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u Ming Aug 26. 2024

난카이 대지진? 부산 해파리? 고전 읽기!

책 읽는 아들, 글 쓰는 아빠 #10

암스테르담에서 온 엽서


어느 날, 유럽의 낭만이 담긴 엽서 한 장이 우리 집에 도착했다.


"심쿵아, 나는 지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어. 

비가 와서 숙소에 있다가 점심 먹으러 나왔어... (중략) 그럼 다음엔 독일에서 편지를 보낼게."


유럽에서 날아온 엽서는 여기저기 꾸깃꾸깃해져 있었고, 심쿵이 친구의 삐뚤빼뚤한 글씨는 손끝에서 전해져 온 생생한 온기처럼 느껴졌다. 그 엽서를 받아 든 심쿵이는 금세 나를 찾아와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


“아빠, 우리는 언제 해외여행 가?”


귀여운 엽서로 이어지는, 아들과 친구의 우정


심쿵이의 맑고 반짝이는 눈을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럽 여행이라니, 늘 꿈꾸던 일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나는 심쿵이에게 작년에 싱가포르에 갔던 이야기를 꺼냈고, 올해는 사정상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 그리고 아빠의 사정도 이해해줘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어른스럽게도 심쿵이는 내 말을 이해해 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죄책감이 밀려오며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생 2학년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해외 출장으로 지친 그날 저녁, 

베이징 호텔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뜨겁게 솟구쳤다.

‘내가 있을 곳은 직장이지만, 아내와 아들은 새로운 경험을 해야 해.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렇게 나는 아내에게 ‘심쿵이와 단둘이서 떠나는 일본 여행’을 제안했다. 아내는 일본어 전공자로서 통역사로도 일하며 도쿄에서 몇 년간 거주한 경험이 있었다. 일본 여행은 그녀에게 익숙하고도 편안한 선택지였다. 며칠 고민해 보겠다던 아내는 불과 몇 시간 만에 결정을 내렸고, 아내와 심쿵이는 금세 기대와 설렘으로 가슴을 부풀렸다.




심쿵이의 60권, 고전 읽기 도전!


여행 계획이 확정되자마자, 아내는 심쿵이에게 깜짝 제안을 내놓았다.
"여행 전에 우리 집 서가에 꽂힌 고전 책들을 모두 읽어야 해!"


아내의 계획에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이라는 목표를 통해 고전 읽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다니,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내 시선이 서가에 꽂힌 60권의 두꺼운 책들로 향하자, 걱정이 앞섰다.

‘남은 시간은 겨우 3주, 심쿵이가 과연 이 많은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너무 무리한 목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심쿵이의 60권 고전 읽기 도전!


그러나 내 걱정과 달리, 심쿵이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책 읽는 시간이 점점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소파에 기대거나, 책상에 앉거나, 심지어 식탁에서까지 자세를 바꿔가며 한 권 한 권 정성스럽게 읽어 내려갔다. 어려운 문장을 이해하려고 몇 번이나 다시 읽고, 때로는 엄마에게 설명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처음에는 긴 책을 읽는 것이 어려웠지만, 점점 자신감을 얻어 나중에는 도전적으로 더 어려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때때로, "엄마! 어린이가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 거야?"라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들고 와 묻는 심쿵이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들이 이어질 때는, 아들의 입장에 서서 왜 주인공이 그렇게 행동했는지, 또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 때마다, 엄마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심쿵이의 생각을 들어주었다


다음은 심쿵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세 권을, 베스트 1위부터 3위까지 선정하였다. 


