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동심
동심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는 '어린이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자식을 키우며 깨달은 것은, 동심이란 단순한 마음의 상태가 아닌, 세상의 무게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방패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른, 근엄해 보이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도, 무서워 보이는 조직폭력배의 두목도, 어릴 적에는 동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순수한 에너지로 빛났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동심은 어린아이들의 특권이며, 어른들이 반드시 지켜줘야 하는 마음이다.
우리 아들, 심쿵이는 올해로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벌써 학교 생활에 익숙해질 때가 되었지만, 아들은 여전히 동심을 잃지 않고 있다. 아직도 인형들과 가끔씩 대화를 나누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비는 그 모습은 여전히 천진난만하다. 이 모든 것이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 동심을 언제까지 지켜줘야 할지 고민에 빠질 때가 있다.
푸른 사자 와니니
"아빠, 이거 읽어봤어?"
어느 날 심쿵이가 책 한 권을 들고 와서 물었다. 그 책은 "푸른 사자 와니니"라는 제목이 적힌 책이었다. 아들은 책 표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그냥 사자가 아니라 와니니라는 사자야.
와니니는 어려운 일을 많이 겪지만, 결국 자기 길을 찾아가는 거야."
푸른 사자 와니니_나무위키
이 책의 주인공 와니니는 초원에서 용맹하기로 소문난 '마디바 무리'의 암사자이다. 그러나 와니니는 마디바에게 쓸모없는 새끼 사자 취급을 받았다. 그러던 중 불의의 사고로 인해 자매 말라이카를 위험에 빠뜨리고 마디바는 와니니를 매몰차게 쫓아낸다. 그렇게 와니니는 떠돌이 신세가 되어버린다. 하필 사냥도 할 줄 모르는 나이였기에 와니니는 굶주림에 시달린다. 그러다 아산테와 잠보. 두 수사자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말라이카를 다치게 한 범인이라고 오해하기도 했지만 점차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사냥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날 죽은 줄 알았던 말라이카와도 재회하였다. 와니니는 말라이카를 죽기 직전으로 몰은 범인이 '네 개의 강이 있는 초원'을 호령하는 수사자 무투라는...
아들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나는 책을 펼쳐보았다.
와니니는 푸른 초원의 왕국에서 살아가는 사자로, 여러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는 이야기였다. 심쿵이는 와니니의 모험에 깊이 빠져들었고, 책 속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여기며 읽어나갔다.
"아빠, 와니니도 처음엔 무서웠지만 나중엔 용감해졌어.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심쿵이가 물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누구나 처음엔 두려움을 느끼지만, 용기는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거란다. 와니니처럼 네가 스스로의 길을 찾게 될 거야."
아들은 이 책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와니니가 건기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도 꿋꿋이 버티고, 마침내 우기를 맞아 새로운 희망을 찾는 과정을 눈을 반짝이며 읽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와니니 인형이 등장했다. 작은 푸른 사자가 아들의 손에 들려있었다.
아들은 와니니 인형의 이름을 '니니'라고 짓고 나에게 말했다.
"아빠, 니니와 나는 도서관에서 운명처럼 만났어. 나는 이 만남을 잊지 못할 거야!"
인형, 니니에게 강아지 옷을 사서 입혀준 아내와 아들
엄마와 '니니' 키우기
"엄마, 니니를 진짜로 키울 수 있을까?"
하루는 심쿵이가 와니니 인형을 안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고개를 돌려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따뜻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심쿵이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주었다.
"우리 니니의 집을 만들어 줄까?"
아내의 말에 아들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심쿵이와 함께 골판지를 꺼내 와니니의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둘은 함께 와니니가 다닐 수 있는 작은 문을 만들고, 집의 입구에는 '니니'라고 명패를 달아줬다. 아내는 아이의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내며, 와니니의 작은 세계를 현실로 만들어주었다.
"엄마, 니니가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심쿵이가 묻자, 아내는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럼, 심쿵이가 지켜주면 니니는 안전하고 행복하지. 그리고 너처럼 용감해질지도 몰라!"
그 순간, 나는 아내가 우리 아들의 동심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깨달았다.
아내는 와니니의 집을 만드는 것으로 단순히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마음을 지켜주고 있었다.
아내는 볼수록 참 좋은 엄마다.
