지 못했다. 문제는 단순히 김밥만 마는 것이 아니라, 재료 손질(시금치, 당근, 계란,고기 등을 볶고 부치고 김밥에 넣기 좋게 다시 칼로 자르는) 과정이 오래 걸렸고 김밥을 만들다보면 중간에 늘 부족한 재료가 있어, 느린 손으로 부족한 재료부터 다시 만들기를 반복해야 했다.
드디어 첫 장사가 시작 됐다.
하얼빈 대학로에는 북적거리는 대학생들의 활기찬 목소리로, 여기서 장사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결정하고 이미 시작된 일 앞에서 용기는 필수였다. "紫菜包饭!! (김밥!!)" 어색함을 내려놓고 크게 손님들을 향해 반복해서 외쳤다. 사람들은 지나가며 신기한 듯 쳐다보고 주위를 맴돌 뿐, 한국인이 어색한지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어색했던 외침이 점점 자연스러워질 때 즘, 김밥이 서서히 팔리기 시작했다.
김밥의 맛에 감탄하며 친구들을 데려오기도 했고, 한국 유학생이 리어카에 앉아서 김밥을 만드는 모습을 신기했는지 지켜보기도 했다. 더불어 당시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있었던 절친은 장사에 꽤나 큰 도움이 되었다. (손님의 80%가 여학생이었다) 김밥은 한 줄을 만들면 한 줄이 팔렸고, 손님들은 줄을 서서 김밥을 사려고 기다렸다. 우리는 하얼빈 대학로의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김밥 장사는 사실 절친의 열정 덕분에 시작된 일이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를 좋아하던 친구는 지금 중국인 아내와 결혼해 한국에서 식당, 편의점, 펜션 등을 운영하는 ‘부자아빠’가 되었다. 우리는 김밥을 팔며 부자가 되진 못했지만, 그 추억만큼은 지금도 단골 안주거리가 되어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