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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시어, 엄마가엄마가, 내가내가!

책 읽는 아들, 글 쓰는 아빠 #14

by Liu Ming
우리 집, 작은 선비 심쿵이를 소개합니다.


‘선비.’
조선 시대, 선비는 학문을 닦으며 세상을 바르게 이끄는 존재를 뜻하는 말이었다. 유교적 가치를 몸소 실천하며 품격 있는 삶을 살아갔던 그들처럼, 우리 집에도 그런 기품을 닮은 작은 선비가 있다. 바로 우리 아들, 심쿵이다.


손바닥만 한 등을 받쳐줘야 간신히 앉을 수 있던 아기 시절. 고사리 같이 작은 손으로 책을 쥐고 낑낑대며 넘기던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다. 그렇게 어렸던 아들이 벌써 초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을 맞았다. 손에 들린 책들은 점점 두꺼워졌고, 글밥이 가득 찬 페이지도 자신 있게 넘겨낸다. 때로는 엄마가 보는 어렵고 무거운 책까지도 주저 없이 펼치며, 어려운 단어들도 곧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짧은 동화책부터 어려운 고전까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심쿵이의 세상은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책 속 이야기에 푹 빠져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문득 생각한다. 우리 아들은 머지않아 자신만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겠구나. 그 길 위에서 만날 수많은 가능성이 문득 설렘으로 다가온다.




우리 집 금쪽이를 소개합니다.


‘대통령, 교수, 작가...’

아들 바보인 아빠의 생각에는 심쿵이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자랑스러운 심쿵이에게도 ‘금쪽이’였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은 우리 부부만 알고 있는 아들의 흑역사를 살짝 털어놓아 보려 한다.


물론 지금의 아들도 사랑스럽지만, 만 두 살의 심쿵이는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쌀과자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아장아장 걷는 모습에 카메라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게다가 '쌕쌕'하고 숨 쉬는 소리만 들어도 온 세상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행복과 사랑, 그리고 이 세상을 버텨낼 용기가 심쿵이의 작은 몸짓들 속에서 피어났다.


다만 어느 날, ‘만 두 살’이라는 악명 높은 시기는

심쿵이를 ‘시어시어(싫어싫어)’라는 몹쓸 저주에 걸리게 만들었다.


순진무구한 천사 같은 얼굴과는 달리, 어디서 산삼이라도 먹었는지 꺾이지 않는 고집과 눈물, 그리고 성난 고라니와 같은 "시어시어"의 비명 앞에서 우리 부부는 두손두발 들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부터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안 그랬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백하고 변론했다. 결국 서로에게 덮어 씌우기, "아마 너를 닮았을 거야"라는 극단적인 생존 전략까지 불쑥 불쑥 튀어나오게 되었다.


특히 단골 이비인후과에서 진료를 마친 뒤 병원 바닥에서 30분 동안 발버둥을 치는 심쿵이를 진정시킬 때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부부를 향해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눈살을 찌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멍하니 포기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왜 부모들이 우는 아이를 내버려두는지 온몸으로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7년이 지난 지금도 심쿵이가 그 시절 뭐가 그렇게 싫다고라고 했던건지 곰곰이 생각해 봐도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시절의 저주는 끝이 아니었다.

‘시어시어’의 저주가 사라질 무렵, 심쿵이는 ‘내가내가’의 저주에 걸렸다.




내가내가 vs 엄마가엄마가


심쿵이가 태어나기 몇년 전 즘, 평범한 오후, 회사 선배와 점심 식사 후 커피 타임을 가질 때였다.


선배는 걱정 어린 눈 빛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딸이 악령에 씌인 것 같아."


나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테이블 위 선배 스마트폰의 배경 화면 속, 인형 같은 선배의 딸 사진을 바라봤다. 그 순간, 아마도 선배가 육아 스트레스로 악령에 씌인 게 아닐까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 뒤, 내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왜냐하면 심쿵이가 '시어시어'의 저주를 졸업할 즈음,

아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가내가, 엄마가엄마가'의 저주에 걸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한다. 천사 같은 우리 아들, 심쿵이는 아무 잘못이 없다.