심쿵이의 새로운 친구
심쿵이는 와니니 인형을 마치 살아있는 소중한 친구처럼 여기며, 하루 종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여행을 가도 와니니와 함께였고 설악산에서는 인형을 높이 들어 보여주기도 했다. 학교 가방의 한쪽 주머니에도, 침대 머리맡에도 와니니는 항상 아들과 함께 했고, 와니니를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와니니의 용기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와니니를 높이 들어 올려 설악산을 보여주는 심쿵이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미술학원에 와니니를 데려갔다.
우리는 평소처럼 와니니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라 기대했다.
"니니야, 오늘도 나랑 같이 수업 듣자!"
심쿵이는 작은 목소리로 인형에게 속삭이며, 학원에서 자기의 옆자리에 와니니를 앉혔다.
하지만, 미술학원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짖꿋다고 소문이 난, 같은 반 친구 중 한 명이 와니니를 빼앗아 던지더니, 바닥에 떨어진 인형을 발로 밟아버린 것이다. 아내에게 전해 들으니 심쿵이는 많은 충격과 상처를 받은 듯했다. 아들과 대화하기 위해 이르게 퇴근했다. 심쿵이는 억울하다는 듯이 아빠를 찾아와서 씩씩대며 이야기했다.
"아빠, 왜 그 친구는 니니를 밟았을까? 니니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그 순간, 내 마음은 무너졌다. 아이 앞에서는 침착하려 애썼지만, 속으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남자로서, 아버지로서, 아들의 동심을 어떻게 지켜줘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고, 아이 앞에서 냉정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아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려 노력했다.
"심쿵아, 심쿵이 마음은 어땠어?"
그리고 나는 최대한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아들을 달랬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존중해 주는 사람들만 꼭.. 있는 건 아니야."
동심과 남성성의 현실 사이에서
남자로서 살아온 지난 40년 동안 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성성의 무게를 깊이 체감해 왔다.
남자의 인생은 종종 강해 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친구들 앞에서는 자신의 취향이 아니더라도, 구기 종목이나 격투기 등을 좋아하는 척해야 하고, 때로는 잘 알지 못하는 것들도 잘 알고 있다고 허풍을 떨어야 할 때가 있다. 어릴 때는, 공부, 운동, 싸움을,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취업, 결혼, 사회적 지위까지 남자아이들은 모든 일에서 경쟁하고, 잔인하게도 그들 사이에서 강자와 약자가 나누어지곤 한다.
모두를 너그럽게 받아주지 못하는 남자들의 세상에 태어난 아들을 바라보며, 나는 '남성성'과 '동심' 사이에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아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약자가 되거나 놀림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심쿵이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심쿵아,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는, 니니를 집에 두고 가는 게 어떨까?
꼭 갖고 가고 싶을 때만 가져가고 말이야."
입이 삐죽삐죽하던 심쿵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니니는 집에서 있으라고 할게. 대신 집에 있을 때는 마음대로 해도 괜찮지?"
아들의 눈에는 아직도 와니니가 살아있는 친구라는 순수한 믿음이 가득했다.
나는 아들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상이 좀 더 너그러워서, 동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 시절, 우리는 마음껏 상상하고 놀 수 있는 동심을 가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회는 소년들에게 '남성성'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씌우고, 그 아래에 동심을 감추라고 요구했다. 아마도 아들에게는, 주변 거친 친구들의 '인형은 남자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난감'이라는 편견이, 그 첫 번째 경험이 됐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동심'과 '남성성' 사이에서, 지금 아들에게 세상의 냉혹함을 알려주려는 것이, 과연 시기적절한 것인지 고민이 된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들이 언제까지나 동심을 간직한 채로 자라길 바라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나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세상의 현실을 등지고, 마음의 꽃 밭에서 와니니와 평생 친구가 되라고는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의 편에 서서, 아들을 믿고 그의 성장을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심쿵이 또한, 책에서 와니니가 그랬던 것처럼, 건기를 지나 멋진 어른 사자가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아들에게 자신에 찬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심쿵아. 너 자신을 믿고, 멋지게 살아. 그리고 조금 힘들 때는 아빠를 믿어도 돼!"
심쿵이는 내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다시 와니니를 꼭 끌어안고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아들의 눈 속에는 여전히 순수한 동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 되어줄게.'
아들의 작은 손이 와니니의 털을 쓰다듬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자, 이제 와니니랑 함께 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