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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쿵, 나에게 봄의 꽃으로 피어난 이름

책 읽는 아들, 글 쓰는 아빠 #17

by Liu Ming
사십 대의 어느 날, 문득 내 마음에 꽃이 피어 있음을 깨닫는다.


봄이 왔다.

천도가 넘는 쇳물조차 녹이지 못할 것 같던 나의 마음이, 솜사탕처럼 보드라운 봄꽃 한 송이에, 어느새 사르르 녹아내린다. 봄 꽃의 봉우리는 작고 힘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고 여린 꽃은 세차게 내리는 봄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조금이라도 더 길게 봄 내음을 우리 마음에 불어넣으려는 것처럼, 씩씩하게 나뭇가지에서 푸르름을 준비한다.


이십 대와 삼십 대에는, 한 겨울에 굳어진 메마른 땅처럼 나의 마음은 건조하고 딱딱하기만 했다. 겨울의 해는 나의 마음을 녹이기에는 너무 낮게 떠올랐고, 제멋대로 흩뿌려진 씨앗들은 뿌리내릴 틈조차 없이, 메마른 땅 위를 바람에 이끌려 이리저리 떠돌기만 했다.


그렇게 차갑고 메마르기만 한 마음을 가졌던 어느 여름날, 나는 아내를 만났다. 아내와 결혼을 결심한 날, 나는 메마른 마음속을 깊이 파내어,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오아시스를 마음 한가운데에 마련했다. 나의 마음을 마시는 아내를 보며 행복했지만, 아내를 위해 만든 오아시스를 제외한 나의 마음은 그저 건조한 모래 바람이 불 뿐이었다.


2016년 4월 15일, 봄 꽃이 만개한 어느 날, 작은 생명이 우리에게 왔다. 새 생명의 존재를 알게 된 날, 우리는 혹시라도 작은 생명이 세상을 만나지 못할까, 노심초사 끝에 ‘심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심쿵이는 세상이 놀랄 만큼 큰 울음소리로 우리 품에 안겼다.


그러나 아기를 키우는 일은 동화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밤낮으로 아기를 안고 있어야 했으며 분유를 타거나 작은 손수건을 게다가 잠드는 일들이 투성이었다. 그렇게 1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르니 지독했던 나의 삼십 대는 어느새 지나가 버렸고, 직업도 가정도 안정적인 사십 대의 중년이 되었다.


사십 대가 되어서야 뒤늦게 봄이 왔음을 깨닫는다.

오랜 시간, 내가 헤쳐 나가야 할 앞만 쳐다봤고, 때때로 뒤를 돌아볼 때면 나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아내와 아이를 향해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개를 들고 옆을 돌아보며, 나의 인생에 봄 꽃이 피어있음을 깨닫는다.




수박 수영장


오늘 소개하고 싶은 책은, 안녕달 그림책의 '수박 수영장'이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엔써니 브라운만큼 유명한 책으로 지금까지 소개한 책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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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수영장"은 여름의 상징인 수박과 수영장을 결합한 독특한 상상력을 담은 그림동화로, 그림 하나하나가 서사와 서정을 잘 표현하여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수박이 갈라지는 순간과 여름의 기운을 잘 전달하는 내용이 돋보이며, 수박을 먹으며 느끼는 시원함과 여름의 끝을 수박 수영장의 폐장으로 표현하여 여름의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구름이 양산이 되고 샤워기로 변신하는 장면은 독자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며, 여름의 추억을 되살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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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쿵이와 나는 수박도 좋아하고, 수영도 좋아한다. 그렇기에 수박 안에서 수영을 한다는 즐거운 상상은 우리를 이 책 속으로 뛰어들게 했다. 책장을 앞뒤로 넘기며, 심쿵이는 책 속으로 빠져들었고 나는 반짝이는 심쿵이의 눈 속으로 빠져 들었다.


늦은 저녁, 글을 쓰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문득 한강 작가와 그녀의 남편의 대화가 떠올랐다.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아. 여름엔 수박도 달고... 그런 것 다 맛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그들의 대화를 되새기며, 수박 안에서 수영하는 그림 속의 아이들을 바라봤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마치 수박 안에서 수영을 하는 것 같은 일이다. 그만큼 맛있거나 재밌다는 것이 아니라,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기분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심쿵이와의 하루는, 아니 모든 순간은 그만큼 특별하다.





봄의 꽃 잎이 떨어지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내와 심쿵이는 나에게 봄이 왔음을 반드시 알려주는 것처럼, 새로 장만한 거실 테이블에서 사이좋게 작사와 작곡을한 봄의 노래를 하루 종일 흥얼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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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불어넣으며 노란색 멜로디언을 치는 아들의 모습에 마음속에 쌓여있던 걱정과 근심이 모두 날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생일을 하루 앞둔 늦은 저녁, 아내가 재택근무를 하는 사이, 심쿵이는 풀이 죽은 듯 소파로 다가와 내 옆 자리에 앉는다. 이사를 오고 이제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전학을 간 학교에서 좀처럼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쉽지 않은지 얼굴이 울상이다. 그러며 나에게 이전 살던 동네에서 친하게 지냈던 다섯 명의 친구를 주인공으로 만든 소설을 보여준다. 심쿵이는 옛 친구가 그립다며 꼭꼭 숨겨두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나는 아들의 약해진 마음 앞에서, 위로를 건넬지 힘내라 말할지 망설인다. 그러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로 돌아가 비슷한 경험을 두서 없이 전한다. "심쿵아, 아빠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많았어. 아빠가 사는 곳은 늘 학교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는데, 아빠가 사는 동네에는 17년 동안 같은 학교 친구가 한 명도 살지 않았거든. 한 번은 국민학교 시절 다른 동네로 총 싸움을 하러 놀러 갔는데, 그 동네 애들이 자기들끼리 편을 먹고, 아빠한테 총을 마구 쏘는 거야… 그날 진짜 속상했었지." 라며 주절주절...


내게 봄을 알려준 그 꽃이, 피할 수 없는 봄비를 맞고 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봄비가 잠시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봄의 꽃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는 거센 태풍이 오더라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튼튼하고 무성한 푸른 잎이 돋아난다는 것을 말이다.


이른 아침, 심쿵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놀이공원으로 나선다.

꽃잎 하나가 떨어지면, 그 자리에 두 개의 새싹이 자라난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은..

아들의 아홉 번째, 가장 특별한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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