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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u Ming Sep 18. 2024

별의 커비, 번개맨을 꿀꺽 삼키다.

책 읽는 아들, 글 쓰는 아빠 #12

낡은 회전 선풍기


어린 시절, 추석이면 한복을 입고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성묘를 가곤 했다. 하지만 올해의 추석은 다르다. 차창 밖 온도는 38도를 가리키고 있다. 지구가 정말 아프다는 말이 이제야 실감 난다. 이런 날씨를 겪으니 우리 집도 지구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절로 느껴진다.


에어컨 없이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추석이다. 올해는 특히 가족들이 유난히 많이 모였다. 열다섯, 열여섯 명이 한자리에 모여 밥이라도 먹으려면, 이런 더위 속에 에어컨은 필수다. 다행히 우리는 어린 심쿵이를 이유로 작은 방을 따로 배정받았지만, 그 방 역시 더위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열대야에 지쳐버린 저녁, '으드득' 소리를 내며 힘겹게 돌아가는 부모님 댁의 낡은 선풍기와 눈이 마주친다. 서른 살은 먹었을 이 녀석을 보니 문득 생각이 든다. 참, 이게 꼭 우리 세대의 모든 아빠 같다. 못난 얼굴에 오래된 선풍기 하나가 전선에 매달려, 힘겹게 아내와 아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바람을 만들어 낸다.


바람은 최신 에어컨의 그것처럼 시원하지도 강력하지도 않지만, 선풍기는 쉼 없이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낸다. 평소에는 그 존재조차 잊었던 낡은 선풍기가, 오늘따라 "내가 여기 있으니 잠시라도 편히 쉬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애잔하게 느껴진다.


더 안타까운 건, 이 선풍기가 아내와 아들에게는 어쨌든 바람을 전해주고 있다는 것.

그러나, 나에게는 그 바람조차 제대로 오지 않는다.


이 녀석이 내게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참, 나랑 똑같지 않냐"라고.  




안...녕! 나...는 브언~~개..맨!


낡은 선풍기처럼 잊힐지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이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아들이 좋아했던 장난감 친구들이 그렇다. 그 장난감 친구들은 아들의 손을 떠난 적이 없을 만큼 소중히 여겨졌지만, 이제는 침대 밑의 추억 상자나 방 서랍 속 깊은 곳에서 아들의 손길이 다시 한번 닿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그 장난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수많은 장난감들이 아들의 삶을 스쳐갔지만, 그중에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몇몇 친구들이 있다.


첫 번째는 아들의 첫 친구이자 장난감인 '보니'다. 보니는 '딸랑딸랑' 소리가 나는 신생아용 장난감으로, 하루 종일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심쿵이 눈앞에서 지루하지 않게 보니를 흔들어 주고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안녕, 나는 네 여자친구 보니야!"라고 말을 걸었다. 심쿵이는 처음에는 멀뚱히 쳐다보다가도, 보니의 '딸랑딸랑' 소리가 나면 환하게 웃으며 우리 마음을 녹였다.


그다음은 '뽀요요'라고 불렀던 '뽀로로', 애니메이션 '카'의 ‘맥퀸’, 그리고 슈퍼윙스의 ‘봉반장’이다. 이 장난감들은 심쿵이너무나도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었는지 여기저기 표면이 닳아 있었다. 또, 가끔 이 친구들이 침대나 소파 사이에 빠져 보이지 않으면 심쿵이는 한 시간씩 울곤 했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장난감을 몰래 여러 개 사서 비축해 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장난감들을 넘어서는 심쿵이의 절대적 최애는 바로 '번개맨'이었다. 

심쿵이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번개맨 옷을 입고 다녔고, TV와 뮤지컬 속 번개맨을 진짜 영웅처럼 여겼다. 몇 년 동안 번개맨은 심쿵이의 마음속에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제 그 모든 장난감은 침대 밑이나 서랍 속, 아니면 중고 거래로 우리 집을 떠났지만, 그중 번개맨과의 이별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심쿵이는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 순간의 아쉬움을 잊을 수 없다.


번개맨은 여기저기 닳고, 결국 목소리마저 갈라져

"안...녕! 나...는 브언~~개..맨!"이라는 인사를 힘겹게 남기고 떠나갔다. 

번개맨은 끝까지 아들의 친구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별의 커비, 번개맨을 삼키다.


