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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떠나는 환상 모험(제로니모 스틸턴)

책 읽는 아들, 글 쓰는 아빠 #16

by Liu Ming
한비야 같은 삶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올해가 시작되고 고작 세 달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몇 번의 이륙과 착륙이 반복되었는지, 삶의 업을 중국에 올려놓은 후, 나는 매 달 짧게는 며칠, 길게는 열흘 넘는 시간을 타국에서 보내고 있다.


이른 아침, 베이징. 오늘 기분에 어울리는 안경을 고르고, 잘 다려진 흰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채운다. 광이 나지 않는 검은 구두를 신으며 커피 향이 감도는 호텔 라운지로 내려가 조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반면, 밤이 되면 낯선 침대에서 쉽사리 잠들지 못한다. 간신히 잠에 들어도 자주 깬다. 새벽 여섯 시, 건조한 공기에 코끝이 따갑다 싶더니, 또다시 코피가 흐른다. 출근길, 급하게 흐르는 피를 막으려 대충 코에 휴지를 쑤셔 넣고 길을 나선다. 회사 건물 앞, 휴지를 빼내 쓰레기통에 던지고 아무 일 없던 듯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일 것이다.


어린 시절, '한비야'와 같이 자유로운 삶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마흔이 넘은 지금, 그녀의 이름을 들으면 예전처럼 가슴이 뛰기는커녕, 때때로 들려오는 불편한 소식에 씁쓸한 표정을 짓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의 한비야는 내게 ‘바람의 딸’이었다. 그녀의 책을 펼치면 지구본 위에서만 존재하던 그리스, 이집트, 몽골이 생생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책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나를 잠시나마 데려가고는 했다.


언젠가 세상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중국에서 유학을 했고, 또 현지에서 주재하며 일을 했기에, 적어도 중국에서발길 닿는 대로 많은 곳을 가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학생 시절에도, 돈을 버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돈이 아까워서’ 쉽게 집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


명절이 되면 어른들은 중국의 유명한 여행 명소 사진들을 나에게 보여주시며 이것저것 물어보시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그 어느 한 곳에도 가본 적이 없다. 다만 이 사실을 선뜻 입밖에 내기는 어렵다. 특히 처가에서 '중국 박사'라고 불러주실 때면, 그저 '씨익'하고 웃을 뿐이다.


세상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었다.

중국의 만리장성, 프랑스의 에펠탑, 로마의 콜로세움, 이집트의 스핑크스, 뉴욕의 타임 스퀘어.

그곳에서 '살아있음'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한정된 돈과 시간 앞에서

'현재를 사랑하는 배짱이'가 아닌, '미래를 걱정하는 개미'의 삶을 살아왔다.


그렇지만 나의 아들은 다르게 키우고 싶다.

이 넓은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놀이터'로 만들어 자유롭게 살게 해주고 싶다.




제로니모의 환상모험


내가 이런 고민에 빠지는 동안, 심쿵이는 주말 오후에도 책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다. 어느새 부쩍 커버린 아들은 얼마 전, 유치원 때부터 좋아하던 『제로니모의 환상 모험』이 꽂혀 있던 책장의 한 칸을 다른 책들에게 내어주기로 결정했다.



《제로니모의 환상모험》 간단 소개
모험을 싫어하는 겁쟁이 기자 제로니모 스틸턴이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며 신비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이야기다. 보물을 찾아 떠난 중세 기사 여행, 해적들과의 대결, 공룡이 살아있는 섬 등 다채로운 모험이 펼쳐진다. 각 이야기마다 우정, 용기, 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으며, 생생한 삽화와 개성 넘치는 폰트가 읽는 재미를 더한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모험 이야기를 찾는 독자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시리즈다.


