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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힘, 서로를 향한 따뜻함

책 읽는 아들, 글 쓰는 아빠 #13

by Liu Ming
코 끝이 아린 추위가 피부를 파고드는 겨울이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허공에 부딪혀 희미하게 흩어지고, 찬 공기는 뺨을 사정없이 스쳐 지나간다. 불덩이처럼 타올랐던 작년 여름의 기억은 벌써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다. 지독히도 길고 더웠던 작년 여름을 기억하는 이가 누가 있을까?


사람들은 조금 더 길고, 또 더 두꺼운 패딩을 꺼내 입고 그것도 모자란 지 하나같이 패딩의 모자를 뒤집어쓴 채 길거리를 나선다. 나는 그렇게 춥던 하얼빈에서 3년이나 지냈음에도, 마치 오늘의 추위가 평생 처음 겪는 추위처럼, 롱 패딩도 모자라 귀도리와 목도리로 얼굴을 감싼다.


새벽길에 나서면 칼날처럼 날카로운 공기가 폐를 찌르는 듯하고, 사람들은 찬 기운 속에서 움츠린 어깨로 길을 서둘러 걷는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여유는커녕, 오로지 발길이 닿는 곳으로만 시선이 향한다. 나 또 정해진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새벽 시간임에도 빠르게 걷거나 그것도 늦은 듯 느껴질 때면 뛰기 시작한다.


매일 새벽이면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등이 굽은 채 폐지 가득 담긴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는 단 하루도 그 자리를 비운 적이 없다. 할머니의 흰 머리칼과 얼룩진 손길 그리고 굽어진 등은 새벽 공기보다 더 깊은 추위를 느끼게 한다.


할머니의 힘든 발검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추우실까, 또 얼마나 힘드실까"라는 생각에 죄책감과 함께, 얼어붙은 새벽 공기 속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떠오른다.


할머니의 무거운 한 걸음만큼 추운 겨울이 우리 곁을 찾아왔다.

이 겨울이 나에게는 회사 버스를 타기까지 짧은 거리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주 느리고 긴 터널같이 느껴질 생각에 짧은 기도를 더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온정일 것이다.




눈송이 가스통


겨울이 오면 생각나는 책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눈송이 가스통'이라는 짧은 동화책을 잊을 수 없다.


글, 데지레 프라미에 / 그림, 알랭 프라미에 / 옮김, 최영선


가스통이라는 이름을 가진 눈송이는 어느 날 하늘에서 은빛 춤을 추듯 회전하며 천천히 내려왔다. 빙글빙글 돌며 공중에서 나풀거리던 가스통은 세상을 하얗게 칠하며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갔다. 비와는 다르게 하늘을 빙글빙글 돌며 내려오는 가스통과 친구들은 조금씩 세상을 하얗게 색칠한다. 높은 산들을 지나고 눈밭에서 놀고 있는 강아지를 지나 자리를 잡은 가스통은 깊은 잠에 빠진다. 그러나 봄이 찾아오며 가스통은 친구들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며 겁을 먹는다. 하지만 염려도 잠시, 가스통은 물방울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미끄럼틀을 타듯 신나게 강을 향해 달려간다. 가스통은 물방울 친구와 점점 가까워지며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몇 년 전, 아들이 서너 살이던 겨울날, 심쿵이는 이 책을 참 좋아했다. 하늘에서 춤추듯 빙글빙글 떨어지는 눈송이 가스통을 보며 심쿵이는 눈송이가 되었고, 그런 심쿵이를 보며 우리는 구름처럼 빙긋 웃었다.



산과 산 사이를 어렵게 지나고 눈밭에서 노는 강아지를 지나는 가스통을 보며 마음 졸이던 심쿵이. 그럴 때면 나는 "괜찮아"라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어루만지곤 했다. 가스통이 잠에 들었다는 부분에 이르러, 나는 심쿵이에게 "가스통도 잔다. 우리 심쿵이도 코~오 자야지!"라고 속삭였지만, 심쿵이는 책의 마지막이 궁금한지 눈을 반짝였다.


가스통이 녹아 물방울이 되어 미끄럼틀을 타듯 신나게 내려가는 장면이 나오면, 심쿵이는 내 무릎 위에서 작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나도 탈래!"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심쿵이의 눈빛은 천진난만한 설렘으로 가득했고, 나는 그 모습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주곤 했다.


*아래의 유튜브에서 책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LPkSX9vQi0U




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힘


살아가는 것이 늘 그렇듯 마음 무거운 일 하나둘은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내가 힘들다 말하는 것이 차마 입 밖에 나오지 않는다. 뉴스에서는 가계부채와 환율, 자영업자들의 무거운 어깨가 보도되고, 그들의 그늘진 얼굴에서 현실을 체감한다.


그러나 나는 운 좋게도 집으로 돌아오면 아들, 심쿵이가 기다리고 있다. 심쿵이는 입이 귀에 걸린 듯 활짝 웃으며 나를 반긴다. 눈송이 가스통을 읽어주던 그 겨울을 떠올리면, 심쿵이의 작은 허벅지와 엉덩이에서 느껴지던 체온, 그리고 향긋한 아기 냄새가 기억 속 온기가 되어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덥힌다.


가족이 있기에 나는 새벽 공기와 싸우며 일터에 나간다.

가족이 있기에, 특히 자식이 있기에, 우리는 이 추운 겨울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있다.


몇 주전, 심쿵이와 우리 부부는, '베이비박스'의 산타가 되었다. 아침부터 대형 마트에서 기부하고 싶은 분유와 기저귀를 카트에 담고 '주사랑공동체교회'로 향했다.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그곳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심쿵이에게 오르기 쉽지 않은 곳이었지만, 심쿵이는 우리 부부보다 더 용감하게 앞장섰다.


심쿵이는 작은 손으로 언덕을 짚어가며 힘겹게 오르면서도, 얼굴 가득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빠, 내가 먼저 간다!" 하고 외치는 모습에 우리 부부는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겨울은 차갑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작은 온기들은 결국 큰 강줄기가 되어 흐를 것이다.

우리가 만든 작은 온기도 언젠가 더 큰 온기가 되어 세상을 데울 날을 기다리며,

가스통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듯, 나 또한 이 겨울을 넘어 더 따뜻한 봄을 꿈꾸며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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