번개맨이 떠난 영광의 자리 '별의 커비'가 차지했다.

커비는 분홍색 물방울처럼 생긴 캐릭터로, 무엇이든 삼켜서 그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자동차나 트레일러, 전구나 계단, 심지어 비행기까지 삼켜 변신하는 커비의 능력에 심쿵이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작은 분홍색 물방울이 어찌나 귀여운지, 나도 옆에서 게임을 지켜보다 보니 왜 심쿵이가 커비에 빠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심쿵이는 역시 ‘책 읽는 아들, 글 쓰는 아빠’의 주인공답게, 게임 속 커비를 책으로 재해석하고 상상 속의 친구로 구체화해 나갔다. 별의 커비는 그렇게 심쿵이의 새로운 사랑이 되었다.



공식 홈페이지에 적힌 줄거리
하품이 날 정도로 평화로운 푸푸푸랜드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커비, 웨이들 디, 디디디 대왕, 메타 나이트가 해결해 줍니다.
츠바사 문고에서만 읽을 수 있는 오리지널 스토리나, 대인기 게임의 소설화,
메타 나이트가 주인공인 외전 등등 즐거운 이야기가 가득!
다양한 카피 능력으로 두근거리는 대모험에 출발하자!!


심쿵이는 소설과 만화를 완벽히 섭렵하, 또 게임 속 캐릭터들의 스토리를 분석하고 비교하며 나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줬다. 그 과정에서 나는 자연스레 심쿵이가 만든 세계로 끌려 들어갔다. 심쿵이는 커비 역할을 맡고, 나는 커비의 친구(사실은 부하) '반다나 웨이들 디'가 되어 매주 주말 게임 시간마다 커비(심쿵이)를 따라다녔다.


나의 역할은 열심히 커비를 도와 '창 찌르기 버튼'을 열심히 누르는 것이었는데, 심쿵이는 어려운 게임을 포기하지 않고 주말 한 시간씩의 게임 시간을 사용해 결국 엔딩까지 마무리했다. 게임이 끝나도 심쿵이의 커비 사랑은 멈추지 않았고, 방 안에는 작은 커비 피규어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커비를 만나러, 일본으로!


어느 날 심쿵이는 친구에게서 일본에 '커비 카페'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에게 커비 카페에 가고 싶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시야가 넓어지는 여행을 권하고 싶었기에, 캐릭터 카페를 가기 위해 일본까지 가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 바보' 아빠인 나로서는 심쿵이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아들과 아내에게 일본 여행을 권했고, 둘만의 용감한 모험을 응원하기로 했다.


심쿵이는 여행 준비에 들뜬 나머지, 미술학원에서 직접 만든 캐리어에 가장 먼저 '커비 게임 칩, 커비 인형, 커비 책'을 만들어 붙이고 마지막으로 여권을 만들어 넣었다. 그렇게 아내와 심쿵이는 일본 도쿄로 떠났다.



일본에 도착한 아들은 아내의 일본인 친구 아들과 금세 친구가 되었고, 둘이 신나게 놀면서도 머릿속에는 오직 커비 카페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아내는 전화로 웃으며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 둘은 아들의 순수함에 그저 흐뭇했다.


드디어 커비 카페에 도착한 심쿵이는 분홍색 물방울들로 가득한 세상을 마주했다. 그리고 '카톡!'이 연이어 울렸다. 아내가 보내온 사진 속에서 심쿵이는 커비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고, 아내는 그런 심쿵이를 보며 행복해했다.



일본과 중국,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한국으로


아내와 심쿵이는 일본에서, 나는 중국 출장에서 돌아와 우리 가족은 마침내 집에서 재회했다. 심쿵이는 가방에서 커비 인형과 피규어를 쏟아내며, 여행의 추억을 자랑스레 풀어놓았다. 나는 추석날 그 낡은 선풍기처럼 조용히 아내와 아들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심쿵이가 커비 엽서를 아빠에게도 써줄 줄 알았지만, 아들은 그저 암스테르담에서 엽서를 보낸 친구에게만 답장을 썼다고 했다. 나에게는 엽서 한 장 없었다.


"심쿵아, 설마 아빠를 그 낡은 회전 선풍기처럼 잊어버린 건 아니지?"


쿨하지 못한 아빠는 낡은 선풍기처럼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지만,

여전히 변함없이 따뜻하고 시원한 바람을 보내며 아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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