심쿵이가 처음 제로니모를 알게 되고, 또 책을 갖고 싶다고 했을 때, 아내는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아무리 독서를 좋아하는 아이라 해도, 겨우 여섯 살짜리가 장편 소설을 읽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심쿵이는 꼭 갖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중고마켓 앱을 통해 약속을 잡고, 늦은 저녁 약속 장소로 책을 받으러 나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가로등 아래,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과 그의 아버지가 커다란 박스를 들고 다가왔다. 여학생은 마치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듯,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이 책... 누가 읽을 거예요?"

우리는 여학생의 순수한 눈을 보며, 동시에 "남자 동생이 읽을 거에요"라고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제로니모의 새로운 세계'가 우리 집에 왔다. 책이 도착한 늦은 저녁, 심쿵이는 "제발 한 권만"을 외치며 책을 펼쳤고, 피곤했는지 이내 책을 손에 쥔 채 잠이 들었다.


『제로니모의 환상 모험』은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저자인, '제로니모 스틸턴' (필명)이 떠나는 탐험 이야기다. 제로니모는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겁이 많지만, 매 번 용기를 내어 신비하고 위험한 모험에 도전한다. 그렇기에 심쿵이에게 제로니모는, 모험에 앞장서는 리더나 영웅이 아닌 모험을 함께하는 친구로 느껴졌을 것이다.


'제로니모의 환상모험 세계'가 우리 집에 온 후, 심쿵이는 주말 아침잠에서 빨리 깨어난 날이면, 어김없이 이미 몇 번이나 읽은 700 페이지즘 되는 두꺼운 책을 아직은 작은 허벅지에 올려둔 채 소파 위에서 아침 식사를 기다렸다.


저 작은 손으로 어떻게 저리 두꺼운 책을 쥐고 있는 것인지, 우리 부부는 신기하면서도 흐뭇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하지만 심쿵이는 책 속의 제로니모가 찾지 못했던 보물을 찾으려는 듯, 두 눈을 반짝거렸고 진지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아빠, 엄마! 여기 이 부분만 읽어봐"

제로니모 전권을 읽으라는 심쿵이의 부탁에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심쿵이가 추천한 짧은 부분이라도 읽고 나면, 비록 제로니모의 환상모험을 깊게 이해할 수는 없어도, 마치 '제로니모와 심쿵이가 함께 사는 환상모험이라는 세계'로 초대받은 기분이었다.


심쿵이는 부모가 보여준 세상 말고도,

책 속에서 스스로 다른 세상을 만나고 탐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숨 막히던 3월의 출장이 끝이 나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수십 명의 중국인들과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우정을 쌓는다며 오십 도가 넘는 중국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다음 날 새벽, 숙취를 이겨내며 경영진에게 보고할 리포트를 쓰기 위해 집중되지 않는 정신을 부여잡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야 이제는 견딜 만하지만, 왜 이렇게 회사의 사람 문제는 끝이 없는 것일까... 늦은 밤 낯선 베이징 밤거리를 걸으며 마음을 안정시키길 여러 번...


드디어 마침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공항버스에서 내리고 사람 두세 명이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길을 걸어 집으로 향한다. 평소에 지나가던 이 길이 마치 탐험이 시작되는 듯 새롭게 느껴졌다. 기분 좋은 봄 향기가 아직은 겨울을 이기지 못한 채 응원을 바라는 듯 따뜻한 햇살에 실려 내 얼굴에 와닿는다.


회사의 끝나지 않은 일들과 세상의 무게에 복잡한 마음을 안고 캐리어를 끌며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그리고 거실 한쪽에서 작은 몸이 파고든다. 나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를 품에 꼭 안고 거실을 빙빙 돈다.


"아빠~! 여보~!"

사랑하는 심쿵이와 아내의 목소리는 답답했던 나의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나의 삶의 이유가 버텨내는 것이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신나는 모험 속의 주인공으로 그저 탐험을 즐기면 된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나의 앞에는 '스핑크스'도 '타임스퀘어'도 없고,

옆에는 '한비야'도 '제로니모'도 없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심쿵이가 내 옆에서 우리의 일상의 모험을 함께한다.


늦은 토요일 저녁,

미래만 걱정하던 개미는, 이제 오늘을 사랑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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