1위: 집 없는 아이 (엑토르 말로)
엑토르 말로의 집 없는 아이는 심쿵이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부모를 잃고 방황하던 주인공 레미가 가족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를 보며, 심쿵이는 걱정했고, 긴장했고, 함께 기뻐했다. 심쿵이는 레미의 여정을 따라가며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는 모습을 통해 따뜻한 우정과 가족의 소중함을 배웠을 것이다. 내가 왜 이 책을 베스트로 뽑았는지 물었더니 심쿵이는 이렇게 답했다.
"이 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피엔딩 중의 해피엔딩이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빠도 너와 함께라면 모든 것이
해피엔딩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대신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2위: 조웅전
심쿵이는 우리나라 명장들이 펼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특히 이 책을 좋아했던 이유는 영웅전이 일곱 살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조웅이 난관을 극복하고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며, 심쿵이는 소파에서 내려와 용맹한 얼굴로 태권도 실력을 가끔씩 뽐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역적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조웅전을 2위로 꼽아준 심쿵이가 은근히 고맙다.
비록 조웅전에는 그런 구절이 없지만, "아버지의 이름으로!"라고 시작하는 아들의 복수 이야기는 세상 모든 아빠들에게 자신이 특별해진 기분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3위: 오즈의 마법사 (프랭크 바움)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는 심쿵이에게 상상력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도로시가 친구들과 함께 오즈의 땅을 모험하며 용기, 지혜, 그리고 마음을 찾기 위한 여정을 통해 심쿵이는 진정한 용기와 우정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특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도로시의 간절한 마음에서 심쿵이는 가족의 소중함과 집이 주는 따뜻함을 새삼 느꼈을 것이다.


심쿵이는 자기 스스로 좋아하는 책들을 읽으면서도, 별도로 3주 내에 60권을 모두 읽어냈다.

하루하루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고전 속 이야기들은 아이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고, 읽을수록 더 많은 책을 찾아 나섰다. "엄마, 오늘 세 권을 다 읽었어!"라며 뿌듯해하는 아들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웠다.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열 권에서 다섯 권 다시 세 권에서 한 권이 남았을 때, 우리 부부 또한 아들의 성취를 숨죽여 지켜봤다. 마침내 60권의 고전을 모두 읽었을 때, 심쿵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두 팔을 벌리며 환호했고, 아내와 나는 아들을 끌어안고 축하해 주었다. 


심쿵이는 오늘도 자랑스러워하며 이야기한다. "우와 내가 저것을 다 읽었다니, 너무 자랑스러워!"


심쿵이를 보며 우리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가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어쩌면 이렇게 성실하고 부모말을 잘 듣는 아이가 있을까?!' 우리 부부는 정말 정말 복 받은 사람들이다.




난카이 대지진 경보 발령과 부산의 해파리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던 어느 날, 난카이 대지진 경보가 발령되었다. 아내와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고 큰 고민에 빠졌다. 여행하려던 곳이 난카이 지역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지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거라면서도,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을 떨칠 수 없었다.


‘일본 여행, 정말 괜찮을까?’


안전이 최우선이라며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친 생각은, 바로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이었다. 호텔 포인트도 쓸 수 있고, 맛있는 음식과 볼거리도 많은 부산이라면 우리 가족에게 딱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하지만 기대감은 뉴스를 보고 산산이 부서졌다. ‘부산 해파리 떼 출몰’이라는 제목이 뜬금없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를 모르는 아빠다.

부산을 갈 수 없다면, 이번엔 고생 좀 하더라도 색다른 경험을 해보자며 강원도 계곡으로 캠핑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캠핑장을 예약하려던 찰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캠핑 용품 대여 여부를 검색해 보니… 대여가 불가하단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에 또다시 당황한 우리 부부는 결국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도서관에 가기로 결정했다.


현관문을 나서려던 그 순간, 아내가 휴대폰을 보며 갑자기 외쳤다. "오늘 휴관이래!"


일본 ▶ 난카이 대지진 경보

부산 ▶ 해파리 떼 출몰

강원도 캠핑 ▶ 캠핑 용품 대여 불가

시립 도서관 ▶ 휴관일  



도서관마저 문을 닫았다니! 이쯤 되면 정말 머피의 법칙이 아닌가 싶었다. 모든 상황이 우리를 가로막는 것만 같았지만, 심쿵이는 그저 웃으며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일본에 가려니, 대지진! 부산에 가려니, 해파리! Yo!"


라임이 척척 맞는데, 맞장구를 쳐줘야 할지, 미안해해야 할지… 

아이를 키우다 보면 종종 이런 답을 알 수 없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심쿵이의 돌림 노래는 집안 가득 울려 퍼졌고, 그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놓이는 듯했다. 그러나 아들의 밝은 모습을 보면서도, 아빠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과연, 이번 여행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전 09화 태권도 1단 vs 골프 1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