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아들, 글 쓰는 아빠 #15
아빠, 라이넬을 시커스톤으로 멈추고 마스터 소드로 때리면 돼!
나른한 봄, 토요일 오후, 햇살이 거실로 내려앉는다. 오늘도 심쿵이는 힘들게 꾸며준 자기 방이나 책방이 아니라, 결국 내 옆에 꼭 붙어 앉았다. 그리고 "아빠, 나 젤다 얘기해도 돼?"라고 묻고는, 나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젤다의 전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요즘 심쿵이의 '젤다의 전설' 사랑은 절정이다. 이야기 시간이 따로 필요할 정도다. 나는 아들이 게임 이야기를 너무 자주 하면 제지할 때도 있지만, 주말 오후 삐죽 나온 입술 사이로 톡톡 쏟아지는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우리 가족의 평범한 주말 오후를 행복으로 가득 채운다.
어느덧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은 방과 후 수업이나 학원차를 기다리면서 또래의 친구들이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휴대폰 게임을 하는 것을 부럽게 지켜보고는 한다. 삼십 년 전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오락실에서 머리가 하나 더 큰 형들이 하는 어려운 게임들을 어깨너머로 구경하거나, 이따금씩 또래 친구들과 잘하지도 못하는 게임에 도전해서 소중했던 백 원짜리 동전들을 참 많이도 잃었다.
1980~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나 또한, 엄마 몰래 오락실에 갔다가 결국에는 들켜서 혼구녕이 났던 것이 부지기수, 벌써 시간은 수십 년이나 흘렀지만 남자아이들과 게임은 어쩌면 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심쿵이에게 좋은 게임을 추천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단순한 경쟁으로 Pay to win(현질이라고 부른다)을 유도하는 게임보다,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잘 짜여진 스토리 안에서 노력을 쏟으면 주인공과 함께 성장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이때, 나의 생각에 딱 들어맞는 게임이 있었다. 바로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이다. 이 게임은 내가 1년 넘게 중국의 한 도시에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고객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작은 모호텔(모텔과 호텔의 중간즘)에서 나를 숨 쉬게 해 준 유일한 탈출구였다. 나는 이 게임이 나를 위로했던 것처럼, 아들에게도 단순한 오락이 아닌 하나의 모험이 되길 바랐다.
또, 비록 이 게임은 초등학교 저학년인 남자아이가 하기에는 어렵고 인내심이 꽤나 필요하지만, 나는 그만큼 이 게임을 잘 이해하고 있기에, 아들에게도 자신 있게 소개해 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링크라는 평범한 청년이 100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주를 구하는 내용이다. 100년 전, 재앙 가논이 부활하여 하이랄 성을 덮쳤다. 각 종족을 대표하는 영걸들과 공주인 젤다, 용사인 링크가 가논을 저지하려 했으나 강력한 가논의 힘 앞에 패배해 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4명의 영걸들과 하이랄 국왕이 목숨을 잃게 되고, 링크 또한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그 후 젤다는 링크가 다시 하이랄 성을 구하러 올 때까지 홀로 가논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시점으로 링크는 회생의 사당에서 눈을 뜨게 된다.
심쿵이는 내가 걱정한 것과 같이, 처음에는 좀처럼 게임에 적응하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컨트롤러를 불편해했고, 시간을 쏟아부어도 성장하지 않는 링크라는 캐릭터를 못내 답답해했다. 무엇보다 아들은 일주일에 주말에 한정하여, 하루 한 시간씩 총 두 시간을 할 수 있었기에, 링크를 성장시키기에는 시간이 턱 없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이 게임에서 아빠의 역할은 참 소중하다. 나의 역할은, ①지도의 어두운 부분을 밝히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것, ②아들의 게임 캐릭터가 먹을 충분한 음식과 무기를 미리 구해 놓는 것, ③마지막으로, 인벤토리를 늘려주는 코르그 열매(사실은 똥)를 주으러 다니는 것이다. 요약하면, 아들의 부하(쫄짜) 노릇을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나는 부하(쫄짜) 노릇에도 충실했다.