애초에 엘리베이터 버튼이 아이들의 마음이 현혹되도록 동그랗게 만들어져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버튼 속에 작은 지박령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버튼을 누르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우리 천사 같은 아들이 "내가내가~~!!"라며 악을 쓰고 바지를 붙잡고 울 리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절 심쿵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내가~!"라며 를 쓰고 울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이미 눌러진 엘리베이터 버튼을 취소하고, "심쿵이가 해봐"라고 여유 있게 기회를 주며 타일렀다. 그런데 심쿵이는 그때마다 돌변해서 "엄마가 엄마가"라며 대성통곡을 하곤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아이의 변덕에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아이가 갑자기 엄마를 물어버리는 저주까지 걸릴 줄은 차마 몰랐다.




저주를 이겨내는 책


심쿵이 엄마는, 나와 둘이 있을 때면 아이의 흑역사를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마도 최대 피해자이자 치료자로서 아이와 함께 고난을 이겨냈던 순간이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서일 것이다. 심쿵이 엄마는 아이의 나이에 맞게 책을 고르고 추천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아이가 엄마를 무는 습관' 마저 책으로 치료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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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마이클 달 / 그림, 아담 레코드 / 옮김, 공상공장


이 책은 ‘소리치면 안 돼’, ‘때리면 안 돼’, ‘밀면 안돼’ 시리즈 중 하나로, 무시무시한 이빨을 가진 티라노사우루스, 리노가 주인공이다. 리노는 무엇이든 깨물어 보는 걸 좋아한다. 장난감을 깨물고, 의자를 깨물고, 심지어 신발까지 깨문다.


아기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책을 읽어줬을까 싶지만, 심쿵이는 이 책을 읽어줄 때마다 도망을 가거나 몰래 책을 안 보이는 곳에 숨겨뒀다. 아마도 심쿵이는 자신의 잘못을 꼬집고 드러내는 이 책이 싫었을 것이다. 책은 아이에게 마음껏 깨물어도 되는 것은 오직 음식뿐이라고, 장난감, 의자, 신발은 절대 깨물면 안 된다고 친절히 알려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절대로 엄마를 깨물면 안 돼."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한다.

작가 마이클 달 님께서도 아이에게 깨물린 경험이 있으셨을까?

아니었다면 굳이 두 번이나 '깨물지 말라'라고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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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지나, 나는 심쿵이 엄마에게 물었다.

"그런데 심쿵이는 왜 그렇게 자기를 깨물었던 거야?"


심쿵이 엄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좋아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깨물었던 거야."


아이가 떼를 써도, 변덕을 부리며 통곡해도, 심지어는 자신을 깨물어도

변함없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을 심쿵이 엄마를 통해서 느낄 수 잇었다.




사랑을 주는 부모, 사랑을 받는 자식


아들의 성장 과정을 곰곰이 되짚어보면, 도무지 공짜로 배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갓 태어난 아들은 숨 쉬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모유(분유)를 먹는 것도, 소화를 시키는 일도, 잠을 자는 일도, 하다못해 응가를 하는 일도, 모든 것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응가”라며 힘을 주는 표정을 지어서 알려줘야 했던 그 순간들, 하나하나가 기적 같았다.


아들은 스스로 한 걸음을 떼지 못했다. 작은 손을 잡고 허리를 숙여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해주는 일은 영광스럽고 행복한 일이었지만, 끊어질 듯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수백 번, “조금 더 젊을 때 아이를 낳을 걸”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처럼, 아들은 ‘희망’, ‘슬픔’, ‘두려움’, ‘분노’라는 감정들과 처음 대면했다. 어린 심쿵이는 처음 느끼는 감정 속에서 불안하고 불편하고 무서워했다. 만 두 살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울거나 떼를 쓰거나 바닥에 누워 몸부림치거나 엄마를 깨무는 일이었다.


몇 년 동안 울고 떼를 쓰고 이로 깨물어도 이해하고 보살펴주고 사랑을 베푸는 일은 아마도 부모가 아니라면 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이들은 축복 속에 있다. 우리 심쿵이 또한 부모의 사랑과 축복 속에서 자랐으나, 세상에는 우리 아들만큼 사랑받지 못했거나,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많다.


어딘가에서 부모 혹은 어른의 보살핌을 바라는 어린아이들.

그 아이들의 마음에 작은 빛과 따뜻한 온기가 함께하길 바라는 저녁이다.


우리 아들, 심쿵이가 느꼈던 그 사랑과 보살핌만큼,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사랑받고, 따뜻한 품에 안겨 자라기를 바란다. 그들이 언젠가 부모가 되어, 또 다른 아이에게 그 따뜻한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그런 순간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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