아들이 소중한 게임 시간을 재미있고 보람차게 쓰려면, 프로 게이머의 매니저처럼 뒤에서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두어야 했다. 참 말은 쉬워 보이지만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기에 평소에도 퇴근 후 아들이 잠들고 나면 틈틈이 아들의 게임 캐릭터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아들이 하기 귀찮은 일'들을 뒤에서 해두었다.
나도 이 부하 노릇에 얼마나 집중하고 열심히 했으면,
글을 쓰다가 노트북 앞에서 잠든 적은 있어도, 게임기를 들고 잠든 것은 난생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게임의 절반을 넘길 즈음, 아내는 기막힌 방법으로 이를 독서로 연결했다.
아내는 영어로 된 500 페이지가 넘는 공략집을 심쿵이에게 선물했다.
이 책 안에는 심쿵이가 원하는 모든 정보가 녹아들어 가 있었다. 책 안에 길이 있다고 했고,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다. 심쿵이는 책 페이지에 일일이 표식을 붙여두며 게임과 공략집을 동시에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책을 많이 읽는 아들이지만, 엄마를 따라다니는 길 어디든 크고 무거운 젤다의 전설 공략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사를 준비하는 동안, 부동산이든 가구점이든, 백화점이든 틈만 나면 작은 손으로 책을 펼쳤다. 책은 모두 영어로 되어있고 글자도 매우 작아서 심쿵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웠지만 심쿵이는 꾹 참고 읽어냈고, 복잡하게 얽힌 스토리를 머릿속에서 천천히 풀어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몰입하는 모습이 마치 게임 속 하이랄의 연구자와 같았다.
그리고 이제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도 9부 능선을 넘어, 마지막 악당인 '가논'만을 남겨둔 상황이다.
아들의 친구가 되는 아빠
아들과 함께 젤다의 세계를 탐험하며 친구처럼 지냈지만, 돌이켜보면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난 아들의 친구였던 것 같다. 심쿵이가 네 살 무렵, '씨름 장사 동이'라는 동화책을 아들에게 자주 읽어줬다.
소년 장사 동이가 동네의 씨름 대회에서 큰 어른들을 이겨내고 대회에서 우승한다는 단순한 내용이었지만, 어린 아들은 동화 속의 소년이 커다란 어른들을 들배지기로 넘기는 장면을 특히 좋아했다. 나는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었고 또 아들의 반짝거리는 눈을 보는 것이 좋았다.
내가 이 책을 읽어 줬던 또 하나의 이유는, 책을 읽고 나면 심쿵이는 아빠에게 늘 씨름을 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름만 씨름이었지, 사랑하는 아들을 품에 안고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는 놀이었다. 한 번은 내가 이기고 또 한 번은 져주길 반복하면 아들은 어느새 내복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아직은 아기 향기가 솔솔 풍기는 아들을 가깝게 품에 안고,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 따뜻한 체온을 온몸으로 느끼며 네 살 아들의 친구가 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아들의 관심사는 계절처럼 변해 갔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그 모든 순간의 반짝임이었다.
하지만 모든 순간 아들의 옆에 있어줄 수는 없었다. 많은 시간을 중국에서 출장으로 보냈고,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야 잠든 아들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다.
아내가 집을 비운 주말, 햇살 아래 아들과 자전거를 타고 달콤한 간식에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고, 저녁으로 햄버거를 먹으며, 에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함께 봤다. 엄마가 있을 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잔뜩 한 아들은 나를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가끔은 아빠가 친구 같다니까!"
그 한마디에, 가슴 한켠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왜냐하면 나는 아들의 아빠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친구이기도 했고, 또 현재의 모험을 함께하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아들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면,
'씨름 장사 동이'의 '김서방'이 되어도 좋았고, 게임 속의 코르그 열매를 줍는 부하가 되어도 좋았다.
아마도 미래를 생각하면, 나는 점점 더 굼떠지고 늙어가겠지만, 아들은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현명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언젠가 심쿵이는 더 이상 나와 친구처럼 지내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성장한 아들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오늘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 날을 위해 나는 아들과 함께한 오늘을 이 글 속에 남기고 싶다.
이 글이 이 곳에 남아 시간이 흘러도 우리 부자의 우정을 조용히 되새겨 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